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그리고 또 다른 시작
나는 친구들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눈에 띄지 않는 구석을 찾아 앉았다.
우리는 늘 밤낮이 엇갈린 채로 반대되는 시간대를 공유할 수밖에 없었다.
이른 아침 내가 겨우 눈을 떴을 땐 반대로 그는 하루가 끝난 시간이었고, 내가 눈을 붙일 때 그는 깨어나 바쁜 일상을 시작했다.
싸움도 잦아졌다. 그가 주말에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그의 목소리는 날카로워졌다.
작은 간극은 점점 커졌고, 우리의 마음에도 보이지 않는 금이 생기기 시작했다.
친구들과 시카고 근교의 도시에 유명한 건축가의 투어를 신청한 그날,
새벽이라는 외로움에 취해있던 그는 격앙된 목소리로 내게 전화를 걸었다.
“왜 넌 항상 바쁘기만 해?... 언제까지 나 혼자 이렇게 외롭게 지내야 하는 건데?”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의 답답한 숨소리가 내 가슴 위로 무겁게 얹어졌다.
하하 호호 즐겁게 투어를 즐기는 친구들을 뒤로한 채 나는 친구들 사이에서 멀리 떨어져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 조용히 앉았다. 휴대폰이 뜨겁게 달아오를 때까지 우리의 답답한 대화는 지루하게 이어졌다.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려 노력했지만, 그저 어긋나기만 했다.
문장과 문장 사이의 침묵은 함부로 숨을 내쉬기도 힘들 만큼 답답했다.
마치 두꺼운 벽 앞에 홀로 서 있는 듯 그는 저 멀리 손 닿지 않는 곳에 있는 것만 같았다.
한편으로는 그의 외로움을 이해했지만, 바쁜 일상 속에서 나 혼자 그의 화를 받아내야 한다는 사실이 점점 나를 지치게 만들었다.
긴 시간의 통화에도 불구하고 결국 우리는 끝내 싸움을 끝내지 못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는 날밤을 샜으며 나는 오늘 투어를 온전히 다 날렸다.
휴대폰을 내려놓은 후에도 마음이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텅 빈 방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야 했던 그가 얼마나 외로웠는지 알면서도 나 또한 내가 가진 감정의 늪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우리는 서로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애썼지만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로만 사랑을 나누기엔 헤어지기 전 우리가 만났던 기간이 너무나도 짧았다. 6개월을 만나고 6개월을 헤어져 있어야 했던 평범하지 않은 시간.
시카고의 겨울은 길었고 나는 매일 그와의 관계를 고민했다.
하지만 흐르는 시간을 막을 수 없듯, 아슬아슬했던 우리의 관계도 시카고의 긴 겨울을 지나며 조금씩 따뜻함을 되찾았다. 마침내 봄이 오듯, 우리 사이에도 서서히 변화가 찾아왔다.
드디어 8월 마지막 주의 어느 날. 한국행 비행기를 타는 그날이 다가왔다.
나는 가방을 챙기면서도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였다.
설렘과 두려움.
과연 그는 나를 어떻게 마주할까. 어색하지는 않을까. 다시 잘 지낼 수 있을까.
시카고-인천-김포 그리고 부산의 긴 여정을 지나 공항에서 그를 다시 만났을 때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가 조심스럽게 내게 다가와 손을 꼭 잡았다. 말 한마디 없이 손끝에서 전해지는 따뜻함이 그동안의 모든 외로움을 사르르 녹여냈다. 몇 초가 영원처럼 느껴졌다...
“보고 싶었어...”
무거운 입술을 겨우 비집고 나온 그 한마디에 그동안의 외로움이 한순간에 녹아내리는 듯했다.
이제야 진짜 연애가 시작되는 것 같았다. (뒤에 알게 되었지만 그날 공항에서 그는 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너무 새까매진 모습에 어색해서 감히 안아줄 수가 없었다고,,,)
그렇게 우린 5년간 지지고 볶으며 남들과 같은 평범한 연애를 했고 결혼적령기가 되자 자연스럽게 결혼을 이야기하게 되었다.
30살의 그는 한의사였고 나는 초등교사였다. 누가 봐도 결혼하지 않을 이유가 굳이 없을 조건이었다.
우리는 누구나처럼 결혼을 꿈꾸었고 순진하게도 행복은 그냥 따라오는 거라 믿고 있었다.
결혼을 6개월 앞둔 여름, 그가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 순간 내 인생의 항로가 한순간에 흔들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