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 위에서 잇는 국체(國體)

백제와 남송, 그리고 한국인의 저항 DNA

by 피디아

1. 붕괴가 가져온 위계의 재편, 수직에서 수평으로


고대 한일 관계(백제-왜)를 둘러싼 오랜 논쟁은 철저히 '지배냐, 피지배냐'라는 수직적 프레임에 기반하고 있다. 고대 국가간의 역학 관계를 수직적 관계로 규정하는 것은 직관적인 이해를 위한 단순화, 그리고 역사학자들 역시 '국민'이라는 민족주의적 관점에서는 충분히 이해가 가는 부분이지만, 고대 백제와 일본의 관계(나아가서 모든 국가간의 관계)를 단순한 상하 관계로 규정하는 것은 현재도 학계에서 매우 신중한 영역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475년 고구려의 한성 점령과 백제의 웅진 천도라는 대격변을 통해, 그 이전의 우열 구도가 근본적으로 재편되었다는 점에는 전반적인 학계의 동의가 존재한다.


4세기 근초고왕 시기, 백제는 선진 문명의 전수자이자 동아시아 해상 네트워크의 패권자로서 기능하였다. 이 시기 백제는 일본(야마토 정권)에 대해 명백한 문명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으며, 중국의 책봉 체제를 모사한 일종의 '가상적 군신 관계'의 구축(즉, 형제관계)을 시도했다. 그러나 고구려의 침공으로 개로왕이 전사하고 수도가 함락된 475년의 사건 이후, 백제는 타국에 국력을 투사할만한 잠재적 동력을 상실했다. 이는 단순한 패전이 아닌, 백제라는 국가의 중추신경계가 절단된 '국체(國體)의 붕괴'에 가까운 위기였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양국 관계는 급속도로 재편된다. 백제는 더 이상 일방적인 후견인이 될 수 없었고, 생존을 위해 일본의 군사적 지원이 절실해졌다. 일본은 여전히 백제의 선진 문명이 필요했기에, 양국은 점차 수직적 우열관계에서 벗어나 '상호 생존과 이익을 위한 수평적 동맹자'로 나아간다. 5세기 후반 백제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반면, 6세기에 이르러 일본은 소가씨와 쇼토쿠 태자 등의 등장으로 점차 온전한 국가 체제를 완성해가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문화적으로나 명분적으로는 백제가 여전히 '형님'의 지위를 유지했을지언정, 실질적인 국력의 균형추는 단계적으로 대등하게 맞춰진 것이다. 즉, 백제의 위기와 일본의 성장이 맞물려 두 국가의 관계를 '대등에 가까운 파트너십'으로 이끌게 되었다. 장수왕의 한성 점령은 백제에게 있어 단순한 영토 상실이 아니라, 국가의 국제적 위상을 근본적으로 무너뜨리고 재배치시킨, 붕괴에 가까운 사건이었던 것이다.




2. 팩트와 서술 사이: 남송은 쪼개고 백제는 잇는 '인식의 차이'


여기서 우리는 근본적인 질문에 봉착한다. "장수왕의 한성 점령은 백제에게 있어 단순한 영토 상실이 아니라, 국가 정체성을 송두리째 뒤흔든 붕괴에 가까운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한성 백제의 붕괴를 단순한 '천도(Capital Transfer)'로 간주하고, 인식하고, 가르치고, 배우고 있는가?


역사적으로 이와 가장 구조적으로 동형성(Structural Isomorphism)을 띄는 사례는 중국의 송(宋)나라이다. 북송이 금나라에 의해 붕괴되고(정강의 변), 강남으로 내려가 남송을 세웠을 때, 중국사는 이를 냉정하게 '북송'과 '남송'으로 구분한다. 황하 중심의 중원 문명권을 상실하고, 장강 중심의 강남 문명권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중국사는 이를 단순한 이사가 아니라 국가의 지정학적, 경제적 DNA가 육상 제국에서 해상 상업 제국으로 바뀐 '제2의 건국'으로 간주한다. 심지어 그들은 스스로를 분리하지 않고 여전히 '송'이라 칭했음에도 말이다.


