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다고 자기 손을 잘라버린 사람들
인터넷에서 시장경제를 까는 글을 봤다.
내용은 익숙하다.
자본주의는 탐욕의 시스템이고, 시장은 불공정의 근원이며, '보이지 않는 손'은 이제 구시대 유물이란다. 댓글들은 마치 단체로 경제학 전공 수업을 수강한 것처럼 "고전경제학은 폐기됐다", "애덤 스미스는 틀렸다"는 식의 단언을 쏟아냈다. 아마도 애덤 스미스는 근 10년간은 귀가 많이도 간지러웠을 것이다. 최근 인터넷 분위기는 애덤 스미스를 까는 것이 거의 스포츠나 다름없으니까.
하지만 나는 생각한다. 시장경제는 생각보다 꽤 잘 작동한다.
단, 그 시장이 완전경쟁 시장이라면.
애덤 스미스가 저술한 국부론의 개념에 근거한 학파를 고전학파라고 부른다.
고전학파의 기본 전제는 명확하다. 시장 참여자가 모두 완전한 정보를 가지고 있으며, 누구든 자유롭게 시장에 진입하거나 퇴장할 수 있고, 외부효과나 독과점이 존재하지 않는 환경.
이 조건에서 시장은 효율적으로 자원을 배분한다.
문제는 이 조건이 현실에선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현실의 시장은 다르다.
먼저, 정보의 제공이 불균형하다. 우리는 고층 아파트의 콘크리트에 시멘트를 섞었는지 물을 섞었는지 알 방도가 없다. 이론상 소비자는 생산자의 상품에 대해 완전한 정보를 알고 있어야 하지만 정보는 완전하게 제공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반대로 주어지는 정보가 너무 많아서 어떤 것이 유의미한 정보인지 파악하는 것도 쉽지 않다. 나 같은 다이어터는 제로칼로리 음료수를 물처럼 마시지만, 정작 아세설팜칼륨이 들어갔는지, 시안화칼륨이 들어갔는지 성분표를 읽어도 뭐가 다른 건지 모른다. 하나는 인공감미료지만, 다른 하나는 인생의 로그아웃 버튼이다.
산업이 점점 고도화될수록 이러한 혼란은 점차 일상이 되어버린다.
두 번째. 시장에 대한 진입장벽이 존재한다. 현실 경제에서 시장에 진입, 퇴거하기 위해서는 자본이 필요하다. 또한 어떤 산업은 태생적으로 독점적일 수밖에 없다. 통신, 철도, 전력 같은 기간산업은 특히 그렇다. 예컨대, 데이터가 터지지 않아서 홧김에 통신사를 차리려다가도, 기지국 세 개 정도 깔고 나니 대출이 안 나와서 파산할 수도 있다. 이런 산업들은 규모의 경제가 지나치게 강해서, 자연스레 소수의 기업이 전체 시장을 점유하게 된다. 여기선 자유경쟁이 작동할 수 없다. 고정비용이 크고, 소비자가 사업자를 선택할 수 있는 폭도 제한적이다.
이런 구조에서 규제는 경쟁을 대신해 효율성을 유지시키는 역할을 한다. 시장을 망가뜨리는 간섭이 아니라, 시장을 '존재 가능하게' 만드는 수단으로 기능한다.
세 번째. 시장이 실패하는 구조적 메커니즘은 시간에 따라 심화된다. 경기변동이 일어나면 작은 기업은 무너지고, 생존한 기업은 더 큰 지배력을 갖는다. 경기 침체가 오면, 동네 분식집은 문을 닫고, 대기업 프랜차이즈는 점유율을 늘린다. 그렇게 규모는 침체를 이겨내지만, 시장의 다양성은 사라진다. 자본주의는 스스로의 효율을 무기로 경쟁을 제거하며 독점화로 나아가는 자기모순의 경향성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규제는 단순한 개입이 아니라 필연적인 조율이다.
이제 결론을 말하자면, 고전 경제학은 수선이 필요한 이론이다.
고전 경제학을 완전한 현실 설명서라고 믿는 건 너무나 순진한 일이며,
실제로도 신고전학파, 새고전학파 등으로 수정해서 발전하고 있다.
그러나, 덮어놓고 '시장=악', '자본=위험'이라고 외치는 것은 비이성적이다.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개념은 시장 경제를 구성하는 본질 그 자체이며,
이는 케인즈학파 역시 부정하지 못하는 뿌리에 가깝다.
진짜 중요한 건 그 완전해 보이던 구조와 개념이 왜 현실에선 무너지는지,
그리고 그걸 보완하려면 어떤 제도와 규제가 필요한지를 따지는 일이다.
애덤 스미스를 비판하고 싶다면, 애덤 스미스를 대강이라도 알고 비판해야 한다.
위대한 사상은 단지 오래됐다는 이유로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이 여전히 회자되고 있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