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벌과 함께 사라진 '포기하지 않는 스승'
매가 사라진 빈자리, 유토피아는 오지 않았다
지금 대한민국 교실에서 매를 든다는 것은 상상도 하기 힘든 그림이다. 나 역시 과거 매를 드는 교사였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어떻게 그랬나 싶을 정도로 세상은 바뀌었다. 세상은 생각보다 빠르게 바뀌고 체벌 금지는 의심할 여지 없는 역사적 진보다. 학생의 절대적인 신체권을 보호하고 교실에서 폭력을 몰아내는 것. 이는 인권 사회로 나아가는 당연한 수순이다.
그렇게 우리는 매가 사라진 빈자리를 교사와 학생 간의 따뜻한 대화와 이성적인 이해가 채울 것이라 순진하게 믿었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현재의 교실은 유토피아가 아니라, 극도의 방어적 기록과 차가운 방관, 그리고 통제가 불가능해진 아이들의 방종이 지배하는 위태로운 공간이 되어버렸다.
초기 훈육이라는 모범 답안, 답안지 밖의 문제아
교육계는 이러한 붕괴의 대안으로 ‘초기 훈육의 중요성’을 제시한다. 무조건적인 수용과 방임이 결국 훈육의 실패를 부르므로, 어른들이 감정을 배제하고 단호하면서도 정교한 규칙을 초기에 설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교육학적으로 흠잡을 데 없는 모범 답안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이 중요성조차 아직 대중적인 공감을 받기는 요원해보인다. 현재 우리 사회의 교육은 수용과 방임을 자유, 인권과 동일시하고 있다. 냉정하게 보면, 이것이 사회적 인식의 현주소다.
그러나 일단, 이 부분은 차치해보자. 다음 단계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위함이다. 만약 이 세련된 시스템, 즉, 초기 훈육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된 단계라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이 세련된 시스템은 우리 교실을 이상적인 공간으로 만들 수 있을까? 글쎄. 이 시스템은 가장 치명적이고 현실적인 질문 앞에서 갑자기 다른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초기 훈육'의 골든타임을 이미 놓쳐버린, 이성적 통제가 전혀 먹히지 않는 회색지대의 아이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통제 불능의 비행 청소년 앞에서 대화와 정교한 매뉴얼이 무력화되는 순간, 이 훌륭한 모범 답안은 한계에 도달한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현대 교육이 숨기고 있던 진짜 잔인한 민낯이 시작된다.
신체적 고통보다 잔인한 현대 사회의 형벌, '제도적 영구 배제'
초기 훈육에 실패한 아이를 제어하기 위해 현대 사회가 내미는 카드는 지극히 차갑고 단호하다. 112 경찰 신고, 학교폭력위원회, 소년원 송치, 그리고 정학과 퇴학이다. 미셸 푸코는 일찍이 근대 사회가 신체를 찢는 고문을 '야만적'이라며 없앤 대신, 인간을 감시하고 '기록'으로 옭아매는 더 교묘하고 잔인한 형벌 제도를 만들었다고 꿰뚫어 보았다.
종아리를 맞은 상처와 신체적 고통은 며칠이면 아문다. 하지만 현대 사회가 합리적 훈육이라는 이름으로 들이미는 '전과 기록'과 '제도적 배제'는 한 인간의 남은 삶 전체에 영구적인 낙인을 찍는다. 폭력성은 덜어냈을지언정, 그 결과의 ‘불가역성’ 측면에서는 과거의 매보다 훨씬 파괴적이다.