구조적으로 보면 백제의 웅진 천도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백제'의 이미지는 문주왕 이후 성왕으로 대표되는 '호서-호남 기반 국가'이다. 그러나 백제의 건국 DNA는 철저하게 '한강 유역'을 기반으로 했다. 온조왕 이래 대대로 지배하던 패권의 심장인 '한강 유역'을 상실하고 '금강 및 서남부 문명권'으로 이동한 것은 남송의 강남 이동에 비견될만한 체제 전환이다. 지배 엘리트는 궤멸되었고, 통치 기반은 재조립 수준으로 뜯어고쳐야 했다. 일본서기에서는 노골적으로 '백제가 망했다'고 표현할 정도였다. 게다가 웅진 천도 이후, 개로왕의 뒤를 이은 문주왕은 3년 만에 시해당했다. 국왕 시해의 주범은 문주왕의 아들인 삼근왕에 의해 1년만에 처단당하고, 그 삼근왕 역시 즉위 2년만에 의문스럽게 요절하는 등, 웅진백제의 국정은 혼란 그 자체였다. 성왕 대에 이르러서는 잠시나마 국호마저 '남부여'로 개칭하며 쇄신을 꾀했다. 반면 남송의 고종은 30년 이상 제위를 유지하며 상대적으로 안정된 치세를 보였고, 국호를 유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안정적으로 천도한 남송은 '분기된 왕조'로 보고, 훨씬 혼란스러운 교체기를 지난 백제는 '연속된 단일 왕조'로 보는가? 한성 함락을 단지 수도의 점령으로만 보는 시각은, 역사의 이면을 보지 않으려는 나이브한 인식이 아닌가?



3. 공간과 명분의 중국, 시간과 정신의 한국: 정통성을 보는 두 개의 눈


지금부터는 해석의 영역이다. 이 서술의 불일치는 팩트의 차이나 왜곡의 영역이 아니라, 한중 양국이 지닌 '역사의 인식론적(Epistemology) 차이'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중국 역사는 광활한 대륙에서 수많은 왕조가 명멸하는 불안정성의 역사였다. 중국의 통일 왕조의 수명은 짧으면 십여년, 길어도 300년을 넘기지 못했다. 그들에게 정통성(Legitimacy)이란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현실적 패권(Realpolitik)'과 '능력', 그리고 '자격'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천명(天命)'이다. 그리고 천명을 수행하는 자의 의무이자 가장 확실한 증명은 '중원(공간)'을 차지하고 경략하는 것, 더욱 직접적으로는 '황하' 유역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삼황오제와 우임금 이래, 천명을 받드는 이의 가장 큰 역할은 황하를 치수하는 것이었다. 중원을 지배하는 것은 바로 황하를 지배하는 것이었고 황제를 상징하는 색깔은 노골적으로 '황하'의 색깔인 '노란색'이었다. 장강이 황하보다 훨씬 거대하고 경제적으로는 진작에 황하를 압도했을지언정, 천명은 언제나 황하 유역의 중원에 있었다. 동아시아의 정신을 해석하는 제1도구로 가장 애용되는 '유교'사상은 어떠할까? 성리학 자체가 국가의 건국 이념이었던 조선과는 달리, 중국에서는 유교 역시 '중원을 경략'할 자격을 정당화하는 정치철학적 이데올로기 가운데 하나일 뿐, 천명의 뿌리는 그보다도 훨씬 아득한 고대의 황제 신화에 닿아 있다. 공자가 '요순시대'를 이상적인 시대로 설정하고, 맹자가 자격없는 군주에 대해 '역성혁명론'을 주창한 것은, 그럴싸한 우연이 아니라, 황제 신화에 근거해서 중원 지배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유교적 이데올로기의 구조적 필연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고대 주나라 이래로 원나라 이전까지 중국의 수도는 거시적으로 일관되게 시안-뤄양-허창(업현)-카이펑 순으로 '서에서 동으로' 이동하였다. 이는 험준하고 척박해진 관중에서, 평탄하고 비옥한 화북으로 제국의 중심이 이동하는, 정치적-경제적 합리성에 기반한 정략적 선택이었다. 그러나 그 어떤 국가도 자의적으로 황하 유역(중원)을 포기한 적은 없었다.


