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글에서 '구조'라는 명료한 틀이 어떻게 현실의 복잡한 인간을 담아내지 못하는지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이 구조라는 방패 뒤에 숨을 때, 인간의 도덕성은 어떻게 변질될까? 우리는 종종 '몰라서 그랬다'고 변명하지만, 과연 악은 정말 무지로부터만 오는 것일까? 어쩌면 가장 큰 악은, 모든 것을 알면서도 외면하는 우리의 '회피'에서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제1부 - 제2장. 사회라는 거대한 집】
세 번째 글: 악은 무지로부터 올 수 있지만, 무지로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나치의 유대인 박해 광풍으로부터 가까스로 탈출하여 미국으로 망명한 독일 출신의 유대인 대학교수가 있었다. 1960년 어느 날, 그는 이스라엘의 모사드가 나치 전범을 체포하여 예루살렘으로 압송했고, 이듬해 전세계에 생중계되는 공개재판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는 예정되어있던 대학 강의를 모두 취소하고, 특파원 자격을 얻어 직접 재판을 참관하게 된다. 그는 그곳에서 전범으로 체포된 그 사람이,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사악하고 악독한 인물이 아니라는 점에, 너무나도 평범하고 순진해보이는 사람이라는 사실에 일종의 충격을 받았다. 귀국한 그는 1963년, 한 책을 써낸다. 그 책에는 나치 전범이 '악독한' 사람이 아닌 매우 평범하고 일반적인 사람이었다는 내용과, 그것을 설명하는 개념이 쓰여있었고 화가난 유대인들은 시위를 벌이는 등, 크나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의 ― 사실 그녀의 ― 이름은 한나 아렌트, 전범의 이름은 아돌프 아이히만.
그 책의 이름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며,
그 책에서 등장한 개념이 바로 '악의 평범성 ― 어떤 악은 처음부터 악의로부터 도출된 것이 아닌, 주체적으로 사고하기를 거부하는 것에서 시작되기도 한다는 개념' 이다.
그리고 21세기의 대한민국 교실. 학생들을 지도하다 보면 흥미로운 점을 발견하게 된다. 잘못을 저지른 아이들, 예를 들면 선생님에게 대들거나, 규칙을 어긴 학생들에게 나는 이렇게 물어본다. "정말로 네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는 거니? 나는 네가 모르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러면 학생들은 보통 이렇게 대답한다. "알기는 알죠..." 그리고, 실제로도 반성하는 태도를 보인다—물론 그건 학생을 믿고 싶었던 순진한 교사의 착각일 수도 있지만, 적어도 내 직관으로는 그렇다. 학생들은 도덕적 원리를 모르는 게 아니다. 생각보다 학생들은 옳고 그름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잘못을 저지른다. 왜일까?
아이들이 흔히 말하는 변명 중 하나는 "그냥 다들 하길래…"이다. 이 말은 단순한 핑계가 아니다. 이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드러낸다. 악은 몰라서 발생하는 경우보다, 알면서도 회피하거나, 무시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남들이 다들 한다"라고 말하는 순간, 학생들의 윤리적 감수성은 '구조'라는 이름의 거대한 익명성 뒤에 숨는다. 사람들 역시 악을 저지르면서도 자신이 악을 저지르고 있다고 느끼지 못한다. 왜냐하면, 개인의 도덕적 책임은 구조 속에서 솜사탕처럼 녹아 무뎌지기 때문이다.
집단 속에서 희미해지는 윤리적 책임 — 니부어의 통찰
라인홀드 니부어는 그의 저서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집단의 도덕성은 개인의 도덕성보다 훨씬 낮다"고 말했다. 왜일까? 집단 속에서는 책임이 분산되고, 윤리적 판단이 흐려지기 때문이다. 복잡한 시스템 속에서, 개인은 자신의 행동이 갖는 도덕적 의미를 체감하지 못한다. 집단이 커질수록, 구조가 복잡할수록, 책임의 무게는 집단 전체에 희석된다. 그 결과, 악은 분산되고, 도덕적 판단의 무게는 가벼워지며, 구조 안의 개인은 죄책감 없이 악을 저지를 수 있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모두가 하고 있다"는 생각이 개인의 윤리적 감각을 마비시키는 것이다.
