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터폴은 적폐, 애자일은 유토피아?

애자일이라는 낭만, 워터폴의 숨겨진 매력

by 피디아

나는 평소 비디오 게임을 즐겨한다. 내가 특히 좋아하는 게임은 화려한 그래픽의 AAA게임이다. 그런 게임들은 으레 개발 과정에서 수백 수천억 원의 예산이 투자되고, 그 개발 과정도 화두에 오르게 된다. 결국 자연스럽게 개발자들의 인터뷰나 분석 기사 등을 챙겨보게 되는데, 그곳에서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낯선 용어들이 있다. 바로 '애자일(Agile)'이다. 이게 뭐지? 내가 아는 애자일 비슷한 건 패스 오브 엑자일(사실 이것도 게임 이름이다.)밖에 없는데? 이를 이해하려면, '애자일'과 '워터폴(Waterfall)'이라는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패스 오브 엑자일은 아는데, '애자일'은 또 뭔데?

이 단어들은 소프트웨어를 어떤 순서와 방식으로 개발할 것인지 결정하는 IT 업계의 개발 방법론에서 출발한 개념이다. 전통적인 소프트웨어의 개발은 처음부터 끝까지 계획을 수립한 뒤 개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를 '워터폴'이라고 한다. 건물을 짓듯 완벽한 설계도를 먼저 그리고 순차적으로 차곡차곡 채워나가는, 일종의 탑다운 방식이라고 이해하면 되겠다. 반면, 1990년대에 들어서 이에 반하는 개발 방법론들이 등장했다. 주로 변화에 대한 유연성과 역동성을 강조하며, 실제 작동하는 기능 중심으로 적응해 나가는(Adaptive) 방법론들이었다. 이러한 방법론을 집대성하여, 2001년, 워터폴에 대응하는 '끊임없는 피드백을 통해 즉각적으로 기민하게 궤도를 수정해 나가는 개발 방법론'에 대한 선언이 등장한다. 이것이 바로 '애자일 선언'이다. 일단 작게 만들어보고 유저의 피드백을 받으며 끊임없이 수정해 나가는, 유연하면서도 동시에 바텀-업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점차 이 두 단어는 IT 업계 용어를 넘어서게 된다. 프로그램 개발 현장에서 시작된 개념이, 특정 부서의 프로젝트 방법론을 넘어, 일반 기업의 일상적인 조직 운영과 행정, 나아가서 리더십을 설명하는 거대한 경영 철학이자 트렌드로 자리 잡은 것이다.


그런데 대중매체와 자기계발서가 묘사하는 애자일과 워터폴의 이미지는 꽤나 선명하게 대비되며, 동시에 단편적이다. 워터폴은 상명하복, 경직된 위계질서, 낡고 답답한 '구시대적 유물'로, 애자일은 실리콘밸리의 수평적 문화, 구성원의 자유와 평등, 스트레스 없는 쾌적하고 '트렌디한 파라다이스'로 묘사된다. 때로는 조직의 혁신을 원한다면 워터폴을 버리고 애자일로 갈아타야 한다는 맹신마저 느껴진다. 확실히 서비스의 내용이 수시로 바뀌는 스타트업, 시장의 속도와 이용자의 반응이 매우 민감한 현대사회, 이용자조차도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모르며, 오히려 기업이 먼저 세상에 없던 수요를 창출해 내야 하는 최근의 산업 환경에서, 애자일은 '미덕'이고, 워터폴은 '구시대의 걸림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애자일은 정말 모두가 꿈꾸는 자유로운 유토피아일까? 이 낭만적인 오해를 풀기 위해, 우리는 대기업이나 스타트업보다 훨씬 우리에게 친숙하면서도 기이한 특성을 가진 어떤 조직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바로 '학교'다.



워터폴은 완벽했다, 교실이 혼돈이었을 뿐

학교는 무척이나 모순적인 집단이다. 학교는 모든 업무가 교육청의 공문과 지침, 학교 내의 내부결재 문서에 따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톱니바퀴처럼 굴러가야 하는 극강의 보수적 행정 조직이다. 하지만 동시에, 교장부터 갓 발령받은 신규 교사까지 모두가 독립된 교실과 수업을 책임지고 운영하며 존중받는 고도로 평등한 전문가 집단이기도 하다. 이 기이한 구조는 학교 현장에서 워터폴과 애자일의 본질이 가장 드라마틱하게 충돌하게끔 한다. 그것이 긍정적인 충돌일 때도 있지만, 보통은 교무실 선생님들에게 어마어마한 혼란을 가져다줄 때가 많다.


학기 초, '동아리 편성' 기간의 교무실을 상상해 보자.