만약 경제적 합리성이 정통성보다 우선했다면, 강남 개발이 완료된 육조시대 이후로는, 굳이 전란에 쫓기지 않더라도 풍요로운 강남으로 천도하는 국가가 적어도 하나쯤은 나왔어야 했다. 그러나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여 대운하를 건설하면서 쌀을 북쪽으로 실어 나를지언정, 중국의 그 어떤 통일 왕조도 '자의적으로' 중원을 버린 적은 없었다. 오히려 반대로 명나라처럼 풍요로운 남경을 버리고 기어이 척박한 북경으로 올라가는 선택을 했을 뿐이다. 이는 '풍요로운 강남'보다 '척박한 중원'을 차지하고 경략하며 북방 민족을 막아내는 것(天子守國門)이야말로 천명(天命)을 입증하는 길이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공간 중심의 정통론'은 왕조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위진남북조 시기, 정통은 위와 진에 있었고, 심지어 이민족에 의해 건국된 북조 역시 시간이 지나면서 남조를 제치고 정통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오대 십국에서도 정통성은 강남개발로 인해 경제적으로 훨씬 풍요로운 남방의 십국이 아닌 혼란스러울지언정 개봉과 뤄양을 두고 쟁탈전을 벌인 중원의 오대가 지니고 있었다.


물론, 단지 한나라로부터 선양을 받은 국가가 위나라였고, 북조를 계승한 수나라가 중원을 통일했으며, 송나라가 오대의 후주로부터 선양을 받았을 뿐이라는 다소 건조하고도 타당한, 결과론적 접근도 가능하다. 하지만 그 기저에는 근본적인 인식의 차이로 인한 구조적인 원인이 깔려 있다. 바로 중원을 차지한 정권이 '정통(正統)'이고, 중원을 잃은 정권은 아무리 혈통을 주장해도(남조처럼) '참칭(僭稱)' 혹은 '반쪽짜리'에 불과하다는 냉정한 공간 중심의 정통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배층이 인식하는 '대의'와 백성들이 인식하는 '민심' 역시 중원을 중심으로 모였다. 이러한 명분은 중원 정권의 남정은 '정복'이자 천명으로 받아들여지고, 남방 정권의 북벌은 '무리한 원정'으로 지지받지 못하게 만들었다. 결국, 경제적 부양력이라는 이점을 능가하는 천명이라는 명분이 중원에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통일 정권이 중원 정권 중심으로 주도된 것이다. 천신만고 끝에 남방 정권 기반으로 건국되고 통일제국을 이룩한 국가조차도, 스스로의 천명을 증명하기 위해 중원이나 북방으로 천도를 하게 된다. 중국 정통성의 절반 이상이, 정확히는 정통성의 본질 자체가 '중원의 소유'에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중원을 잃은 남송은, 비록 혈통이 이어졌다 해도 천명을 상실한 '변질된 정권' 내지는 천명의 의무를 이행하지 못한 '약체 정권'으로 취급된다. 물론 남송 역시 당대에는 복고적인 화이관과 대의명분론에 입각한 주자학을 통해 남송의 명분론을 강화하려 시도했지만, 결국 중원이라는 실체를 잃어버린 것에 대한 처절한 방어기제이자 심리적 보상이었을 뿐, 그 자체가 중국 역사의 본류인 '중원의 논리'를 뒤집지는 못했다는 방증이다.



반면, 한국사는 한 번 왕조가 들어서면 500년 이상 지속되는 초장기 안정성의 역사이며, 왕조의 교체나 국가간의 대립 역시 한반도 내에서의 각축전이었다. 이 환경에서 국가는 곧 '거대한 민족 사회'였다. 한국인에게 민족적 정통성은 영토의 크기나 현실적 패권이 아니라, 민족과 혈통의 연속성(Lineage)', '역사적 연속성(Continuity)'과 '명분(Justification)'에서 나왔다.


