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라는 이름의 불공정

방송에는 인심, 나에겐 바가지

by 피디아

예능에서 연예인들이 재래시장에 가는 장면을 보면 훈훈하다.

상인들은 "이건 서비스야~" 하며 더 담아주고,

쭈뼛거리며 웃는 연예인들에겐 인심이 넘친다.

"아이고, 저 연예인 누구야~ 실물이 훨씬 낫네~"

그날 시장은 촬영장이고, 정은 연출이 아니라 진짜 같아 보인다.

이 장면을 볼 때마다 나는 늘 이상한 찝찝함이 남는다.


왜일까?

왜 우리 가족이, 혹은 나 혼자 재래시장에 갔을 때는 그렇게 따뜻한 '정'을 받아본 적이 없는 것 같을까?

왜 나한텐, 가격표도 없고, 무게도 애매한 상품 앞에서

"이건 뭐 그냥 알아서 드릴께" 하다가

뼈다귀가 절반인 도다리를 받고 멍해진 기억들이 더 강할까?

내 실물이 도다리보다 훨씬 낫지 않아서일까?



뉴스에선 종종 재래시장이나 수산시장에서 터지는 '바가지 논란', '외국인 차별', '불친절 갑질'이 이슈가 된다.

그리고 나는 생각하게 된다.

역시, 정은 아무에게나 주는 게 아니었나?

그렇다면 정은 사실, 선별적으로 주어지는 '마케팅' 같은 건 아닐까?


정이라는 단어는 따뜻하고, 사람 냄새 나고, 기계적이지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이 단어를 너무 쉽게 관용의 이름으로 쓴다.


"정이 없네." "정으로 좀 깎아주지." "정이 있어서 더 담았어요."

혹은

"그날은 기분이 좀 안 좋았나봐요." "원래 인심 좋은 데인데, 아마 오해였을 거예요."


하지만 이 정은 엄밀히 말하면, 감정에 기반한 자의적인 재화의 불공정 배분이다. 누군가에게는 퍼주고 누군가에게는 최소한도를 안 지키며 그저 표정과 상황, 친근함의 기호에 따라 왔다 갔다 하는 것. 기업이 이랬다면 '일관성 없는 운영', '소비자 기만'이라고 불렸을 행동이, 재래시장에서는 '정'이라는 말로 감싸지고 훈훈하게 포장된다.


그리고 그 훈훈함은 대체로 카메라를 향한다.


더 불편한 것은, '누군가에게 퍼준다'는 것은, 경제학적으로 '누군가는 그만큼 착취되고 있다'는 시그널이기 때문이다. '호의가 계속되니 권리인줄 아는 것' 이 아니다. 그 '호의'가 누군가의 '권리'를 빼앗아서 제공하는 것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사실 '정'이라는 감정을 좋아한다. 어쩌면 사랑한다. 나는 생각보다 물렁하고 헐렁하며 감성적인 사람이다. 나는 모든 게 딱딱 떨어지는 완전한 시스템을 더 불편해하는 사람이다. 모든 걸 매뉴얼화하고, QR코드 붙이고, 정가표 붙여놓고 표정도 최소화하는 그런 시스템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소소한 인간성, 주고받는 덤과 양보, 유연한 서비스는 너무나도 따뜻하고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이건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증인이다.


하지만 그 '정'이 누군가에겐 특혜, 누군가에겐 차별과 착취로 작용할 때, 그리고 그걸 '정이니까'로 덮을 때, 나는 거기서 불편해진다.


정은 좋아한다. 다만, 그것이 불공정한 이중기준을 감추는 미사여구가 될 때는 아니라고 본다.


브라운관에 등장하는 정은 마케팅이고, 자원은 감정에 따라 배분된다. 그 자원이 누구에겐 넘치고, 누구에겐 제공되지 않을 때, 우리는 "이 시장이 나한테도 정이 있느냐"를 묻게 된다. 나는 여전히 시장이 좋다. 다만 가끔은 묻고 싶다.


"정은 누구에게나 주어질 수 있는가?"

그리고 "그게 정이라면, 왜 때때로 서운하게 느껴질까?"


정이 주는 따뜻함과 정이 가리는 불공정 사이에서 우리는 늘 아슬아슬한 균형을 타고 산다.

다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정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질 수 있을때 진짜 정이다.

선택받은 사람만 느끼는 정은 단지 착취와 전략의 다른 언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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