본부 교무실에서 전체 학사 일정을 기획하는 담당 교사는 철저한 '구획화의 화신'이 되어야 한다. 그는 1주 차에 수요 조사, 2주 차에 동아리 개설, 3주 차에 수강 신청 완료라는 완벽하게 구획화된 타임라인을 짠다. 이것이 본부가 그리는 이상적인 시스템이다. 그 시스템에서는 오차란 없다. 모든 학생들은 일정에 맞춰서 동아리 수요 조사에 응하며, 모든 선생님 역시 주어진 일정을 정확하게 준수해서 동아리를 개설한다. 학생들은 자신이 신청한 동아리를 모두 정확히 기억하며, 담임선생님들께 오차 없이 제출한다. 계획은 완벽하다.


그러나, 교실은 혼돈이다. 최전선에 있는 담임교사는 매일매일이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애자일적 환경'에 놓여 있다. 본부의 계획표는 완벽했지만, 현실의 학생들은 마감 기한 내에 신청 버튼조차 제대로 누르지 못한다. 교무실 옆 자리의 선생님은 학교폭력 피해학생을 면담하느라 동아리 개설 촉구 메시지를 읽지 못했다. 어떤 학생은 친구를 따라 엉뚱한 동아리에 우르르 몰려갔다가 다음 날 바꿔달라며 민원을 넣기도 한다. 참고로 이 친구는 자신이 어떤 동아리에 가입했는지 모른다. 어떤 친구는 동아리 가입 신청을 아예 하지 않았다. 이유를 물어보자, 하고 싶은게 없다고 한다. 이 학생을 설득하고 배정하기 위해 동아리 지도교사의 협조를 구하느라 반나절이 지나갔다. 그리고 다음날, 본부 교사가 답답해하며 묻는다. "왜 계획대로, 기한 내에 안 됩니까?" 담임교사는 대답한다. "현장 상황이 이 계획표대로 굴러갈 리가 없잖아요!"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문제는 본부 교무실이 현장을 모르고 꽉 막힌 채 업무 추진을 해서일까? 아니면 현장이나 조직 구성원이 주어진 구획화와 모듈화에 따르지 못해서일까? 조직 운영의 관점에서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꽤나 복잡하면서도 혼란스러운 진실이 드러난다.


워터폴 방식으로 업무를 추진하는 본부 교무실 교사에게 필요한 역량은 생각보다 어마어마하다. 먼저, 그 교사는 업무가 어떻게 구획화되어야 하는지 인식하고 쪼개서 하달해야 한다. 업무가 복잡하고 추상적일수록, 개별 구성원이 일관되거나 일정 수준의 품질이 담보된 결과물을 내놓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자칫하면 1반 담임선생님은 보고서로 적벽가를 쓰는데, 10반 담임선생님은 포스트잇 쪽지로 결과물을 제출할 수도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현재 학교의 업무 부하 정도를 고려해야 한다. 업무가 많아지면, 선생님들은 해당 업무에 대한 퀄리티를 담보할 수가 없어진다. 또한, 업무 추진의 다양한 결과를 예상하여야 한다. 동아리 신청을 못한 학생, 부서를 옮기려는 학생, 그 외의 산발적인 민원... 결국 학교라는 충동적인 조직에서 워터폴 방식으로 '끝까지' 업무가 완벽하게 처리될 것이라는 기대는 접어두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결국은 일선 담임교사들의 유연성과 판단력의 개입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순간이 온다.


그렇다면 워터폴은 단지 현장의 유연성에 기대야만 하는 경직되고 낡은 방식일까? 그렇다면 반대로 트렌디하다고 여겨지는 '진짜 애자일'을 이 학교에 도입한다면 어떻게 될까?



애자일이라는 신경쇠약: 나는 우리 반 동아리 챙기기도 버겁다.

이제부터 담임교사에게 주어지는 것은 달콤한 자율권이 아니라 '무거운 주인의식'이 찾아온다. 그리고 교무실에는 또 다른 혼돈이 도래한다. 애자일 체제에서 담임교사는 단순히 내 반 아이들을 챙기는 선에서 멈출 수 없다. "우리 반 아이들의 동아리 신청이 변경되면, 타 동아리 담당 선생님의 업무 과부하와 학교 전체의 외부 강사 계약, 예산 집행 일정에 어떤 타격을 주는가?"를 스스로 인지해야 한다. 내가 양보해야 할 것과 밀어붙여야 할 것을 판단하기 위해 다른 부서 교사들과 끊임없이, 그것도 아주 치열하게 소통해야 한다. 누군가 지시를 내려주지 않기 때문에, 모든 구성원이 학교 전체의 거시적 비전과 목적의식을 꿰뚫고 있어야만 배가 산으로 가지 않는다. 이를 공유하기 위해서, 학생들의 8시간 수업에 더해서 교직원 회의가 매일 2시간씩 추가된다.


