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이라는 알리바이를 넘어
나는 '삼국지'라는 세계를 애정한다. 소설의 비장함도, 게임의 전략도 좋아한다.
학창 시절 읽었던 책의 한 구절은 지금도 뇌리에 선명하다.
"역사란 영웅이 만드는가? 아니면 민중이 만드는가?"
정확한 문장은 잊혔으나, 그 질문의 무게만큼은 여전하다. 고전 소설인 삼국지는 역사를 철저히 '영웅'의 서사로 기술한다. 그것은 말 그대로 '소설'이며, 인물이 살아 숨 쉬는 '캐릭터'들의 무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 역사학의 시선에서 영웅의 서사로 역사를 읽어내는 '영웅사관'은 낡고 엘리트주의적이며, 나아가 촌스러운 것으로 치부되곤 한다. 몇몇 특출난 위인이 역사의 물줄기를 결정한다는 관점은, 대다수 인간을 그 물결에 휩쓸려 부유하는 존재로 전락시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흐름의 반작용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민중사관'이다. 역사는 소수의 영웅이 아닌 다수의 민중에 의해 주도되며, 영웅이란 단지 시대와 민중의 요구가 '호출'해낸 대리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는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에 근본적인 전복을 가져왔다. 위인의 업적을 쫓던 전통적 시각은 물러나고, 민중을 작동시키는 경제적·사회적 '구조'를 탐구하는 것이 학술적으로 더 높은 가치를 인정받게 된 것이다.
우리는 흔히 민중사관의 등장을 민주주의와 인본주의의 승리라고 믿는다. 왕후장상의 역사가 아닌, 이름 없는 민초들을 역사의 주인으로 호명했기 때문이다. 영웅사관을 옹호하든 비판하든, "영웅사관은 엘리트주의적 한계가 있고, 민중사관은 인본주의적이다"라는 명제에는 암묵적으로 동의한다.
과연 그럴까?
여기에는 우리가 간과했던 서늘한 역설이 도사리고 있다. '민중'이라는 집단을 역사의 주어로 내세우는 동안, 정작 그 안에 살아 숨 쉬는 '개인'은 문법적으로 소거되어 버렸다는 사실이다. 인간을 거대한 구조의 부속품으로 환원시키는 역사관이 진정으로 인본주의적인가? 우리는 지금 민주적이라는 명분 아래, 인간 고유의 '능동적 잠재력'과 '도덕적 책임'마저 삭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물어야 한다.
역사라는 흐름의 감옥 - 호출되는 인간, 소거되는 의지
민중사관은 민중의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 역설적으로 민중 개개인이 아닌 '구조'를 연구한다. 개별 인간의 행위를 모두 추적하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그들을 움직이는 거시적 구조를 분석하는 것이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주의적 접근의 치명적 맹점은 인간을 철저히 수동적인 존재(Passive Being)로 그려낸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개인은 역사를 빚어내는 주체가 아니라, 시대적 모순과 경제적 토대가 만들어낸 '효과(Effect)'에 불과하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 무대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시대가 필요로 할 때 '호출'되었다가 구조가 바뀌면 퇴장하는 기능적 도구로 전락한다.
이는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폄하다. 아무리 거대한 시대의 흐름(Trend)이라 할지라도, 그 물꼬를 비틀고 방향을 바꾸는 것은 결국 인간의 고유한 능동성(Agency)이다. 그러나 구조론적 시각은 이 역동적인 '개인의 힘'을 우연이나 오차 범위로 취급하며 삭제해 버린다. 내가 나의 삶과 역사를 바꿀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부정당한 인간에게 남는 것은 무력감뿐이다.
거대한 알리바이 - "구조가 시켰다"는 변명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수동성이 '윤리적 마비'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인간에게 '능동성(할 수 있는 힘)'이 없다면, 당연히 '책임(해야 하는 의무)'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구조 결정론은 개인에게 완벽한 '도덕적 알리바이'를 제공한다.
민중사관의 시각에서 흔히 제기되는 논변이 있다.
"히틀러의 광기와 카리스마는 본질이 아니다. 본질은 패전국 독일의 상처받은 자긍심이 히틀러라는 영웅을 '추대'했다는 구조적 필연성에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히틀러가 없었더라도, 그 역할을 수행할 누군가는 등장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물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 죄는 누가 지는가?' 당시의 독일 민족 전체인가? 혹은 베르사유 조약을 강요한 승전국들의 구조적 억압인가? 그렇다면 그 억압을 주도한 클레망소는 개인인가, 구조의 대리인인가?