중국 왕조가 중원을 잃는 것을 천명의 상실로 받아들인 것에 반해, 상대적으로 한국의 왕조는 수도가 함락되기 직전 왕이 피난(파천)을 떠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의자왕은 계백의 결사대가 황산벌에서 저항하는 사이 당연한 듯 웅진으로 피난하여 항전 태세를 다졌고, 고려 현종은 2차 여요전쟁 당시 나주로 몽진을 떠났다. 최씨 정권은 몽골을 피해 강화도로 숨었으며, 공민왕은 홍건적을 피해 안동으로 몽진하였다. 조선 선조 역시 왜란 때 의주로 피난을 떠나며 광해군에게 분조를 맡겼고,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파천하였다.


반대로, 중국의 주(周) 왕실은 호경에서 낙읍으로 천도하는 순간 천명을 잃고 껍데기만 남았으며, 당대의 명군으로 추앙받던 당 현종은 안사의 난 당시 사천으로 피난하는 순간 군인들조차 인정하지 않는 희대의 암군으로 전락하였다. 똑같이 왕위계승자에게 분조를 위임한 선조가 끝까지 왕위를 지킨 것과는 대조적으로, 현종은 분조를 설치한지 고작 1개월만에 금군에 의해 사실상 강제로 폐위되고 분조를 이끈 황태자가 황제로 즉위하게 되었다.


중국은 '공간(땅)'을 지키기 위해 대운하를 팠고, 한국은 '시간(연속성)'과 '얼'을 지키기 위해 결사적으로 핏줄과 위패를 보존하며, 천도를 전제로 청야작전을 수행했다. 중국적 관점에서 '땅'을 버리고 도망친 왕은 자격을 잃은 것이지만, 한국적 관점에서는 '왕의 핏줄'과 '국가의 얼'이 보존되는 한, 그곳이 산성이든 섬이든 그 자리가 곧 국가의 중심이었던 것이다. 마치 아버지가 집을 잃고 이사를 가도 여전히 아버지인 것처럼, 백제가 한강을 잃었어도 부여씨의 명분이 이어지는 한 백제는 망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최씨 정권의 사례나 한국전쟁 당시 한강 인도교 폭파와 같은 비극에서 보듯, 이러한 생존 본능이 지배층만의 안위를 위해 부정적으로 발현된 어두운 이면 또한 존재한다.)


즉, 송나라는 '중원이라는 공간의 주인이 바뀌었으니 다른 나라'가 된 것이고, 백제는 '명분의 주인이 같으니 같은 나라'로 남은 것이다. 그래서일까? 다소 경박한 스테레오 타입이자, 편견일 수도 있겠지만, 세계적으로 유대인들이 '상업과 자본을 지배하는 민족'으로 유명하다면, 중국인들은 해외에서도 '땅 많이 사는 민족'으로 유명하다. 나아가서 매우 민감한 주제이지만, 어쩌면 '만주'라는 공간에서 '고씨'와 '대씨'가 정통의 주인으로 있었던 요동-만주 지역 한국사에 대한 한국과 중국의 관점의 차이도, 매우 넓은 의미에서는 같은 기저 의식에서 비롯된 문제일지도 모른다.




4. 현대적 함의: 주인 없는 나라를 지키는 '의병(義兵)'의 기원


어쩌면 이러한 '명분 중심의 국가관'이 한국 역사 특유의 독특한 저항 정신을 잉태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국가를 계약 관계가 아닌, '충(忠)'의 대상이자 '효(孝)'의 확장으로 바라보는 '충효일치(忠孝一致)'의 사회 구조에서 기인한다.


중국의 주요 농민 반란(진승-오광, 홍건적 등)을 보자. 중국의 농민 반란은 부패한 왕조, 중원을 지배할 자격을 잃은 왕조를 갈아엎는 '역성혁명(Change of Mandate)'의 성격을 띤다. 실제로 중국의 많은 난세는 농민 반란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유방이나 주원장처럼 빈농 출신이 천명을 받아 황제가 된 사례가 존재한다. 일본의 '잇키'는 만세일계의 천황은 논외로 두고, 실질적 지배자인 다이묘를 상대로 생존권을 요구하는 '거친 계약 갱신'의 성격이었다.