교사만 회의에 참여하면 될까? 학생들에게도 어마어마한 주인의식이 필요하다. 모든 학생들은 제출 기한을 명확하게 준수하고, 동아리 신청이 가져올 파급력과 선택의 무게를 정확하게 인식해야 한다. 마치 군대나 톱니바퀴처럼. 상명하복의 워터폴을 벗어났는데, 요구되는 일사불란함은 오히려 두세 배로 뛴다. 이를 위해서는 옆반의 장기결석 학생이 학교의 비전을 깊이 이해하고 진심으로 헌신적으로 생활해야 한다. 교사들은 안다. 이건 유토피아다. 결국 담임교사는 지금 우리 반 학생 동아리 신청 제대로 했는지 신경 쓰는 것만으로도 신경쇠약이 걸린다. 결국 '아무것'도 진행되지 않는다. 일관된 방향성도, 주도성도 없어진다. 학교의 비전? 배부른 소리다. 그냥 각자 자기 반 학생 챙기는 선에서 만족하고 숨을 돌린다.


결국 현장의 유연성만 강조하는 어설픈 애자일은 이렇게 속절없이 무너진다. 그렇다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많은 이들이 워터폴을 낡고 고리타분한 방식이라고 비난했지만, 사실 시스템 운영의 관점에서 보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우리는 워터폴의 자유로움과 독립성을, 애자일의 무거운 연결성과 책임감의 편린을 슬쩍 엿본 것이다.



워터폴의 숨겨진 매력: '고립'이라는 축복

성공적인 워터폴은 철저히 고립된 채 내 업무에만 집중할 수 있는 '안락함'을 제공한다. 대신, 엄격한 조건이 있다. 위에서 보았듯, 프로젝트를 지시하는 본부 기획자에게 미래의 리스크를 완벽하게 예측하고 업무를 빈틈없이 쪼개는 '압도적인 모듈화 역량'이 있어야 한다. 게다가 그 모듈화는, 앞서 언급한 구성원의 일부가 '계획에서 벗어날' 시나리오마저 상정하는 유연성마저 포괄해야 한다. 실무자가 그렇게 완벽한 설계도를 그려주기만 한다면, 담임교사는 전체 학교 예산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행사를 어떻게 추진할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저 지침에 따라 우리 반 아이들 서류만 기한 내에 모아서 넘기고, 예산만 제대로 소진하면 그만이다. 부속으로서의 미시적 목표만 잘 수행하면 조직은 굴러간다. 결국 워터폴은 단순한 상명하복이 아니라, '프로젝트 지시자'에게 압도적인 예측력과 모듈화 역량을 요구하기 때문에 어려운 고도의 시스템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교사에게 그런 완벽한 워터폴 실무자로서의 역량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그 교사의 '본질적' 업무는 동아리 편성이 아니라 '교육자'로서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본질적 업무가 아닌 부차적 업무로 이런 압도적 역량이 실현 가능하기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과도한 요구이다. 학교뿐만 아니라 많은 행정 조직과 기업들도 예외는 아니다.



혁신의 가격: 압도적 시야와 비전. 아니면 스톡옵션이든가...

반대로 애자일은 어떠한가? 애자일이 구성원에게 부여하고자 하는 핵심은 '자유, 평등, 쾌적함'이 아니다. 애자일의 진짜 목적은 '창의성과 혁신성'의 발현이다. 사람들은 흔히 조직을 수평적으로 만들고 직원들에게 자유롭고 쾌적한 환경을 주면 알아서 창의성이 피어날 것이라 착각한다. 하지만 창의와 혁신은 단순히 자유를 쥐여준다고 해서 마법처럼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통제가 사라진 자유로운 공간에서 혁신을 만들어내기 위해 진짜로 필요한 것은, 내 업무와 남의 업무를 연결 지을 수 있는 '압도적인 거시적 시야', 조직의 목표를 내 것으로 내재화하는 '명료하고도 촘촘한 비전', 그리고 조직의 결과에 나도 함께 책임지는 '무거운 주인의식'이다.