전체주의의 광기나 사회적 부조리 앞에서 개인들은 누구나 "나는 거대한 시스템의 톱니바퀴였을 뿐"이라고 항변할 수 있다. 유대인 호송 열차의 버튼을 누른 역무원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도, 학살의 설계자 힘러조차 역사의 거대한 파도 앞에서는 단지 떠밀려가는 '개인'일 뿐이다. 이 논리대로라면 총통 히틀러조차 단지 시대가 호출한 불행한 희생양일 뿐이다. 구조주의의 그늘 아래서는 그 누구에게도 온전한 책임을 물을 수 없게 된다는, 섬뜩한 면책의 가능성을 직시해야 한다.
요컨대, 자신이 역사를 거스를 수 있는 주체임을 포기하는 순간, 그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에서도 면제된다. '행위'가 없으면 '책임'도 없다. 인간을 시대의 산물로만 규정하는 것은, 비겁한 자들이 '민중'이라는 익명의 그늘에 숨어 죄책감을 덜어내는 도구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영웅의 재해석 - 고독한 결단과 주권의 회복
그렇다면 영웅사관은 어떠한가? 이 지점에서 우리는 낡은 유물로 취급받던 영웅사관의 가치를 재발견해야 한다.
여기서 재조명하려는 영웅의 개념은, 단순히 초인(Superman)을 상정하여 역사의 공과를 몰아주거나, 반대로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우기 위한 희생양을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복권해야 할 영웅의 모습은 타인 위에 군림하는 '전근대적 엘리트'가 아니라, 거대한 구조의 압력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끝내 자신의 의지로 응답하는 '현대적 책임자'다.
이는 '인간은 시대의 압력을 거스르고, 자신의 의지로 물줄기를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가장 강력한 찬가이자 가치 선언이다.
나치 독일의 광기 아래서 모든 개인이 주체성을 소거당한 것은 아니었다. 오스카 쉰들러는 한때 속물적인 나치 부역자였으나, 홀로코스트의 참상을 목격하고 1,200여 명의 유대인을 구해냈다.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은 "비정상적인 시대에는 비정상적인 방법이 필요하다"며 히틀러 암살을 시도했다. 우리는 그들을 '영웅'이라 부른다.
핵심은 이것이다. 우리는 구조에 순응하고 부유하는 부속물이 아니라, 그 내부에서 판단하고, 행위하고, 저항하며, 끝내 책임지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 단지 '군중'에 머물지 않고 주체적으로 역사를 엮어가는 이들이야말로 이 시대의 진정한 '영웅'들이다.
이 관점은 우리에게 중요한 동기를 줌과 함께, 동시에 막중한 짐을 지운다. 당신이 구조를 뚫고 나갈 '능동성'을 가진 존재라면, 그 결과는 온전히 당신의 빛나는 성취이자, 동시에 당신이 짊어져야 할 책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웅적 인간관은 "시대 탓, 구조 탓"을 허용하지 않는다. 고독한 결단의 순간에 직면하여,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고 그 무게를 견디는 '책임지는 개인'을 요구한다.
각자의 삶에서 영웅이 되어야 하는 이유
진정한 인본주의란 인간을 구조의 피해자로 연민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바꿀 잠재력을 가진 존엄한 주체로 대우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민중사관이 씌워준 '수동성의 굴레'와 '익명의 안식처'에서 걸어 나와야 한다.
구조가 나를 호출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구조를 뚫고 나가겠다는 능동성, 그리고 그 과정과 결과 뒤에 비겁하게 숨지 않겠다는 책임감. 이 두 가지 영웅적 태도를 회복할 때, 우리는 비로소 휩쓸려가는 부유물이 아니라 역사의 진정한 항해사가 될 수 있다. 민주주의는 역설적으로, 우리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이러한 영웅의 혼을 가질 때 비로소 완성된다.
역사란 무엇인가? 영웅이 빚어내는가, 민중이 호출하는가? 가장 쉬운 답변은 '그 사이 어딘가'일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해석자가 아닌, 역사를 살아가는 우리의 자세는 이래야만 한다.
"우리는 역사의 거대한 흐름 안에 살아가지만, 매 순간 영웅적으로 판단하고, 행위하고, 책임져야만 한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인본주의적 역사관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