이러한 ‘배제의 잔인성’은 오늘날 온라인을 지배하는 캔슬컬처(Cancel Culture)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학폭 가해자나 비행을 저지른 연예인을 향해 대중은 분노를 쏟아낸다. 아르바이트도, 사회적 활동도, 그 어떤 갱생의 기회도 허락하지 않으려 든다. 마치 "죄를 지었으면 사회적으로 굶어 죽어라"고 저주하는 듯하다. 우리가 미성년자에게 소년법을 적용하고 특별하게 대우하는 이유는 그들에게 아직 ‘교화와 성장의 여지’가 있다는 교육적 전제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의 사회적 인식은 이 틈을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는 아이들을 향한 '교육'을 포기하고, 오직 완벽한 '배제와 폐기'만을 요구하고 있다. 아이의 신체를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아이를 공동체 밖으로 영원히 추방해 버리는 '사회적 사형 선고'를 합당한 처벌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푸념처럼 이야기한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것이 아니다' 이 명제가 맞는지 틀린지에 대해서 논하려면, 수없이 깊은 철학적 고민이 있어야 할 것이다. 어쩌면 인류가 멸망할때까지도 이 주제로 싸우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적어도 교사만큼은 그래서는 안 된다. '사람은 바뀐다'라고 믿는 것. 그것이 교사의 첫번째 자세이다.
체벌과 함께 교실에서 사라진 '헌신', 그리고 스승
과거 교실은 어떠하였는가? 오장풍 교사처럼 학생들을 자신의 화풀이 대상으로 여기고 폭력으로 쾌락을 취하던 야만적인 교사도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매를 '교육'이라고 착각하며 휘두르던 어리석은 교사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교사들, 아니 정확히 말해 소수의 진정한 '스승'들은 달랐다. 그들은 자신의 얄팍한 만족을 충족하기 위해 매를 드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내가 매를 드는 한이 있어도 너를 올바르게 교육하겠다 라는 사명감으로 매를 들었다. 매를 들어서라도 가르쳐야하는 가치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과거 스승들이 들었던 '사랑의 매'를 미화하여 '폭력' 그 자체를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런 교사가 다수인지, 소수인지에 대해서도 많은 논란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폭력적인 매의 껍데기 안에 담겨있던 무시할 수 없는 교육적 시그널을 직시해야 한다. 스승이 스스로 악역을 자처하며 매를 드는 행위의 기저에는, 아이를 경찰서나 법원 같은 차가운 시스템 밖으로 내던지지 않겠다는 처절한 의지가 있었다. 내 손에 피를 묻혀서라도 "너를 이 사회의 쓰레기통으로 추방하지 않고, 내 품 안에서 끝까지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맹렬하고 끈끈한 연대의 증명이었다.
우리는 교실에서 폭력을 내쫓으면서, 이 ‘지독한 헌신’마저 함께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렸다. 현대의 교사에게 없는 것은 체벌만이 아니다. 학생을 엄격하게 지도할 수 있는 권한, 그리고 그 학생을 용서할 수 있는 권한, 학생의 교육에 필요한 수없이 많은 권한을 잃고, 단지 '교육서비스 제공자'로 전락하였다. 그렇게 권한을 잃은 현대의 교사들은 법적 리스크를 피하기 위해 아이와 목숨 건 영혼의 줄다리기를 포기한다. 그저 묵묵히 증거를 수집하고, 기계적인 매뉴얼에 따라 아이를 사법 시스템의 컨베이어 벨트 위로 조용히 밀어 올릴 뿐이다. 차가운 제도가 아이를 폐기하는 것을 방관하는 이 체제를 과연 우리는 인간적인 진보라 부를 수 있을까.
사법화를 멈춰 세울 스승이라는 방파제: 훈육과 용서의 재량권
물론 우리는 체벌의 시대로 돌아갈 수 없으며, 돌아가서도 안 된다. 신체적 폭력은 어떤 숭고한 의도도 결국 공포와 위축으로 오염시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매를 들지 않고도, "나는 널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는 그 끈질긴 진심을 어떻게 아이의 뼈와 심장에 새길 수 있을까?
