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명할 수 있다고 해서, 말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by 피디아

우리는 철학이 과학이라는 옵저버가 밝혀낸 지도 바깥의 영역을 상상하는 사령관의 역할임을 보았다. 그런데, 만약 그 옵저버가 가져온 '과학적 사실'이라는 보고서를, 사령관이 오용하거나 남용하기 시작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과학은 세상을 설명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지만, 그 도구를 잘못 휘두를 때, 그것은 날카로운 무기가 되어 우리 자신을 향하기도 한다.



【제1부 - 제3장. 앎과 믿음의 경계에서】

열다섯 번째 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해서, 말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현대 사회는 과학에 대한 경외와 의존으로 가득 차 있다. 정신건강도, 인간관계도, 심지어 윤리적 판단조차도 "과학적으로 증명됐느냐"는 질문 아래 정당성을 획득한다. 과학은 이제 우리 시대의 새로운 신(神)이 되었고, '논문'은 그 성서가 되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우리는 종종 한 가지 중요한 선을 넘는다.


과학은 설명하는 도구이지, 정당화의 무기가 아니다. 그 설명이 아무리 정밀하고, 가능성이 높고, 예측력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인간을 판단하거나 고립시키는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연예인의 우울증과 '진단되지 않은 진단'


한 연예인이 방송과 SNS에서 정신적으로 불안한 모습을 보였고, 몇 달 뒤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대중과 미디어는 그의 언행을 되짚으며 "이미 신호가 있었다"고 말하고, 일부는 진단명처럼 "우울증"이나 "경계성"이라는 말을 쓰며 진단과 의심 사이의 모호한 영역을 점유한다.

하지만 미국 정신의학회(APA) 등은 오래전부터 비대면, 비동의 상태에서의 정신의학적 진단을 금지한다. 그 금지는 과학적 한계 때문이 아니라 윤리적 기준 때문이다. 정확도가 낮아서가 아니라, 그 진단이 누군가에게 미치는 영향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진단은 권력이다. 누군가를 정신질환 범주에 넣는 순간, 그 사람은 '취약한 존재'로, '판단할 수 없는 상태'로, '관리되어야 할 객체'로 재구성된다. 그 모든 변화는 그 사람의 동의 없이 시작되어서는 안 되며, 설명 필요하더라도 최소한에 한되어야만 한다.



과학적 설명이 윤리적 정당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문제는 특정 사례에 국한되지 않는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인간은 과학을 자주 윤리의 편리한 탈출구로 이용해왔다. 다윈의 진화론은 생물의 변화 메커니즘을 설명했지만,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은 그 설명을 근거로 가난한 자, 약한 자는 도태되어야 한다는 끔찍한 정당화를 만들었다. 뇌의 차이를 설명하는 신경과학은 남녀의 뇌 구조 차이를 기술했지만, 사회는 그것을 "여자는 공간지각능력이 약하니까 운전을 해서는 안된다", "남자는 여자보다 공감 능력이 약하니까, 양육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는 식의 성차별 이데올로기로 확장시킨다. 우울증의 생화학적 원인이 세로토닌 불균형으로 설명되자, 그 결과로 사회적 고립, 빈곤, 비인간적인 노동환경 같은 구조적 문제는 삭제되고 인간은 하나의 '화학적 기계'로 환원된다.



과학은 가능성을 말한다. 윤리는 물어야 한다.


"할 수 있다"고 해서, "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과학은 점점 더 많은 걸 설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AI는 표정과 언어 패턴을 분석해서 감정 상태를 추정하고, 뇌파는 선택을 예측하며, 유전자는 행동 성향을 말한다. 그러나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우리가 그것을 말할 권리가 있는가?"

"우리는 그 정보를 어떻게 써야 하는가?"

"그렇게 '설명된 인간'을, 우리는 어디까지 책임질 수 있는가?"


결론을 내리자. 인간을 설명하는 과학은 필요하다. 하지만 인간을 보호하는 윤리는 더 먼저 와야 한다.

우리는 과학을 믿는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로 살아가는 세계는 신호와 데이터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침묵과 망설임, 판단을 유보하는 윤리 위에 세워진다. 말하지 않음이 미덕일 수 있다는 걸, 설명을 미루는 것이 때로는 사랑일 수 있다는 걸, 우리는 여전히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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