생각해보자. 학교의 비전과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나의 일만 완벽하게 잘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정상적인 조직이라면, 내가 맡은 일은 학교 업무의 80분의 1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 나는 이 학교의 비전을 달성하기 위해, 내 업무를 파악하는 만큼, 다른 사람의 업무도 이해해야 한다. 내가 올린 기안문이 다른 선생님의 어떤 사업에 초를 치지는 않는지 매 순간 파악하고 움직여야 한다. 애자일은 각자 느슨하게 일하는 수평적 낙원이 아니다. 오히려 구성원 모두를 빈틈없이 촘촘하게 연결해 놓은 빡센 연대 책임의 그물망에 가깝다. 내가 학급 행사 하나 추진했다가, 그것이 다른 학급의 분위기를 흐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애자일은 매우 '빡센 거시적 시야와 주인의식'을 요구한다. 거시적 시야나 조직의 비전 같은 큰 그림이 버겁고, 그냥 내 눈앞의 내 일만 편하게 하고 퇴근하고 싶은 나 같은 단순한 사람에게 애자일은 끔찍한 부담이다. 오히려 그런 이들에게는 위에서 내려준 지시만 정확히 수행하면 되는 워터폴이 훨씬 쾌적한 시스템일 수 있다.


더욱 뼈아픈 현실이 있다. 애자일이 이 모든 피곤한 소통과 연대 책임을 구성원에게 요구하려면, 그 대가로 '가슴을 뛰게 할 만큼 매력적이고 명확한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그것이 '세상의 패러다임을 바꾼다'는 IT 기업의 멋들어진 슬로건이든, 아니면 올해 연말 마음을 따스하게 채워줄 풍성한 스톡옵션이든, 그런 비전과 목표 하에서는 구성원들이 기꺼이 밤을 새우며 토론할 수 있다.


하지만 학교의 비전은 어떤가? 현관 액자에 걸린 '바른 인성과 창의성을 갖춘 인재 육성'이라는 추상적이고 뻔한 문구를 위해, 담임교사가 기꺼이 다른 교무실의 행정 업무까지 참견하며 애자일의 왕관을 쓰고싶을까? 학생들이 기한 내에 동아리를 신청했다고 장학금이 주어지지는 않는다. 게다가 공공 조직의 진짜 비전은 '혁신'이 아니라 '무사고와 민원 예방'에 가깝다. 가슴 뛰는 비전이 부재한 곳에서 애자일을 강요하는 것은, 목적지도 알려주지 않고 선원들에게 각자 열심히 노를 젓고 키를 잡고 돛을 다뤄서, 알아서 목적지에 도착하라고 윽박지르는 것과 같다.


결국 워터폴이 '프로젝트 지시자'에게 압도적인 예측력과 모듈화 역량을 요구하기 때문에 어렵다면, 애자일은 모든 구성원에게 어마어마한 거시적 시야와 주인의식을 요구하기 때문에 어렵다고 볼 수 있다. 방금 예시로 든 학교는 극도로 보수적인 행정기관이지만, 동시에 학급과 교사의 자율성이 극도로 강조되는 기관이다. 극단적인 워터폴도, 극단적인 애자일도 여기서는 결국 한계에 도달한다. 그리고 이 혼란의 프랙탈 구조는 교무실과 교실의 관계를 넘어 교육청과 학교, 교육부와 학교의 관계로까지 확장된다. 애자일이 언제나 옳고 트렌디하다는 믿음은 단순화에 기인한 일종의 낭만적 오해에 불과하다. 애자일과 워터폴 사이에 절대적인 우열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착각하는 본부 조직과 혼란스러운 현장이 있을 뿐.



정답은 없다, 조직의 '핏(Fit)'이 있을 뿐

그렇다면 일반적인 조직은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가? 어떤 조직의 운영 방식을 결정하는 가장 큰 근거가 단지 유행이어서는 안 된다. 그 조직이 가진 고유한 특성이 무엇이며,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가 무엇인지, 목표로 하는 비전이 얼마나 명확하고 구성원에게 명확한 전달이 가능한지, 그리고 무엇보다 조직을 이루는 '구성원들의 성숙도와 역량'을 냉정하게 저울질해야 한다. 조직의 리더나 단위 업무를 밀어붙이는 핵심 실무자의 역량이 압도적이라면 워터폴이 가장 견고하고 안정적인 무기가 될 것이고, 구성원 전원이 거시적인 비전을 공유하고 치열하게 조율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애자일이야말로 그 어떤 방식보다 강력하고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다주는 날개가 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쥐어야 할 것이 무기인지 날개인지 파악하기 위한 '조직 특성에 대한 냉정한 분석'이야말로 이 완벽해 보이는 조직 운영 계획 수립을 위한 최우선 전제조건이다.


우리가 정말로 고민해야 할 것은 '어떤 그럴싸한 이름표를 달 것인가'가 아니라, '우리 조직은 지금 어떤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가'를 묻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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