하재윤의 회상
2014년 설 명절을 앞두고 아들 대호가 보고 싶어 김천 성요셉마을을 다녀왔다. 대호는 지적장애가 동반된 뇌병변 1급 장애를 가진 나의 아들이다. 대호는 경북 김천시 성요셉마을에서 친구들과 같이 지내고 있다. 대호는 일란성 쌍둥이다. 새 봄이 오면 고등학생이 되는 쌍둥이 형제 큰딸아이도 네 살이 되는 띠동갑 막내동생을 안고 같이 차에 올랐다.
우리 차가 마을 앞마당에 도착할 무렵 마치 마중이라도 나오신 듯 원장 신부님께서 마당에 나오셨다가 우리를 먼저 보시고는 손 인사를 하신다. 늘 밝게 웃으시는 모습이라 나이를 가늠할 수가 없다. 한 삼십 대 후반 정도 되지 않았을까 하고 아내에게 물어본 적 있다.
-삼십 대 후반이면 너무 어린 나이시지 않나? 늘 웃는 분이시라 젊어 보일 수도 있지..
아내의 대답이다.
‘나는 늘 웃지 않나? 나는 왜 이렇게 늙어버렸지?’
문득 떠오른 내 생각이다.
대호를 데리고 성요셉마을에서 약 25km 정도 떨어진 김천 직지사 입구로 왔다. 직지사 앞 식당들은 내부가 넓고 공용주차장을 앞에 두고 있다. 단체로 온 관광객들이 많아 대호를 안고 들어가도 특별한 눈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없어서 편할 것 같아 우리 가족이 자주 이용하는 곳이다.
설 명절 앞 마지막 일요일이라 식당은 비교적 한산했다. 식당 안에도 우리 말고는 다른 이들이 없어 식당 안에서 제일 밝고 좋은 특실로 안내되었다. 한가하고 편안한 분위기라 접객 이모들도 여유가 있는지 더없이 친절했다. 메뉴로 고른 산채비빔밥에 파전을 겸한 식사는 한 시간 정도 걸렸다. 다른 손님들이 없어서 눌러앉아있기에 딱 좋았지만, 막내둥이 연이가 계속 방 안에 갇혀 있는 것이 싫증 나는지 점점 장난 끼가 생겨서 식당 이모들에게 뭐라 뭐라 하면서 집적대기 시작했다. 이제 그만 성요셉마을로 돌아갈 때도 되었다.
아내가 예지에게 카운터 이모에게 가서 물을 한 잔 얻어 오라고 시켰다. 예지한테 뭔가 어색한 자리에서 심부름을 자주 시키는 것은 아내의 깊은 의중이 담긴 것이다. 예지는 특히 숫기가 없어서 이런 심부름을 받으면 ‘어, 가서 뭐라고 해에?’ 하면서 말끝이 맥없이 흐물흐물 해져버린다.
-이모, 물 한 잔 주세요, 하면 되지 뭐라고 해-
아빠가 한마디 거드는 것을 듣고서야 뭉그적거리며 컵을 들고 일어선다. 예지가 들고 온 물 한 잔을 마신다. 시원하다.
대호를 성요셉마을로 돌려보내고 다시 부산으로 내려오는 길에 생각해보니 사내아이였던 나도 예지만큼 숫기가 없었다.
옛일 하나가 생각났다. 내가 중3이었었던지 고1이었던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버지는 나를 보고 우(牛) 시장을 같이 가자고 하셨다.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내가 시장을 간다고? 그것도 소시장을? 폼생폼사 질풍노도 절정의 시기에 우거지 상(像)을 하고 다녀서 별명까지 자칭 ‘니체’이던 내 폼이 말이 아닐 텐데 친구라도 보면 어쩌려고 소를 사고팔고 하는 소시장을 간단 말인가!
아버지 요구는 이러하셨다. 송아지를 내다 팔아야 하는데 아직 코도 뚫지 않은 송아지이니 목에 맨 줄로는 송아지를 제어할 수가 없다. 해서 어미소를 같이 데리고 가면 저절로 송아지가 따라오는데 어미 소를 아버지가 끌 테니 너는 송아지가 잘 따라오는지 뒤에서 살펴야 한다!
아버지 말을 거역할 수는 없고, 할 수 없이 아버지가 끌고 가는 어미소를 따라 쫄래쫄래 따라가는 송아지가 저쪽 길 모퉁이를 돌아 사라질 때쯤에야 나도 모퉁이를 돌아서면서 또 멀뚱이 서 있곤 했다. 우시장은 생필품을 파는 오(五)일장에서 좀 떨어진 곳에 따로 마련돼 있었는데, 그곳에 들어가면 겁을 먹은 소들이 엉켜서 우는 소리, 어미 소와 송아지가 서로 갈려서 새끼를 잃은 어미 소가 허연 눈을 뒤집으며 우우~~ 울부짖는 소리.. 거간꾼들의 거친 입씨름 소리.. 하여튼 폼생폼사, 질풍노도 니체가 갈 만한 곳은 아니었다.
송아지와 어미 소가 아버지를 따라 소시장 입구 근처를 들어섰을 때, 아버지에게 온다 간다 말도 없이 나는 마지막 심지에서 피어오른 연기처럼 소리 없이 사라졌다. 우리 송아지가 시끌벅적하고 낯선 소시장에서 어미 소 옆에 붙어서 얌전하게 잘 있을 건지, 아버지가 고삐도 없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송아지에게 마음이 쓰여서 거간꾼들과 흥정은 잘할 것인지 하는 염려는 니체가 알 바 아니었다.
딸내미가 얻어 온 물 한 잔을 마시면서 나는 돌아가신 선친을 생각하였다. 내가 아이들을 키우듯 선친도 나를 그렇게 키우셨으리라. 내가 예지에게 어색한 심부름을 자주 시켜서 숫기를 좀 키워보라고 하듯이, 물질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시대를 살아오신 아버지는 심약한 아들이 의지가 좀 굳게 사내답게 자랐으면 하는 마음으로 소시장을 같이 가자고 하셨을지도 모른다.
선친의 필력입니다. 마산시 진전면 수발사 현판입니다. 조각도 직접 하셨습니다.
되돌아보면 그 시절 아버지로부터 '민주주의'라는 말을 듣고 자란 또래 친구들도 드물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경남 일원에서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자행된 '보도연맹'사건으로 스무 살이 채 안 된 동생을 억울하게 잃은 울분 때문이었을까? 1987년 내가 스무 살이 되고 대학생이 되었을 무렵, 선친은 민주주의 해야 된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사회정의에 대한 개념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시절, 당시로서는 남들이 부러워하고 최고로 안정된 직장이라 할 만한 교도관으로서 사회생활을 시작했으나 혼탁한 사회질서에 적당히 타협하여 주류사회에 적극적으로 편입되지 못하고 온갖 부조리가 판치는 교도관 생활에 염증을 느껴 갓 시집온 어머니와 함께 낙향이라는 삶을 선택하신 당신의 삶을 뒤돌아보면서 장차 사회 속에서 불의에 굴하지 않고 개체가 갖는 사회적 정의를 실현함과 동시에 가장으로서의 개인적 삶에도 충실한 아들이 되어주기를 바라지는 않았을까.
과연 나는 아버지의 의중대로 외연에 흔들리지 않고 정의롭고 자랑스러운 사회인으로 살고 있는가? 딸아이가 얻어 온 물 한 잔이 가족들 몰래 나를 눈물짓게 하고 있었다.
2014년 설 뒤에 쓰고,
2023년 1월 다시 퇴고하다.
브런치 by 하재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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