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진 것을 내려놓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by 피디아

자, '정체성'이라는 깃발 아래 모인 집단들이 어떻게 새로운 경계를 만드는지 살펴보았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정체성보다 더 오래되고, 더 단단하며, 결코 자신의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 집단이 있다. 바로 '기득권'이다. 모두가 그들이 내려오길 바라지만, 아무도 그들을 끌어내리지 못한다. 이 끝이 안보이고 막막한 게임은 대체 왜 반복되는 것일까?


【제1부 - 제2장. 사회라는 거대한 집】

열한 번째 글: 가진 것을 내려놓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기득권을 내려놓겠습니다!" 선거철만 되면 정치인들은 하나같이 이런 비장한 연설을 한다.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고, 진정한 공정 사회를 만들겠다고. 듣기에는 참 좋다. 문제는,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기득권이 자발적으로 그 지위를 내려놓은 사례는 로또 1등 당첨자를 찾는 것보다 더 드물다는 점이다.


"그럼 법으로 강제하면 되지!"라고 외칠 수도 있다. 진보적 법안, 재분배 정책, 사회적 안전망 같은 것들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법을 통과시키고 설계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미 기득권층이다. 정치인, 대기업 로비스트, 고위 관료들이 모여서 법의 틀을 만들고, 그들이 세팅한 규칙 안에서만 변화가 이루어진다. 마치 고양이에게 방울을 달자고, 고양이들끼리 모여 회의하는 꼴이다. 결과적으로 그 강제적 장치는 기득권의 핵심을 건드리지 못한 채, '우리 노력하고 있어요'라는 생색내기 수준에 그친다. 예를 들어, 대기업의 세금 감면이나 규제 완화는 늘 '경제 활성화'라는 거룩한 명분으로 정당화되지만, 실제로는 부를 더욱 공고히 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


물론, 간혹 기득권층에서 거액의 기부나 사회 공헌을 약속하며 '악어의 눈물'을 흘릴 때도 있다. 하지만 이는 전체 자산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며, 그마저도 세금 감면 혜택을 노린 경우가 많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활동은, 실제로는 기업 이미지를 세탁하고 법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가장 비싼 종류의 마케팅 활동이 된다. 기득권을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지배를 더 세련되게 정당화하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이 딜레마는 진보적 가치를 외치는 정치인이라고 해서 마냥 자유롭지는 못하다. 재벌 개혁을 외치던 정치인이 대기업과 손을 잡고, 부동산 규제를 주장하던 국회의원이 강남에 빌딩을 소유한 모습은 이제 클리셰에 가깝다. 그들은 구조적 변화보다는 표면적 이미지에 집중하며, 실제 기득권의 손실 없이 '변화가 있는 척'만 하는 상황을 반복한다.


오해하지 말자. 나는 '양심적인 기득권'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게 말한다면, 나 역시 앞에서 언급한 "구조로만 사람을 봐서 '사람'을 지워버리는 오류"에 빠져있는 것이다. 기득권 중에서도 사회적 불평등 해소에 진심인 사람, 공정한 사회를 만드는데 혈안이 되어있는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단지 '양심'이라는 불안한 요소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기득권 내에서 다수가 되기 어렵고, 기득권 내에서 비주류가 될 수밖에 없다는 현실, 그리고, 그 '양심적인 기득권'조차도 본질적-정의적으로 '기득권'일 수 밖에 없다는 이 구조의 위험성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적 변화는 결국 기득권층의 '단체적 양심'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가? 냉소적이지만 딱히 다른 결론을 내리기는 쉽지 않다.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구조적 변혁은 기득권의 포기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 포기를 강제할 장치조차 기득권에 의해 설계된다. 따라서 법적, 제도적 장치를 통한 구조적 접근으로는 한계가 분명하다. 결국 우리는 그들의 '단체적 양심'이 발현되기만을 기다려야 한다는, 지극히 체념적인 결론에 도달한다. 그리고 그 양심이 현실에서 발현될 가능성은, 우리가 길에서 유니콘을 만날 확률과 비슷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우리는 가만히 지켜봐야하는가? 아니다. 우리는 관심을 가져야한다. 저 기업인이 악어의 눈물을 흘리는건지, 진짜 눈물을 흘리는건지. 저 정치인의 행동이 당장의 표를 위한 표리부동인지, 지금까지의 행동을 통해 일관성이 검증된, 진심에 기반한 행동인지. 정녕 그들의 양심이 자동적으로 발현되기가 어렵다면, 우리는 그것을 강제하기 위해 어떻게든 우리의 영향력을 행사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구조 내에서의 개인에 저항이고, '구조'(기득권) 내에 숨어있는 '인간(양심적인 기득권)'을 발굴해내기 위한 도덕적 긴장이다. 기득권의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해선 단순한 법적 규제라는 구조적 접근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가 사회를 바라볼 때, "이것이 진정으로 옳은가?"라는 근본적인 관점과 가치관의 변화가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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