반면, 한국의 민초들은 기이하게도 '국가 수호형' 저항을 보여준다. 고려의 대몽 항쟁 시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구한말 의병 전쟁을 보자. 왕은 백성을 버리고 도망쳤고, 관군은 무너졌다. '실리(계약, 능력주의)'의 관점이라면 백성들은 국가를 버려야 했다. 그러나 한국의 농민들은 "임금은 아버지와 같다"는 가족주의적 국가관에 입각하여, 낫과 괭이를 들고 일어나 무능한 왕조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못난 아버지라고 해서 호적을 파내지 않는 것처럼, 백성들에게 국가는 버릴 수 없는 '정신적 가치'였다. "나라는 망해도 핏줄(민족 정체성)은 끊어지지 않는다"는 고대 시대부터의 믿음이, 의병이라는 형태로 발현된 것이다.


심지어 한국사에서 가장 난세에 가까운 형태인 후삼국 시대조차 마찬가지다. 원종과 애노의 난을 시작으로 수많은 농민 봉기가 있었지만, 중국과 달리 한국사에서 농민이 독자적으로 짧게나마 왕조 창업에 성공한 사례는 전무하다. 궁예는 신라의 혈통을 주장하였으며, 마진·태봉을 건국하기 이전에 국호를 '고려'라 칭함으로써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주장했고, 신라의 장군 출신인 견훤조차 후백제를 건국하며 내세운 기치는 '의자왕의 원수를 갚자'였다. 난세의 영웅조차 백성을 모으기 위해서는 '핏줄'과 '역사적 명분'을 빌려야만 했던 것이다. 이는 국가를 통치 기구(Government)가 아니라, 민족으로서, 즉, 내가 지켜야 할 '확장된 가족(Nation-Family)'으로 인식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물론, 학술적으로 '한국의 국가관은 가족적 국가관이다'라고 단순화 하는 것은 논쟁의 여지가 있겠으나, 적어도 한국인에게 국가는 일본식의 '계약 관계'나 중국식의 '천명 계약'을 넘어선, 마치 떼려야 뗄 수 없는 '가족'과 같은 도덕적 운명 공동체로 작동했다.


이 DNA는 현대사로도 이어진다. 영토도 국민도 없이 상하이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우리가 대한민국의 기원으로 받아들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중국이 '중원'을 차지해야 정통이라 주장할 때, 우리는 타국에서라도 '법통(Legitimacy)'과 '정신(Spirit)'이 이어지면 그것이 곧 나라라고 믿었다. 서구적·중국적 관점(영토/실효지배)에서 임시정부는 국가 성립 요건이 부족해 보일지 모르지만, 한국적 관점에서는 완벽한 정통 정부다.



5. 폐허 위에서 다시 쓰는 역사


우리가 백제의 역사를 단절이 아닌 연속으로 기록한 것이, 단순히 옛 역사가들의 관성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숱한 침략과 위기 속에서도 "우리의 역사와 얼은 영토의 상실로는 절대 끊어지지 않는다"라고 선언하는, 한국인의 집요한 생존 본능이자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의지의 발현이면서, 동시에 현대 한국인들과 역사학자들이 국가를 바라보는 그 '인식'의 관점에 기반한 것일지도 모른다.


백제가 한성 붕괴라는 멸망적 타격을 입고도 결과적으로 일본과 대등한 동맹을 맺으며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힘, 그리고 현대 한국이 식민지와 전쟁의 폐허 위에서도 '한국'이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고 재건할 수 있었던 힘. 그 기저에는 '눈에 보이는 영토(중원)'나 '현실적 이익(실리)'보다 '보이지 않는 연결(연속성과 명분, 정신과 민족적 얼)'을 더 소중히 여겼던 우리만의 고유한 역사 인식이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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