구조 속에서 지워지는 윤리적 책임 — 아렌트의 경고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했다. 홀로코스트의 설계자였던 아이히만은 스스로를 단지 명령을 따른 '행정가'로 생각했다. 아렌트가 지적한 것은, 악이 대단히 사악한 의도에서가 아니라, 구조 속에서 평범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 단계에서 '책임의 전이'가 발생한다. 개인은 자신의 윤리적 결단을 상부로, 구조로 넘기며, 최악의 범죄조차 '그냥 업무'로 전락할 수 있었다. 도덕적 책임감이 흐릿해지는 것을 넘어, 완전히 지워지는 것이다.
군중심리와 정보의 비대칭, 그 속에서 사라지는 책임
심리학에서 '방관자 효과'라는 개념이 있다. 이는 주변에 사람이 많을수록 위험에 처한 사람을 돕지 않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사람이 많을수록 책임감은 분산된다. 경제학에서는 거래 당사자 중 한쪽만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어 다른 쪽이 불리한 상황을 '정보의 비대칭'으로 규정한다. 이 상황에서는, 개별의 경제 주체가 합리적 판단을 내릴수가 없어진다. 윤리적으로도, 정보의 비대칭이 일어날 경우, 개인은 자신이 속한 시스템의 전체 구조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의미, 그리고 그 결과를 명확히 알거나 체감하기 힘들어진다. 결국 홀로코스트의 광기 속에서, 누군가는 기차표를 끊었고, 누군가는 화학물질을 배합했으며, 누군가는 버튼을 눌렀다. 그들은 자신의 행동이 어떤 거대한 악을 완성하는지 인식하지 못한 채, 시스템의 일부로 기능했다. 구조가 복잡해질수록, 이러한 정보적 맹목은 심화된다.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데, 도덕적 판단을 요구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희미해짐과 지워짐 — 도덕적 무감각의 완성
처음, 개인은 자신의 행동이 악을 촉발할 수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인지한다. 하지만 "나 혼자 나선다고 바뀌겠어?"라며 책임을 회피한다. 불편했던 행동이 반복될수록 무감각해지고, 이 반복은 결국엔 윤리적 감수성을 완전히 지워버린다. 처음에는 '알면서 무시했던' 행동이, 이제는 '아예 알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지워짐'의 단계다. 아렌트가 말했던 악의 평범성은 여기서 완성된다. 개인은 도덕적 성찰을 완전히 상실하고, 구조의 피해자가 아닌 공범이자 이용자가 되어버린다.
구조에 맞선 개인의 저항 — 도덕적 긴장관계
구조는 개인을 희미하게 만들고, 반복된 무감각은 개인의 윤리적 판단을 완전히 지워버린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개인의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구조의 내부에 존재할 수밖에 없지만, 그 거대한 틀 속에서도 도덕적 긴장관계(Moral Tension)는 계속 유지되어야 한다. 구조가 개인의 책임을 흐리게 만들 때, 개인이 그것을 스스로에게 되돌려 윤리적 판단을 회복하려는 노력을 말하는 것이다.
"모두가 하니까, 나도 괜찮다"는 생각은 책임의 전이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몰랐다"라는 말은 무책임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개인은 구조가 주는 정보적 맹목을 의심해야 한다. 단지 기차표를 끊었을 뿐이지만, 그 기차가 어디로 가는지 물어야 하고, 단지 버튼을 눌렀을 뿐이지만, 그 버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야 한다.
구조는 우리를 완전히 규정하고 설명할 수 없다. 그리고 그 불완전함이, 바로 개인이 구조에 대해 저항할 수 있는 틈이다. 구조의 내부에서 끊임없이 의심하고, 저항하는 개인만이 그 구조의 압박을 넘어서 윤리적 인간으로 남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