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 동창들과 여름 속으로

비와 번개 속의 브루나이 여행

by 작은영웅

고1 뺑뺑이라는 운명 속에 만난 학교, 스타킹까지 초록인 교복을 입고 만난 친구들. 키가 작고 비슷해 맨 앞줄에 앉았던 우리들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30년 지기 친구이다. 같이 다니면 고만고만해서 서로 비슷한 눈높이인 다정한 친구들. 사는 곳도 다르고 형편도 다르지만 모두 두 아이의 엄마이고 순탄한 삶을 살아가는 것도 비슷하다. 그런 우리가 이번 겨울여행으로 택한 곳은 브루나이.

이름도 낯선 이곳에 간다고 했을 때 다들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함께하는 시간이 중요한 우리는 알지 못해서 더 기대되는 맘을 품고 5시간은 비행 끝에 브루나이에 도착했다.

그런데 웬걸 비가 내린다. 그것도 세차게, 천둥 번개까지 우르르르. 일기예보를 보니 가는 날까지 비예보다. 스콜성비라 오래 내리지는 않는다는 가이드의 말에도 약간은 우울하다. 시간과 돈을 들여 이곳까지 왔는데 계속 비가 내린다면 억울할 듯. 브루나이의 아름다운 석양은 과연 볼 수 있을까.

빗속을 뚫고 도착한 엠파이어 호텔에 짐을 풀고 으리으리한 호텔을 감상한 뒤 일단은 멋진 식사를 한다. 나시고랭과 치킨은 맛이 좋고 음식 플레이팅이 멋지다. 이슬람 국가라 모든 여성들은 머리를 가리고 있다.

날씨탓 하지 말고 이곳을 즐겨보리라 다짐하며 숙소에서 잠을 청하는데 춥다. 바깥 날씨는 습하고 더운데 실내는 냉기가 가득이다. 수면잠옷이 필요하다. 썰렁한 킹사이즈 침대 속에 웅크리고 누워 생각한다. 비싼 돈들이고 시간까지 투자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이러면 곤란하지. 무조건 행복하자.


다음날 아침, 일찍 깨어 창밖을 보니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다. 버기카를 타고 메인동에 가 비 내리는 회색빛 바다를 보며 조식을 먹는다. 만국 공통요리인 달걀프라이와 오믈렛,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딤섬, 고소한 커피를 곁들인 식사를 마치고 나니 기분이 좋아진다.


숙소에서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메인수영장으로 향한다. 오락가락하는 빗속에서 물놀이를 한다. 수영은 못하지만 넓고 아름다운 풍경 속에 걸어 다니기만 해도 즐겁다. 더울 거라 기대했던 날씨는 서늘하기까지 해서 물속이 오히려 따뜻하다.


오후에는 시내 관광을 나가 왕궁과 모스크 두 곳과 수상 가옥을 둘러봤다. 종교가 삶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지대한지 깨닫는 시간이었다. 쇼핑센터에서 어린이용 비옷을 사서 입고 이곳저곳을 다니다 보니 이 또한 재미있다. 음식을 치킨과 감자 요리가 맛있었는데 맥주를 마시지 못해서 아쉬웠다. 딱 맥주 안주였는데. 우연히 들른 카페에서 맛본 피칸파이와 핫초코는 정성스럽게 만들어 주어서인지 달지 않고 맛있다. 전반적으로 음식이 자극적이지 않아서 좋다.


셋째 날은 정글 탐험을 떠났다. 여전히 흐린 날이었지만 다행히 비는 내리지 않는다. 1시간 정도 버스를 달려 베이스캠프에 도착한 후 집라인을 탔다. 평소 액티비티를 즐겨하지 않아서인지 쉬운 코스라는데도 힘들었다.

긴 카약을 타고 강물을 거슬러 가며 정글투어를 했다. 울창한 원시림 속에 원숭이, 강물 속에 악어가 있다는데 노안인지라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왕복 한 시간이 넘는 시간을 꼼짝없이 배에 앉아 있으면 화상에 가깝게 피부가 손상된다는데 흐린 날씨로 인해 그런 걱정 없이 쾌적하게 투어 할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마지막 날, 드디어 화창한 파란 하늘을 만날 수 있었다. 신이 나서 밖으로 나가 산책을 했는데 몸이 땀으로 흥건해졌다. 유독 더위를 많이 타는 나에게 그동안의 날씨는 신의 한 수였던 것이다. 브루나이에 있는 내내 이렇게 화창했다면 예쁜 사진은 건질 수 있었겠지만 엄청 더위에 시달렸을 것이다.

여러모로 힐링 여행이었다. 처음으로 해본 호캉스 여행이었는데 여유롭게 보내는 시간들이 좋았다. 만나면 수다 삼매경에 빠지는 여고 친구들에게 딱 맞는 여행이다.


여행 내내 한 친구는 감기로 시달렸지만 친구들에 대한 배려로 내색하지 않다가 집에 가자마자 응급실에 갔다고 한다. 그 마음이 참 고마웠다. 더 나이 들기 전에 여행 자주 가고, 건강관리 잘하자고 다짐했다.

가장 기대했던 썬셋은 4일 동안 구경도 못했지만 럭셔리한 삶을 직접 체험하면서 내가 가진 것들의 소중함을 다시금 느껴본 좋은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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