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분, 불가존이라는 미로
한 달 전, 나는 성리학과 블랙홀이라는 기묘한 조합 속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을 남겼다.
"이와 기를 단순히 형이상과 형이하로 나누는 이분법은, 실제 성리학의 논의 구조와는 조금 결이 다르며, 이에 대한 한 가지 실마리를 발견했습니다."라고.
지금부터는 그 실마리가 던진 질문과, 내가 따라간 탐구의 흔적들을 펼쳐 보이려 한다. 이것은 철학계에 보내는 성리학에 대한 새로고침 요청이다. 핵심내용은 이것이다
[이기일원론]은 허구이다.
지금부터 이에 대해 파헤치고자 한다.
1. 조선의 성리학, 무엇이었나
우선, 먼저 전제해두어야 할 점이 있다. 조선의 건국이념은 '성리학'이다. '성리학'은 중국 남송의 '주희'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요점은 '모든 인간은 내면의 심성을 갈고닦으면 성인이 될 수 있다'는 이념이다. 실제로 조선 초기, 정창손이 훈민정음 반포를 반대하며 '사람이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이 사람의 자질(資質) 여하(如何)에 있다'고 발언하였다가 분노한 세종에 의해 파직되기도 하였다. 즉, 조선에서 성리학은 국시에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
두 번째, 근본적으로 성리학은 '이'를 부정할 수 없다. 주희가 세운 성리학의 대전제는 '이기불상리(이와 기는 분리되지 않으며)'와 '이기불상잡'(이와 기는 섞이지 않는다)'이다. 두 전제 모두 '이'가 존재한다. 분리되지 않으면서, 동시에 섞이지도 않는다. 이 모호한 표현이 조선 중기 사상사를 직격한 사단칠정논변의 씨앗이다.
세 번째, 그렇다면 성리학이 건국이념인 조선이라는 국가에서 성리학을 단순히 '기' 중심으로 해석할 수 있는가? 하다못해 '주기론'을 주장했다 하더라도, 주장한 사람이 실제 정치권력의 중심에서 비껴난 사람이며, 정치적으로 배제되었음에도 살아남고, 심지어 한 학파의 대표격이 되고, 그 시조가 되어 숭상받을 수 있었을까? 이는 성리학이 조선의 건국이념이었다는 점에서 쉽게 납득되기 어렵다. 이것이 바로 의문의 시작이다.
2. 사단칠정논변의 깔끔한, 너무나도 깔끔한 구조
사단칠정논변은 흔히 대유학자 이황과 겁 없는 신예 기대승의 토론, 그리고 이를 집대성해서 이기일원론을 창립한 이이로 설명된다. 자세한 내용은 매우 난해하지만, 전통적으로 이 논쟁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이황: 사단은 이(理)에서 발하며 선하다. 칠정은 기(氣)에서 발하며 혼합적이다.
기대승: 사단과 칠정은 구분 불가. 감정은 본래 이기 혼합 상태로 존재한다.
이이: 둘의 입장을 조율, 이와 기는 하나로 발한다는 '이기일원론'을 주장.
그리고 이이는 곧 이기일원론의 철학자, 기 중시자, 중간자적 통합자라는 해석으로 고정되어 왔다.
하지만 이 도식은 사칠논변의 무게와 파급력에 비하면 너무나도 간단하고, 지나칠 정도로 잘 정리되어 있다.
의심해야 할 만큼 말이다.
3. 불확정성 원리와 철학의 관측 문제
이와 기의 구조에 대해, 이전 글에서는 블랙홀-정보 역설을 통해 유사한 문제의식을 제시한 바 있다. 이번 글에서는 다른 과학 이론과의 병치를 시도한다. 그러면 이번에는 어떤 최신과학에서 그 실마리를 얻었을까? 바로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이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코펜하겐 해석)는 이론적으로는 더 복잡하지만, 핵심만 단순화하면 다음과 같다.