아이들에게 이런 맹렬하고도 숭고한 헌신을 보여주려면, 교실에서의 주도권을 제도가 아닌 교사가 쥐어야한다. 이는 폭력을 행사할 권리가 아니라 관계와 규칙을 지휘할 권한이다. 교사에게 사법적 배제나 기계적 매뉴얼을 뛰어넘어, 아이를 끝까지 붙들고 대면할 수 있는 ‘징계와 용서의 절대적 재량권’을 쥐여주어야 한다. 규정상으로는 퇴학에 처해야 할 아이라도, 교사가 자신의 목을 걸고 "이번 한 번은 내가 이 아이를 책임지겠다"며 제도를 막아설 수 있는 권한, 아이의 잘못을 끝장 대면으로 직면하게 만들고 학부모의 무리한 개입을 철저히 차단할 수 있는 막강한 지휘권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사는 용서와 징계에 있어서 충분하게 독립적인 재량권을 가져야한다. 아이가 큰 잘못을 했을 때, 학교폭력위원회나 규정이라는 기계적 매뉴얼에 넘기지 않고 "규정상 넌 정학(혹은 전학)이지만, 내 목을 걸고 이번 한 번은 내가 널 책임지겠다"라고 선언할 수 있는 권한. 아이의 영혼이 무너지고 다시 세워지는 순간은 기계적인 처벌을 받을 때가 아니라,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자가 나를 위해 그 권력으로 나를 덮어주고 용서할 때' 발생한다. 지금은? 교사에게 그런 권한은 없다. 절차대로 안 하면 교사가 직무유기로 고소당한다.
또한 학생의 지도에 있어서 완전한 통제권을 가져야 한다. 문제 아이를 방과 후에 3시간이든 4시간이든 교실에 남겨두고 끝장 토론을 하거나 과제를 시킬 수 있는 절대적 권한이 있어야한다. 현재는 학원 가야 한다, 휴식권을 침해했다며 불가능하지만, "네가 잘못을 깨닫고 내 눈을 똑바로 볼 때까지 넌 오늘 집에 못 간다"는 끈질긴 장악력이야말로 물리적 고통 없이 아이를 압도하는 강렬한 시그널이 된다. 학부모의 개입을 차단할 권리 또한 주어져야한다. 교사가 아이와 목숨 걸고 영혼의 줄다리기를 하는 동안, 학부모가 "우리 애 기죽이지 마라"며 난입하는 것을 법적으로 완전히 차단할 수 있는 방어권이 필요하다. 지금은? 이러한 훈육은 학부모의 민원폭탄을 받기 딱 좋은 교육 방식이다.
아이가 남에게 피해를 주었을 때, 체벌로 죗값을 퉁치게 해주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아이를 편하게 만들어주는 도피처가 된다. 강력한 권한을 가진 교사는 아이를 피해자, 혹은 공동체 전체에 대한 책임 앞에 직면시킨다. 아이가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게 어떤 상처를 주었는지 직면하게 만들고, 핑계를 대지 못하게 철저히 인지시킨다. 이 고통스러운 대면의 순간에, 교사는 아이를 비난하는 쪽에 서지 않고 아이의 어깨를 꽉 잡고 옆에 서서 그 모든 수치심과 책임을 함께 버텨낸다. "네 잘못을 똑바로 봐라. 고통스러운가? 그래도 피하지 마라. 선생님이 옆에서 같이 맞아줄 테니까." 이것이 회초리보다 백 배는 더 무서우면서도 끈끈한 '포기하지 않음'의 시그널이다. 지금은? 이는 정서적 아동학대로 조롱받고 비난받는다.
