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글에서 나는, 내가 어떻게 이성과 증명의 한계를 넘어 '불가지론적 믿음'이라는 고요한 결단에 이를 수 있는지 살펴보았다.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정직한 여정이었다. 물론, 그렇게 거룩한 결단이라기보다는, 단지 그렇게 살아보겠다는 내면의 다짐이었다. 그런데 이 개인적이고 조용한 믿음이, '종교'라는 거대한 시스템과 그들이 목숨처럼 여기는 '경전'을 만날 때, 무슨 일이 벌어질까? 우리는 종종 그 경전 속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들과 마주하며, 우리의 믿음을 시험받곤 한다. 어쩌면 가장 기이하게 느껴지는 장면 중 하나를 통해, 우리는 신앙의 본질에 대해 다시 한번 질문을 던져야 할지도 모른다.
【제1부 - 제3장. 앎과 믿음의 경계에서】
열일곱 번째 글: 열매 없는 나무와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변명
예수는 배가 고팠다. 멀리 무화과나무 하나를 보고 다가갔다.
잎이 무성해 기대했지만, 철이 아니기에 열매는 없었다. 그는 말했다.
"이제부터 영원히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며칠 뒤, 그 나무는 뿌리째 말라 있었다. 말 그대로 저주였다.
표면적으로 '저주'라는 강렬하고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형태로 기록된 이 사건은, 복음서 중 마가복음 11장에 등장한다.
기독교 신자든 아니든, 이 일화는 대체로 "예수가 왠지 이상하게 구는 이야기"로 기억된다. 열매 철도 아닌데, 그걸 보고 화를 내서 저주를 내리다니, 지극히 불합리하고 감정적이지 않은가? 노벨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한 위대한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에서 이 장면을 예수의 인격적인 결점 중 하나로 꼽았다. 자비롭고 이성적인 성인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 기이한 분노의 표출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의문은 남는다. 정말 예수는 단순히 짜증이 났던 걸까? 그렇다면 왜 복음서의 저자들은 이 장면을 지우지 않았을까? 후대에 기록된 마태복음은 이 부분을 약간이나마 순화했지만, 가장 먼저 쓰인 것으로 알려진 마가복음은 굳이 "철이 아님이라"고 기록했다. 무화과 철도 아닌 것을, 일부러 강조하며 적었다. 그들은 자신의 스승을 욕먹이고 싶었던걸까?
당연히 아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를 충동적인 인물로 그리려 한 것이 아니다. 이 '저주'라는 파격적인 형태는, 내용의 중요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의도된 상징이자, 가장 엄중한 방식의 예언자적 선언이다.
[무화과나무가 은유하는 것, 그리고 "철이 아님"의 진정한 의미]
구약에서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영적 상태를 나타내는 대표 은유였다. 예레미야는 무화과가 시든 것을 보고 이스라엘의 타락을 말했고(렘 8:13), 호세아는 처음 익은 무화과를 하나님의 기쁨이라 불렀다(호 9:10). 무화과에 열매가 없다면, 그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진 백성의 상태라는 뜻이다.
한 마디로, 이 은유는 당시 유대인들에게 문학적 상징이 아니라 체화된 종교언어였다. 예수가 무화과나무를 저주했다는 것은, 곧 "이스라엘을 심판한다"는 언어 없이 행해진 심판의 선언이다.
다만,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 장면의 가장 중요한 디테일은 "철이 아님이라"는 말이다. 예수는 열매가 없을 걸 알면서도 찾았다. 당연히 없을 철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저주했다. 이게 말이 되는가?
바로 그 말 안 됨이 핵심이다. 예수는 불합리한 분노를 보여주려는 게 아니라, 불합리한 핑계를 깨부수고 싶었던 것이다. 당시 유대교 체계는 모든 책임을 "때"의 문제로 유예하고 있었다. "지금은 메시아가 올 때가 아니다." "지금은 이방인을 품을 시기가 아니다." "지금은 율법만 지키면 된다." "지금은 로마와 충돌할 수 없다." 지금은, 지금은, 지금은...
예수는 그 반복되는 알리바이, "지금은 철이 아니야"라는 말 속에 숨은 영적 무기력과 형식주의를 향해 저주를 날린 것이다. 무화과는 죄가 없다. 죄는, 때가 아님을 핑계 삼는 종교에게 있었다.
이 일화는 같은 대목에서 샌드위치 형식으로 기록된 성전 정화 사건과 하나로 엮인다. 성전은 화려하고 거룩한 듯 보였지만, 실상은 돈바꾸기, 형식적 제사, 타락한 권력의 중심이었다. 예수는 상을 뒤엎었고, 장사치들을 쫓아내며 외쳤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무화과나무와 성전. 겉은 멀쩡하나 속은 텅 빈 두 상징. 그리고 예수의 급진적인 저주와 뒤엎음. 신약에서의 예수는 많은 대목에서 "사랑의 구세주"로 그려지지만 적어도 이 두 일화는 당시 체제에 대한 "심판의 선언자"에 가까운 예수의 면모를 보여준다.
[예수가 열매를 찾으러 오시는 때]
사실, 이 장면은 오늘날에도 똑같이 유효하다. 우리는 여전히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라는 말을 반복하며, 모든 변화와 책임을 유예하고, 많은 정의와 열매 맺음을 '시기상조'라 부른다. "지금은 사회적 합의를 기다려야 한다." "지금은 교회 개혁은 위험하다." "지금은 말하지 말고 기도만 하자." "지금은 최저임금을 올릴 때가 아니다." "지금의 복지 확대는 무리이다." "아직 이러한 담론은 이르다, 우리에겐 성숙할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말'은 늘, 가장 절실할 때 나온다.
그리고 바로 그때, 예수는 열매를 찾으러 오신다. 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열매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것이 아니다. 예수가 저주한 것은 "지금은 때가 아니다"라는 합리적으로 보이는 변명 뒤에 숨어서 책임을 유예하는 시대정신과 종교 체제 그 자체이다. 그것은 바로 거룩한 비합리성이다. 합리적으로 보이는 그 변명의 잎은 무성했으나 열매는 없었다. 그 말은 우리에게 묻는다.
"너희는 지금, 열매를 맺고 있는가? 아니면 '지금은 철이 아니다'는 말 속에 숨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