어떤 정보가 응축되어 있는 '파동함수'라는 존재가 있는데, 이것은 관측과 동시에 '입자화'된다.
즉, 관측 전에는 확률로만 존재하며, 관측되는 순간 하나의 상태로 확정된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정도의 설명이 적절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여기에서 한 가지 영감을 얻었다.
'이이는 이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다.'
'이이는 이의 불가분을 강조하였으며, 만약 이의 존재를 부정하려 했다면 더욱 명확하게 표현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이는 순수한 이는 존재하지만 현실에서 드러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氣)와 결합되어야 한다. 즉, 관측되어야한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이것이 나의 주장이며, 기존 성리학에 대한 재해석이다.
4. 이이의 저작에 없는 이름: '이기일원론'의 실체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이이가 실제로 자신의 이론에 대해서 어떻게 언급했는지 찾아봐야 할 것이다. 나는 이이의 저작에서 본인의 이론에 대해 어떻게 언급하였는지를 찾아보았다. 이이는 실제로《성학집요》와《율곡전서》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이기지묘(理氣之妙): 이와 기는 오묘하게 뒤섞여있다.
이통기국(理通氣局): 이는 통하고 기는 국한된다.
비리즉기무소근저(非理則氣無所根柢), 비기즉리무소의착(非氣則理無所依着): 이가 아니면 기가 근거할 바가 없고, 기가 아니면 이가 붙어 있을 곳이 없다.
그리고 이이는 '이기일원'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이이가 불가분성을 강조할수록 오히려 확실해진다. 이이가 "이와 기는 불가분하다"를 반복해서 말했다는 것은, 그만큼 이는 존재하지만 단독 작용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강조한 것이다. 만약 '이는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가 핵심이었으면? '불가분'이 아니라 '불가존'으로 명확히 표현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이는 자신의 저작에서, '근거할 바가 없다', '붙어있을 곳이 없다'라는 표현만 반복했을 뿐이지, 단 한 번도 '순수한 이의 존재를 부정한' 표현을 사용한 적이 없다.
대신 반복적으로
"이는 언제나 기와 함께 있다."
"이는 기를 떠나 작용하지 않는다."
"이와 기는 함께 발현한다."
"기는 이에 근거하고, 이는 기에 붙어있다"
= 존재는 당연하고, 문제는 드러남과 작용이다.
라고 표현하였다. 다시 말해, 이이는 형이상자로서의 순수한 이의 존재 가능성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경험 세계에서는 이가 기를 통해서만 드러난다고 보았다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며, 따라서 이황과 이이의 차이는 '이의 존재 여부' 자체가 아니라, 이의 우위성을 존재론적으로 보느냐(이황) vs 인식·발현의 차원에서 보느냐(이이)라는 철학적 층위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5. 사칠논변, 존재의 층위와 인식의 틈
우리가 흔히 기대승에 대해 알고 있는 내용은 이것이다. '이상론자인 이황에게 과감하게 토론을 신청한 현실적 개혁주의자, 그리고 그로 인해 이이가 이기일원론을 정립하게 된 주기론의 맹아'
만약, 이이가 이기일원론을 주장하지 않았다면, 기대승은 어떻게 말했던 것일까? 기대승은 인간의 감정이 처음부터 이와 기가 섞인 복합적 구조라고 말하였고, 감정의 실제 작용을 통해 이와 기의 구분 가능성을 의심했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것은 '감정'이 복합적 구조라고 말한 것이다. 따라서 기대승 역시 현실적으로 이와 기가 구별하기 불가능하다고 말한 것이지, 이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다. 그의 입장은 구조적/인식론적 회의주의의 입장과도 맞닿아 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이야기가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이기이원론의 이황과 이기일원론의 이이, 기대승. 이 구조는 너무나 편의적으로 나뉘어진 해석일 뿐이다. 실제 그들의 쟁점은 '순수한 이'의 존재 여부가 아니다. 지금부터는 이 토론은 존재론적 층위에서 재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존재론과 인식론, 불가지론 가운데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는지에 대한 문제이다.
