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 회의주의(Linguistic Skepticism)
앞선 글에서 우리는 '유일신'이라는 거대한 이름 아래, 종교가 어떻게 분열되고 갈등하는지 살펴보았다. 그 모든 싸움의 근원에는 '해석'의 문제가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가장 기본적인 도구인 '언어'는 어떨까? 우리는 정말 같은 단어를 쓰면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제 우리는 '완벽한 소통은 가능한가'라는, 가장 일상적이면서도 가장 근원적인 회의주의의 세계로 들어가 본다.
【제1부 - 제3장. 앎과 믿음의 경계에서】
일곱 번째 글: 진정한 소통은 가능한가? 언어 회의주의(Linguistic Skepticism)
우리는 매일 수많은 대화를 나누며, 서로의 생각과 감정을 전달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모든 단어가 각자에게 동일한 의미를 전달하는가에 대해서, 철학계에는 뿌리 깊은 회의가 존재한다.
잠깐, 짓궂은 장난을 쳐보자. 포털 검색창에 "음란하다"를 검색해보겠는가? 검색 결과로 이렇게 단어의 정의가 나온다. "음탕하고 난잡하다." 그래? 이번에는 "음탕하다"의 뜻을 알아보기 위해 다시 검색해보자. 그러면 이렇게 나온다. "음란하고 방탕하다." 음란의 뜻은 음탕한건데, 음탕의 뜻은 음란한거란다. 그러면, 음란은 뭐고 음탕은 뭐인거지? 원래 어려운 숙제를 물어보면, 엄마는 아빠한테 가서 물어보라고 하고 아빠는 엄마한테 가서 물어보라고 한다. 그러면 도대체 이 단어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물론, 우리는 어쨌든 머릿속으로 '음란'과 '음탕'의 이미지를 갖고 있기 때문에, 당장의 의사소통에 치명적인 문제가 생기지는 않는다. 그러나 각자 머릿속 단어의 이미지가 정확하게 일치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이걸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제3의 단어를 통해 단어를 정의해야한다. 그러면, 그 단어의 정의는 또 어디까지 어떻게 추적해야하는가? "나무"라는 단어를 듣고 누군가는 참나무의 이미지를, 다른 누군가는 소나무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사랑"이나 "행복" 같은 추상적 단어에 이르면 그 차이는 더욱 커진다. 심지어 같은 '빨강'도 우리 머릿속의 RGB 값은 전부 다를 것이다. 심지어 RGB 값이 같다고 쳐도, 같은 검정을 '시암 블랙'이니 '리얼 블랙'이니 하는 식으로 전부 다 다르게 인식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RGB값 역시 소수점 단위로 구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언어 회의주의(Linguistic Skepticism)는 이처럼 언어가 완전한 의미 전달을 보장할 수 없다는 철학적 입장이다.
철학자 윌라드 콰인(Willard Quine)은 "의미의 불확정성"을 통해, 언어가 상황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어떤 섬에 갔다고 가정하자. 당신은 원주민의 안내를 받으며 섬을 함께 탐험하고 있다. 다만, 그 원주민의 언어를 당신은 알지 못한다. 그런데, 갑자기 수풀에서 토끼가 뛰쳐나오자, 그 원주민이 토끼를 가리키며 이렇게 외친다.
"가봐가이!"
당신은, 이 "가봐가이"를 무슨 뜻으로 받아들일까? "토끼다!"라고 했을수도 있다. 아니면 "저것좀 봐!"일수도 있다. "깜짝이야!"일수도 있다. 심지어, 토끼를 가르키는거라도 그것이 토끼의 귀인지, 토끼의 뛰는 동작인지, 명확히 알 수 없다. 이를 일상으로 확장해보면, 당신이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한국인과 같은 언어로 소통한다 하더라도, 상대방이 정확히 어떤 맥락과 어떤 관점에서 사용했는지 그 정확힌 내면까지는 알기 어렵다.
똑같은 이유로 같은 단어라도 사람마다 떠올리는 심상 역시 다를 수밖에 없다. '의자'를 떠올릴 때 어떤 사람은 나무 의자를, 다른 사람은 플라스틱 의자를 상상할 수 있다. 한 사람에게 '행복'은 경제적 안정일 수 있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인간관계나 자기 성취일 수 있다. 결국, 우리는 같은 단어를 사용하지만, 그 내부의 이미지는 저마다 다르다. 이렇게, 언어는 맥락에 의존하기 때문에, 어떤 단어든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의미로 정확히 번역(소통)되리란 보장이 없다는 관점, 이것이 바로 언어 회의주의이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있다.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은 "언어의 의미는 그 사용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관점에서 언어의 의미는 단어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사용되는 사회적 맥락과 규칙에 의해 정의된다. 사람들이 일상에서 "의자"라는 단어를 '앉을 수 있는 물건'을 지칭하는 행동으로 반복해서 사용하기 때문에, 그 의미가 공유된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가 완벽하게 동일한 심상을 전달하지 못하더라도, 우리가 그것을 사용하는 방식이 유사하다면 소통은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반론에도 불구하고, 언어 회의주의는 여전히 유효한 의문을 던진다. 사람들은 같은 말을 사용하면서도 서로 다른 이해를 할 수 있다. 이는 철학적 논쟁이나 "정의"와 같은 사회적 이슈에서 극명하게 드러날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사실 비일비재하다. 같은 단어를 두고 서로 다른 가치관과 신념, 언어의 습관이 투영되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 전달은 왜곡될 수밖에 없다.
결국 언어는 우리의 생각을 표현하는 강력한 도구지만, 그 의미가 사람마다 정확하게 동일하지는 않다. 언어 회의주의는 우리가 믿는 '완벽한 소통'이 실질적으로 불가능할 수 있음을 드러낸다. 같은 단어를 사용하면서도 서로 다른 심상을 떠올리고, 다른 해석을 내리는 것은, 결국 우리의 소통이 일종의 '합의된 오해' 위에 성립된다는 지독하게 냉정한 현실을 보여준다. 어쩌면 완전한 이해를 기대하기보다는, 그 오차를 인정하며 소통하는 것이 언어의 본질일지 모른다.
그리고, 내가 어쩌다가 포털 검색창에 '음란하다'를 검색해봤는지는 궁금해하지 않아도 된다. 불순한 의도가 아니라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검색한거니까. 정말로.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