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해도, 괜찮아
몸이 아프니 마음까지 망가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어느 날부터 나도 모르게 우울증이 찾아왔다. 산후 우울증은 다양한 이유로 시작된다. 출산 전과 달라진 일상(일·취미생활), 달라진 몸, 사회적 고립, '엄마'라는 새로운 정체성, 그리고 몸이 아파서... 사람이 우울해지면 시야가 좁아진다. 생각의 폭이 좁아지고, 마음의 여유가 사라진다. 그래서 한동안 나는 뭐든지 남편을 탓했다. 모든 비난의 화살이 남편을 향했다.
"다 오빠 때문이야."
말끝마다 그 말을 달았다.
임신하면 여성 호르몬이 널뛴다고 했다. 실제로 나도 그랬다. 출산 후에도 호르몬 파도는 멈출 줄 몰랐다. 기쁠 땐 더없이 좋았고, 안 좋을 땐 마치 막장 드라마처럼 끝을 달렸다. 한 번 화가 나면 끝까지 가야만 직성이 풀렸다. 내 몸이 아픈 것도, 그때는 다 남편 탓 같았다.
물론 남편의 영향이 아예 없진 않았다. 출산 전부터 "주말마다 조금씩 이사 준비하자."라고 말했지만, 남편은 "귀찮아.", "피곤해.", "나중에 하자."라며 미뤘다. 그러다 갑자기 양수가 터져 집은 엉망인 채로 병원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새 둥지 증후군'
임신 막달에 집을 대청소하고 아기 방을 꾸미며 용품을 정리하고 싶어 하는 본능적 욕구라고 했다. 나는 출산과 이사 시기가 겹쳐 불안과 예민함이 극에 달했던 것 같다. 병원에서도, 산후조리원에서도 늘 마음 한편엔 '아, 빨리 집 가서 짐 싸야 하는데...'가 떠나지 않았다. 결국 산후 조리원에서 '외출'을 써서 남편과 집에 와 이삿짐을 쌌다. 무리한 탓에 그날 밤 두통, 미열로 타이레놀에 의지해야 했다.
'삼칠일' 출산 후 3주 동안 몸을 회복해야 하는 시기이다. 그 시간에 나는 이삿짐을 싸고 있었으니 관절에 무리가 많이 갔을 것이다.
이사 후에도 출생 신고 등으로 자주 외출했다. '남편은 연차도 못 쓰고, 도대체 내가 왜 이걸 다 하고 있는 거야...'라는 생각에 짜증과 화가 쌓였고, 3주 내내 스트레스를 받았다. 모유가 잘 나오지 않았던 것도 어쩌면 그 영향일지도 모르겠다. (산모의 스트레스가 모유에 영향을 준다고 들었다.)
충분히 쉬지 못한 3주.
그 사이 남편은 어느새 내 감정 쓰레기통이 되어 있었다.
종종 육아를 하다 보면 헛헛한 마음이 들 때가 있다. 하루 종일 아이를 돌보고, 집안일을 하고, 아이를 재우고... 겨우 거실로 나와 보니 아직 저녁도 못 먹었다. 이상하다. 배는 고픈데 입맛이 없다. 분명 냉장고에 반찬도 있고, 밥솥에 밥도 있는데 왠지 차려먹기가 싫다. 하루 종일 애 분유 먹이랴, 이유식 먹이랴 진이 다 빠져서 내 밥 차리는 일조차 어쩐지 노동처럼 느껴진다. 결국 과자와 아이스크림 같은 영양가 없는 것들로 대충 때운다.
기분이 우울하다. 새벽부터 일어나 하루 종일 바빴는데 집은 여전히 엉망이다. 소파에 대충 던져놓은 빨래더미처럼 내 기분도 꾸깃꾸깃해진다. 싱크대에는 미처 설거지 못한 젖병이 아직 있고 바닥에는 알록달록 장난감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앗, 쉬야해서 버리려고 놔둔 기저귀도 아직 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외출을 한 번도 못 했다. 햇빛을 전혀 못 봤다는 뜻이다. 숨이 턱 막힌다. 억울해서 설거지하다 말고 주방 싱크대 창문을 조금 열고 까치발로 밖을 내다본다. 오늘 날씨는 어땠는지, 바람은 부는지, 거리에 사람들은 있는지, 사람들이 무얼 하는지 몹시 궁금해진다. 이미 해는 져서 날은 어두컴컴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내 마음도 덩달아 시커멓게 타들어가는 것 같다.
"집안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다."
종종 친정 엄마가 하는 말이다. 철없던 20대 때는 엄마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콧방귀를 뀌며 '그런가 보다.'하고 넘겼다. 아이를 낳고 키워보니 이보다 더 한 명언이 없다. 정말 끝이 없다. 게다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티가 안 난다. 보람도 안 느껴지고 뿌듯하지도 않다. 불 꺼진 거실에서 식탁에 앉아 대충 폰을 보다 현타가 밀려온다. 갑자기 온몸에 힘이 빠진다. 진이 다 빠지고, 우울하다. 마치 '나'가 없어지는 기분이다. 너무 적막한 거실에 혼자 덩그러니 있으니 나도 같이 사라지고 싶은 기분이다.
그럴 때, 잠깐 생각을 멈추고 이렇게 속으로 말해본다.
'한 인간의 생명을 돌보는 일. 이보다 대단한 일이 또 있을까?'
하물며 반려동물을 키우는 것도 엄청난 책임감이 따르는데 아이를 돌보는 건 정말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러니 엄마들이며, 부디 자신감을 가졌으면 좋겠다. 우리는 매일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 왜 운동선수들이 올림픽에서 땀 흘리며 싸우는 모습이 그렇게 멋있을까. 왜 K-POP 가수들이 무대를 끝내고 땀으로 번들거릴 때 더 빛날까. 엄마의 하루도 그렇다. 씻지 못해 몸에서 냄새가 나고, 옷에는 아기가 흘린 침·이유식·분유·땀자국이 묻어 있어도, 다크서클에 피곤이 내려앉아 있어도 돌아보면 그 모습이 가장 아름다웠다. 엄마들이 하루하루 열심히 치열하게 육아를 하느라 생긴 흔적들이니까. 그건 오직 엄마일 때만 가질 수 있는 훈장이니까.
그러니 오늘도 나를 칭찬하고 다독이자.
"잘하고 있어."
"충분히 잘하고 있어."
거울을 볼 때마다 활짝 웃어주자.
어쩌면 그 한 번의 미소가
내 마음의 체온을 한 칸 올려줄지 모른다.
나는 멋진 사람이다.
나는 멋진 엄마다.
나는 오늘도 해냈다.
오늘도 외친다
아자아자,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