이 모든 것은 교사가 교실의 왕이 되기 위함이 아니다. 강력한 권리에는 철저한 방법론과 무거운 책임이 뒤따라야한다. 따뜻한 엄격함을 통해, 단순히 친절한 교사가 아니라 "나는 너를 너무나 아끼고 사랑하기 때문에, 네가 망가지는 꼴을 단 1초도 두고 보지 않겠다"는 엄격하고 숭고한 태도가 필요하다. 아이가 숙제를 안 해오거나 반항하면, 화를 내거나 때리는 대신 아이의 책상 앞에 의자를 끌어당겨 앉는다. 그리고 도망갈 구멍을 모두 차단한 채 조용하지만 억센 목소리로 말한다. "네가 이걸 다 해낼 때까지 선생님은 퇴근 안 하고 여기 네 옆에 있을 거다."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니라, 피를 말리는 '압도적인 동행'을 하는 것. 이러한 교사의 권한 회복은 단지 교육 서비스 제공자로 전락하여 교권침해의 피해만 호소하는 반쪽짜리 교사가 아니라, 아이의 일탈을 온몸으로 막아내는 무거운 책임을 짊어진 스승이 교실로 돌아오기 위한 마중물이 된다.
물론, 타인에게 치명적인 해를 가한 범죄이거나 물리적인 폭력이 오간 상황이라면 당연히 합당한 사법적 절차를 밟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면, 일탈과 비행의 벼랑 끝에 선 아이들을 향해 경찰의 조서 대신 교사의 끈질긴 '징계와 용서의 재량권'을 먼저 허락해야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이야말로 국가가 '촉법소년' 제도를 겹겹이 유지하는 진짜 이유와 맞닿아 있다. 법이 형벌을 유예하며 의도적으로 비워둔 그 '용서와 교화의 공간'은 차가운 제도가 아니라 온기를 가진 사람(스승)이 채워야만 비로소 완성되기 때문이다.
이상과 현실의 타협점: 교육을 다시 '인간을 품어내는 일'로
그러나, 냉정히 말해보자. 이는 매우 이상적인 전제이다. 이 방법론은 모든 교사에게 진정한 참스승을 넘어서 성인이 될 것을 주문한다. 이건 불가능하다. 과거, 특출난 소수만이 교육을 받고, 스승 역시 그 소수 중의 소수일 만큼 선별되던 시기에나 가능하던 이상론이다. 교사에게 온갖 권한을 다 쥐어주라는 것은 솔직히 내가 봐도 지나치게 낙관적이다. 어쩌면 이러한 교육관보다, 서구중심의 차갑지만 엄격한 시스템적인 교육관이 현대 사회에서는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어떤 교사는 충분히 그 역량이 있음에도 내몰리고 있다는 점이다. 참스승이 되고 싶으나, 시스템으로 인해 교육서비스 제공자로 내몰리는 교사, 자신의 헌신이 짓밟히는 괴로움을 겪는 교사.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과도기에 있기 때문이다. 스승이 되기를 주문하는 사회와 교사가 되기를 강제하는 제도. 우리가 찾아야 할 타협점은 분명 그 가운데 어느 지점에 있을 것이다.
교사를 잠재적 아동학대범으로 의심하며 모든 권한을 빼앗아 매뉴얼에 가둬둔 채, "그래도 참스승이 되어라"라고 요구하는 우리 사회의 기만은 이제 끝나야 한다. 아무 권한 없는 교사는 아이의 영혼을 구원할 수 없다. 폭력이 사라진 자리에 진정한 교육의 본질을 채워 넣으려면, 차가운 배제의 논리를 멈춰 세울 교실 내에서 교사의 우월한 권위가 먼저 복원되어야 한다. 교사에게 무제한의 절대적인 권한을 주자는 낭만적인 헛소리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교사의 손발을 묶어놓고 방관자로 만든 뒤 스승이 될 것을 요구하는 지금의 시스템은 실패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폭력을 통제하는 시스템적 안전장치는 유지하되, 참스승들이 아이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대면할 수 있는 '교실 내에서 최소한의 우월적 재량권'을 돌려주는 그 지점을 치열하게 찾아내야 한다. 그때 비로소, 교육은 사법의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내려와 다시 '인간을 품어내는 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