이황: "이는 선하고 드러날 수 있다" → 존재론적 이상주의
기대승: "이는 기준이지만 현실에서 순수하게 작용하지는 않는다" → 구조적 회의주의
이이: "이는 존재하고, 드러나지만 기 없이는 불가능" → 인식론적 현실주의
이 해석을 따른다면, 진정한 주기론자는 오직 '서경덕'을 따른 학파 하나였으며, 서경덕이 '주기론자'의 대표로 맹렬하게 비판받은 것 역시 설명이 가능해진다. 게다가, 다소 과격할지언정, 서경덕 역시 "태허(太虛)"를 통해 "이"를 설명했다는 점에서, 순후한 이의 존재를 부정한 조선의 유학자는 단 한명도 없었다는 해석 역시 가능해진다.
따라서 퇴계와 율곡의 논쟁은 '이원론이냐, 일원론이냐'의 싸움이 아니었다. 둘 다 '이'와 '기'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不相離)임을 인정하는 이원론(不相雜)의 틀 안에서, '이'와 '기' 중 누구의 역할을 더 결정적인 것으로 보았느냐는 관점의 차이일 뿐이다. 비유하자면, '기(氣)'가 실제로 차를 움직이는 '운전자'라면, '이(理)'는 길을 안내하는 '내비게이션'과 같다. 퇴계는 '내비게이션(이)의 올바른 경로 안내'가 도덕적으로 더 중요하고 근원적이라고 본 반면, 율곡은 아무리 경로 안내가 완벽해도 '운전자(기)가 실제로 운전대를 잡고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고 본 것이다. 결국 두 사상가 모두 운전자와 내비게이션이 필요하다는 점은 인정했지만, 이 여정의 진정한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느냐를 다르게 본 셈이다. 이황은 이상적으로 내비게이션을 따라가면 된다고 믿었고, 이이는 현실적으로 운전자가 정신을 차려서 운전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물론, 이런 정리는 어디까지나 철학적 층위 간의 구성적 도식일 뿐, 당대 인물들의 실천적 태도까지 온전히 설명하진 못한다. 다만 조선시대 모든 성리학자들은, 적어도 사칠논변과 이이까지는 모두 '주리론자' 혹은 기의 중요성을 무시하지 말자는 '주기적 이원론자'에 가까운 입장이었며, 그 누구도 '기'가 '이'보다 우위에 있다고 하거나, 선행한다고 하거나, '이기일원론'이라는 용어를 직접 사용한 적이 없다. 이는 후대의 편의적 분류 체계 속에서 구성된 해석일 뿐, 이이의 철학 전체를 대표하는 명칭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들을 정말 '주기론자', ‘이기일원론자’라고 묶어도 되는 것일까?
6. 주리/주기의 탄생과 왜곡
그렇다면 여기서부터 되짚어나가야 할 것이 있다. 이이도, 기대승도, 그 누구도 '주리'와 '주기'의 이분법을 말하지 않았고, '이기일원'이라는 개념도 만들어내지 않았다면, 그렇다면, 이 낙인처럼 따라붙은 개념은 과연 어디서 비롯되었는가? 당대의 저작에서는 그 개념 자체가 등장하지 않는다. 이 용어는 후대의 학술적 구성물로, 역사적 맥락의 재정리를 필요로 한다.
