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하지만 행복을 주는 쇼핑 여행

혼자서 즐기는 시간

by 작은영웅

내 생일이나 명절 때 결혼한 큰딸아이는 내게 금일봉을 준다. 현금을 봉투에 넣어서 두둑하게. 아마도 어릴 때부터 엄마가 할머니에게 드리는 것을 봐서 따라 하는 것이리라. 그런데 현금이 거의 필요 없는 시대가 되다 보니 이 돈이 서랍 안에 잠들어 있다. 집 근처 재래시장에서조차 현금을 반가워하지 않는 눈치다.


하지만 이 돈이 요긴하게 쓰이는 곳이 있다. 그곳은 바로 지하상가이다. 여기에선 아직도 현금이 더 우대받는다. 카드가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부가세를 내야 하고 카드결제를 하면 마뜩지 않아한다.

여러 지하상가 중에 특히 내가 애용하는 곳은 고속터미널 지하상가. 백화점에 가면 가격표부터 확인하고 옷을 골라야 하지만 고터 지하상가에서는 가격 확인 안 하고 맘에 드는 옷을 마음껏 고를 수 있다. 그래서 딸이 준 현금 다발을 들고 이곳에 오면 부자가 된 기분이다.


뭔가 우울하고 마음이 허전한 날에는 이곳으로 여행을 떠난다. 대중교통으로 머러 번 갈아타야 하는 수고로움이 있고 가는 길도 멀어서 고민을 많이 하지만 결국 길을 나선다. 그곳에 가면 기분이 좋아질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은 뭘까. 오늘은 어떤 옷을 사게 되려나. 이번에는 모자를 하나 사 와야겠다. 등등의 생각을 하면서 길을 나선다.

가는 길은 힘들지만 도착하면 바로 힘이 난다. 가게로 가득 찬 길을 걸으며 꼼꼼하게 물건들을 살펴본다. 매번 비슷한 것들을 고르지만 최근 트렌드도 살펴보고, 어떤 색깔이 얼굴에 맞는지 대보기도 하면서.


친절한 점원이 있는 곳은 마음이 불편해서 오래 머물지 않는다. 그냥 천천히 내 취향대로 물건을 구경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다 간택되는 옷은 매번 유사하다. 심지어는 전에 산 것과 똑같은 옷을 사 올 때도 있다. 어이가 없지만 워낙 저가의 물건이다 보니 웃어넘길 수 있다.

심사숙고해서 고르지만 사이즈가 안 맞을 때도 있는데 가벼운 마음으로 수선을 하면 되고 그래도 맘에 안 들면 일단 옷장 깊숙이 넣어 버린다.


무는 낭비냐고 말하는 이도 있겠지만 이 쇼핑 여행은 나에게 주는 선물이다. 10만원의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내가 버는 돈은 다 남들이 써버리는 것 같고, 월급날마다 들어오는 돈은 어느 순간 다 사라져 버리는 허전함 속에서 그래도 오롯이 나를 위해 돈을 쓰는 이 순간만큼은 행복하다. 가끔은 맘에 든 것이 없어서 빈손으로 돌아오기도 하지만 마음껏 선택할 수 있었던 그 순간들은 충만한 시간이었기에 돌아오는 길이 뿌듯하다.

고터 쇼핑에서 또 하나 즐거운 아이템은 맛있는 커피와 에그타르트이다. 한층 더 올라가면 신세계 백화점의 온갖 맛있는 산해진미가 펼쳐지지만 그곳은 너무 번잡하고 정신이 없고 줄을 서서 물건을 구입하는 것이 싫다. 그래서

지하상가에서 쇼핑 중간에 나에게 에너지를 공급해 주는 맛있는 커피집을 발견한 것은 행운이다.

이제 쇼핑여행에서 이 집에 들르는 것은 기본 코스가 되었다. 이 커피숍 이름은 '터미널 에스프레소 하우스'다. 이름에 걸맞게 에스프레소가 맛있다.

지하상가를 한 바퀴 돌며 맘에 드는 것들을 스캔한 후, 커피를 마시고 에그타르트를 먹으며 그 물건들을 떠올려본다. 꼭 사야겠다는 확신이 들면 가게를 찾아가 물건을 구매한다. 나름 충동구매를 피하는 방법이다.

커피를 마시고 반대쪽 끝까지 걸어가면 나의 쇼핑 여행이 끝난다. 무거워진 등짐을 지고 귀가하는 길. 집에 가서 쇼핑한 옷들을 착용해보고 싶은 기대감에 또 맘이 설렌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이 옷 저 옷 입어보면서 나의 여행을 마무리한다.


옷에 대한 애착보다 내가 사고 싶은 걸 마음껏 사는 경험이 나를 즐겁게 하는 것 같다. 사는 게 재미가 없고 홀로 있는 시간이 지겹고 자존감이 떨어질 때 이 쇼핑 여행을 떠난다.

이 여행은 어느 정도 나를 일으켜 세운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효과가 오래 가진 않는다.

그래서 난 딸아이의 금일봉이 주기적으로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