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는 배신처럼 보이는 신성의 초월
종교의 가장 불편한 진실은 이것이다.
가장 충직한 자조차, 구원의 도래 앞에서는 초월되어야 한다는 사실.
그 초월은 외부에서는 배신처럼 보인다.
공경받던 스승이 사라지고, 예언자는 잊히고,
그 자리를 누군가가 "넘어섬"으로만 진리가 시작된다.
이 글은 그 "넘어서야만 했던 한 인물"
즉 예수와 그 앞을 먼저 걸었던 세례자 요한의 관계에 대해서 다루고자 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단지 과거의 종교사건이 아니라
모든 종교 창시자들이 거쳐야 했던 근본 구조임을 말하고자 한다.
예수는 요한의 계승자였을까?
세례자 요한은 예수보다 먼저 등장했다.
광야에서 외쳤고, 회개를 선포했고,
"불"과 "도끼"와 "심판"이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살았다.
요한의 역할은 예수의 구원이 이르기 전에, 사람들이 회개하게끔 바닥을 닦는 역할이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종말이 임박했음을 경고했고, 바로 그 예수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이는 마치 완벽한 영적 계승처럼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예수가 그를 그대로 계승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예수는 요한의 메시지를 그대로 따르지 않았다.
요한이 경고했던 심판 대신,
예수는 치유를, 포용을, 가난한 자들을 위한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했다.
요한이 말한 것은 종말이었고, 예수가 말한 것은 시작이었다.
요한의 질문: "그가 맞는가?"
복음서에는 매우 의미심장한 장면이 등장한다.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 (마태복음 11:3)
요한은 감옥에 갇혀 있었다.
자신이 외쳤던 그 종말은 오지 않았고, 자신에게 세례를 받았던 그 청년은 죄인을 감싸고, 세리와 식사하며, 심판을 유예하고 있었다.
이 질문은 단지 확인이나 순수한 질문일까?
실망과 의심, 그리고 자신이 열어놓은 길에 대한 정직한 회의다.
예수가 그 질문에 직접 "그렇다"고 대답하지 않은 것도 의미심장하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마태복음 11:4-6)
대신 그는 맹인이 보게 되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해졌다는 사실을 말한다.
이것은 암시적 선언이었다.
"메시아는 네가 생각한 방식대로 오지 않는다."
어쩌면 불경한 분석: 예수는 요한을 넘어서야 했다
역사비평학의 시선으로 보면 예수는 요한 운동의 연장선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곧 그 메시지를 바꾸고, 그 운동을 흡수하고, 결국 요한의 틀을 넘어선다.
세례자 요한의 종교 조직을 흡수하고, 그 토대에서 자신의 복음을 전파했다.
요한은 도끼와 심판을 이야기했지만, 예수는 회복과 구원을 이야기했다.
요한은 스스로 작아졌지만(요 3:30),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선언했다(요 10:36).
이 전환은 일부의 눈에 기회주의, 혹은 전임자를 묵살한 정치적 행동처럼 보일 수 있다.
실제로 요한의 제자 중 일부는 예수를 따르지 않았으며, 사도행전에는 요한파가 별도로 등장한다.
그러나 이 모든 해석을 종합해도, 예수는 요한을 모욕하거나 깎아내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말한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가장 작은 자도 그보다 크다."(마 11:11)
그의 말은 선지자 세례 요한에 대한 인정과 존중이면서도,
동시에 그 한계에 대한 선언이기도 했다.
요한은 마지막 예언자였고, 예수는 새 시대의 첫 인물이었다.
초월의 필연성: 이별은 죄가 아니라 완성이다
이 지점에서, 요한을 넘어서야만 했던 예수의 길은
더 이상 인간적 윤리로 설명되지 않는다.
인간의 눈에서 보면, 예수의 찬양과 존중은 가식과 변명일 뿐이다.
그러나 예수는 요한을 넘어서면서 요한을 거부하지 않았고,
요한을 초월하면서 그를 깎아내리지 않았다.
다만, 요한이 생각한 방식으로 메시아가 도래하지 않는다는 것을
요한이 생각한 심판의 한계를 정직하게 이야기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성인의 구조다.
예수가 요한의 계승자이자 후계자였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니라, 기존 질서의 승계일 뿐이었을 것이다.
진정한 종교 창시자란, 기존 질서에 대한 충성을 통해 나타나지 않고,
그 질서를 넘어서야만 등장한다.
왜냐하면, 종교는 그 자체로 따라야할 으뜸되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진리의 깨달음은 배우는 것이 아니다: 싯다르타와 예수
이 구조는 동양에서도 반복된다.
역사적으로 석가모니의 스승은 둘로 여겨진다. 알라라 칼라마와 우다카 라마푸타
석가모니는 이들에 대해서 이렇게 평했다.
"그의 가르침은 열반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그 스승은 그 가르침을 스스로 실현한 자가 아니다."
- 알라라 칼라마
"그의 가르침은 열반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이 가르침은 고통을 끝낼 수 없다. 그 역시 가르침을 스스로 실현한 자가 아니다." - 우다카 라마푸타
헤르만 헤세의 소설 싯다르타에서
싯다르타는 당시의 고행자들의 무리에 들어가 그들의 가르침(고행, 금식, 자아 극복)을 따른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결국 그들을 떠난다. 심지어 부처 고타마(석가모니)를 만났지만, 결국 떠나게 된다.
"그들은 많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깨달음' 자체는 가르칠 수 없었다."
비록, 소설속 장면일 뿐이지만, '깨달음'의 순간은 스승에게 종속되지 않고 스스로 도달해야한다는 의미이다.
스승에게 귀속되는 자는 창시자가 아닌 추종자가 될 뿐이다.
종교는 언제나 스스로의 체제를 배신함으로써 탄생한다.
진리를 창조하기 위해서 그를 떠난 자만이,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 종교를 열 수 있다.
종교는 단순한 따름이나 사소한 깨달음이 아니라, 가장 높은 진리의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유대교의 심판 구조를 버렸고,
싯다르타는 힌두의 윤회론을 벗어나 해탈을 정의했고, 마호메트는 다신 숭배를 뿌리째 바꿨다.
모든 종교는, 내부로부터의 이단을 통해 새로운 중심이 된다.
그 전환은 항상 불편하고, 인간에게 배신처럼 보이며, 기존 공동체에겐 고통이다.
물론, 비판적 입장이나 불가지론자들에게 이런 도약은 늘 개운하지 않다.
그들을 단지 '인간'으로 대하고자 하는 입장에서, '나의 말이 진리라서 너를 초월했노라' 라는 주장은
그저 자신을 '진리'라고 주장하는 인간의 독선으로 보일 뿐이다.
이러한 종교적 해석 자체가 개인의 권력 획득, 사상을 신화적으로 미화하고, 편집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 넘어서야 했던 그 지점 때문에
그들은 단순한 계승자나 설교자가 아닌, 종교의 창시자요, 성인으로 남았던 것이다.
믿음을 위해 이단이 되어야 했고, 대속을 위해 충성을 거슬러야 했다.
진리는 충성을 파괴하면서 도래한다
요한은 길을 닦았고, 예수는 그 길 위에서 복음을 말했다.
요한은 종말을 외쳤고, 예수는 그 종말을 새 시작으로 바꿨다.
우리는 이 모든 과정이 누군가의 토대를 넘어서는
충성의 이반처럼 보이는 초월의 순간이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바로 그 불편함이야말로 종교의 본질이다.
진리는 충성의 완성이 아니라, 초월을 통해 도래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