먼저 '주리'와 '주기' 라는 표현은 의외로 이황이 먼저 사용한 단어이다. 반명 기대승, 이이는 스스로를 '주기론자'라고 표현하지 않았다. 주리와 주기는 이황이 상대를 논박하기 위해 세운 일종 프레임이지, 그들은 스스로를 주기론자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이는 자신의 주장을 기발이승일도(氣發理乘一途)라고 정리하였지만, 어디까지나 주희의 이기불상리(理氣不相離)를 철저히 계승한 것이며, 기가 이에 선행해서 발한다고 하거나, 이가 기 없이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만약 그렇다면 굳이 이기지묘(이와 기가 얽혀있다), 기발이승일도(기가 발하고 이가 올라타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도이다)라고 표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주리'와 '주기'는 상대적인 구도였을 뿐이지, 주리론, 주기론, 주리파, 주기파 등의 이분법적 구도 역시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애국계몽기 당시의 학자 장지연이『조선유교연원』(1910)에서 조선유학사의 흐름을 '주리파'와 '주기파' 구도로 단순화하여 기술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광복 이후 현상윤이 저술한《조선유학사》(1949)에서 성리학의 계보를 주리파, 주기파, 절충파로 구분 지으며 더욱더 공고해졌다. 결론적으로, 주리와 주기라는 개념은, 성리학 전통 내부 논쟁에서 비롯되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근대의 학술담론에서 공식화·유통된 개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기이원론과 이기일원론은 어떠할까?
이원론은 이와 기가 별개의 본체로 존재한다는 것, 일원론은 이와 기가 분리되지 않는 하나의 틀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후대의 편의적인 해석일 뿐이지, 당대 성리학자들이 스스로 '이기일원론을 주장한다'거나 '이기이원론을 고수한다'고 언급한 적은 없다. 애초에 그들에게 이와 기는 이원이니 일원이니 따질 대상이 아니었다. 오히려 당대의 철학적 쟁점은 주희가 말한 '불상리'와 '불상잡'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해, 그 오묘한 이와 기의 관계를 해석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러나 이황의 후계는 이황이 주장한 "이존기비"(理尊氣卑), 이는 귀하고 기는 낮다는 가치론을 전제로 계승하여 후대의 영남학파에 이르러서는 일부 제자들은 거의 이만을 유일한 본체로 보는 경향(이일원론(理一元論))까지 나아가게 된다.
그리고 이이의 후계는 비록 이의 도덕적 가치는 인정했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이 단독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보았기에, 그의 이기론은 "이가 기 속에 있다"는 일원론적 해석으로 변질되었다. 정작 이이는 "이와 기는 하나의 원리"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송시열에 이르러서는 그의 철학을 사단칠정이 모두 이이며 이와 기가 하나라는 이기일원적 단일 구도로 과도하게 규정하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7. 결론: 성리학, '이'의 귀환
결론적으로, '이기일원론'이라는 개념은 이이의 사유를 단순화한 후대적 산물이며,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은 '이'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이는 존재하되 기 없이는 드러나지 않는다'는 입장에서 서로 다른 강조점을 가졌을 뿐이다. 이기불상리·불상잡이라는 주희의 명제를 둘러싼 해석의 다양성은 단순한 철학적 입장 차이가 아니라 존재론과 인식론, 실천론의 균형에 대한 사유의 결과였다. 이기일원론은 성리학의 원문에서 나온 것이 아님에도, 사후에 덧씌워진 주석으로서 마치 낙인처럼 따라붙었다. 그것은 본문의 정신이 아니라, 해석자의 정리욕에서 비롯된 개념일지도 모른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정리욕이 결과적으로 성리학의 절반을 '이기일원론'이라는 하나의 이름 안에 가두어버린 것이다.
우리는 조선 성리학을 더 이상 '주리 vs 주기'라는 편의적 이분법으로 읽어선 안 된다. '이기일원론'이라는 레이블은 단정이 아니라, 오히려 질문이어야 한다. 철학이 삶과 현실을 함께 사유했던 시대로부터, 우리는 보다 정교한 해석과 더 깊은 독해의 태도를 배워야 한다. 이제 성리학은 교과서 속 사상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사유 틀을 점검할 수 있는 낯선 거울로 다가와야 한다.
<이 글에서는 개념 설명을 간소화하지만, 각 용어에 대한 더 깊은 이해는 별도의 연구를 전제로 합니다. 독자들의 양해를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