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글에서 우리는 '과학'이라는 가장 확실한 앎의 도구가, 윤리의 경계를 넘을 때 얼마나 위험해질 수 있는지 보았다. 우리는 설명할 수 있다고 해서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그 반대의 경우는 어떨까? 우리가 도저히 설명할 수도, 증명할 수도 없는 문제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제 우리는 이성의 한계에 깨달았을 때, 한 불가지론자가 '믿음'이라는 가장 오래된 선택지를 어떻게 마주하는지에 대한 고백이다.
【제1부 - 제3장. 앎과 믿음의 경계에서】
열 여섯 번째 글: 나는 증거 없이 믿어보기로 했다
신은 전지전능하고, 무한히 선한 존재라 여겨진다. 그러나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전쟁, 질병, 자연재해, 부당한 죽음, 이유 없는 고통. 이 모든 현실 앞에서, 인류는 오랜 질문을 던져왔다. “그렇다면 왜 이런 세계가 존재하는가?” 이 역설은 단순한 질문이 아니다. 그것은 전지전능한 신의 존재와, 그 신이 선하다는 믿음 사이의 깊은 균열이다.
오랜 세월 동안 종교는 이 질문에 대답하려 애썼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기에 그 선택의 결과로 악과 고통이 생겼다는 설명, 신의 '선함'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차원이라는 주장, 혹은 지금의 고통은 더 높은 차원의 '시련'이라는 해석. 하지만 그 어떤 설명도 모든 의문을 해소하지는 못했다. 자유의지로 모든 악을 설명할 수는 없다. 자연재해나 유전병, 갓 태어난 아기의 고통처럼 인간이 선택하지 않은 고통은 도대체 어디서 왔는가?
"신의 선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은, 선함이란 개념 자체를 인간이 감히 다룰 수 없게 만들어버린다. 그렇다면, 우리가 신을 선하다고 부를 수 있는 근거조차 사라지는 것 아닌가? 그리고 만약 신이 전지전능하지 않거나, 그 고통을 막지 못한다면, 그건 신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더 이상 ‘신’이라 부를 수 없는 존재라는 뜻일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신은 왜 이토록 고통스러운 세계를 허락했을까? 나는 이렇게 가설을 세워보았다. 진짜 선함은 고통 속에서만 드러날 수 있다. 아무런 어둠 없는 세상에서, 선은 증명되지 않고, 그저 조건처럼 존재할 뿐이다. 자유의지는 역경 속에서만 진짜 의미를 가진다. 선택이 쉬운 곳에서는, 자유는 그냥 기호일 뿐이다.
따라서, 고통은 증명이고, 역경은 해명이다. 그러나—그리고 이게 가장 슬픈 부분이다—때로는 신이 허락한 그 고통이 인간의 감당을 훨씬 넘어서 버린다.
그래서 나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이렇게 믿기로 했다.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지금 우리가 겪는 이 고통과 모순의 세계 너머에, 우리가 상상조차 하지 못할 만큼 선하고 따뜻한 세계를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모든 고통은 너무 부조리하고, 너무 잔혹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신을 논리로 증명하려 하지 않고, 신의 존재를 보장받지도 않은 채, 그저 조용히 믿어보기로 했다.
이것은 종교가 아니다. 이것은 체계나 의식이나 예배가 아니다. 이것은 확신 없는 사람의 고요한 결단이다. 나는 "신이 있다"고 말할 수 없지만, "신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이 태도로 살아가겠다"고는 말할 수 있다. 만약 그것이 믿음이라면, 나는 지금 이 순간, 가장 조용한 방식으로 신을 믿고 있는 셈이다.
이건 진리를 발견한 자의 외침이 아니다. 이건 진리를 알 수 없다는 걸 인정한 자가, 그래도 포기하지 않기 위해 택한 길이다. 나는 신을 모른다. 하지만 신이 존재한다면, 이 고백을 이해해주시길 바란다. 왜냐하면 나는 모든 질문의 끝에서 조용히 믿어보기로 한, 믿음 없는 자의 믿음을 선택한 사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