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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 해의 끝자락에서 새해를 바라보기

매듭, 마무리

by Joung park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견은 바로 시간의 발견이다. 그리고 이것이 인간의 가장 독특한 문화적 특징이다.”이라는 명언은 움베르토 에코가 ‘시간의 창조’라는 글에서 한 말이다. 헌 해와 새해의 사이가 되면 젊은이들에게 나를 한번 믿고 읽어 보라고 강추하는 말이기도 하다. 에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한마디로 ‘인간은 지구상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명체 중에서 유일하게 시간을 관리, 창조, 투자, 또 설계를 하여 자신의 삶의 질과 결을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이다’라는 말이기도 하다.


실제로 이 땅의 모든 것은 다 시간의 노예이고 또 시간의 지배를 받고 있다. 그래서 ‘흘러가는 시간 (세월) 앞에 장사가 없다’라고도 하지 않나 싶다. 단지 존재하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미물들에게는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은 단지 마냥 속절없이, 뜻 없이, 그리고 무심코 흘러갈 뿐이다. 당연히 매일이 천편일률 적일 뿐이고 한결같아 변화, 다름 또 차별이 설 자리가 없기에 ‘천지개벽’이라는 말은 아예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인간만은 시간의 흐름을 감지할 수 있고 또 그 흐름을 잴 수 있는 도구를 발명했는데 그것이 바로 시간이라는 것이다. 고로 인간에게는 하루, 한 주, 한 달, 1년 등. 그러면서 그 시간의 흐름의 매듭에 의미를 부여하는 습관이 있는데 그 습관 덕택에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가를 수 있게 되었고 또 시간 흐름의 매듭들의 의미들이 모여 마침내 누구도 함부로 흉내 낼 수 없는 나만의 역사를 창조하는 것이다.


‘역사를 창조한다’는 말은 참으로 소름 끼칠 정도로 절대로 가볍게 아무렇게나 내뱉는 말은 아닌 것 같다. 미물들에게는 감히 역사라는 말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생명체가 다 예외 없이 시간과 더불어 살아가고 시간에 지배를 받고 그래서 운명적으로 시간의 노예가 되지만 인간만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 역시 시간과 더불어 살아가고 또 시간에 쫓기고 그래서 시간의 지배를 받고 또 시간의 노예가 되기도 하지만 결국에 가서는 인간은 시간의 주인이 될 수 있는 마지막 뒤집기와 역전의 ‘찰나’의 순간을 붙잡을 수가 있음을 자신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바로 ‘하루’, 한주’, ‘한 달’ 그리고 ‘한해’라는 시간의 매듭을 통해서 비로소 시간의 주인이 되고 시간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유일하게 어떻게 무엇을 시작하느냐 만큼이나 어떻게 마무리를 잘하느냐 하는 것에서 운명이 달라짐을 안다. 즉 ‘유종의 미’의 주인공이 될 것인가 아니면 ‘용두사미’의 주인공으로 살 것인가 때마다 매듭을 잘 짓고 마무리를 통해서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가를 수 있음을 안다는 말이다.


감히 말하건대 한국의 시골에서 자신의 인생의 일부만이라도 농사로 잔뼈가 굵어진 사람이라면 하루의 끝자락에서 매듭을 짓고 또 마무리를 해야 한다는 말과는 어떤지 친근감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 싶다. 어릴 적에 농사꾼 할아버지와 함께 자랐다. 귀가 따갑도록 들었던 것이 있는데 바로 ‘정리정돈’ ‘제자리 같다 놓기’이라는 마무리 작업들이다. 그래야만 내일 일이 수울해진다는 것이다. 하루를 마무리 잘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 나중에 하늘과 땅의 차이를 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마무리와 매듭을 잘 짓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는 곧바로 시골 사랑방에서 볏짚으로 새끼 꼬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깨달았던 것이다. 여러 사람이 다소곳이 모여서 각자 집에서 가져온 볏짚으로 새끼를 꼬게 되었다. 이런저런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새끼를 오순도순 모여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열심히 꼽니다. 간혹 배고프면 감자 고구마를 삶거나 구워 먹으면서 새끼를 꼽니다. 볏 집을 부드럽게 하려고 계속 손에 침을 뱉으면서 새끼를 꼽니다. 다 꼰 새끼는 깔고 앉기도 하고 등 뒤에 차곡차곡 쌓아가며 새끼를 꼽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것을 아시나요? 새끼를 다 꼬고 나면 꼭 해야 할 일이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반드시 매듭을 짓는 일입니다. 만일 매듭을 짓지 않으면 밤새 꼰 새끼가 다 풀어지게 되어서 밤새한 수고가 다 헛수고가 되고 몽땅 도루묵이 되고 말지요. 일맥상통하게 이 시골 농부님들의 마지막 마무리하는 삶의 단면 속에서 고사성어 ‘화룡점정 즉 화폭의 그림에 마침내 용에 눈을 그리자 말자 그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처럼 보였다는 의미’를 떠올려보는 것은 지나친 생각의 비약만은 아니다 싶다. 용의 그림에 눈동자를 그려 넣는 마무리가 참으로 중요한 것처럼, 또 새끼를 다 꼬고 나면 반드시 매듭을 지어야 함이 중요한 것처럼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도 마지막을 잘 정리하는 마무리가 중요한 것이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오고야 만다” 또 “국방부 시계는 가끔 거꾸로도 간다”라는 세간의 말은 공연히 생긴 것은 아님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지난해 2023년이라는 세월도 질풍노도의 시간이었다. “아니 벌써!” “아니 내가 뭘 했지?”라는 훌쩍 날아가버린 지난 한 해의 시간을 향한 푸념과 타령 그리고 넋두리만 가득해진다. 오늘따라 마치 그 옛날의 인디언들은 왜 말을 타고 가다가 갑자기 이따금 말에서 내려 자기가 달려온 쪽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선 다시 말을 타고 달리곤 했는지 이해가 되어진다. 말이 지쳐서 쉬게 하려는 것도 아니고, 자기가 쉬려는 것도 아니다. 혹시 말과 함께 몸이 너무 빨리 달려 미처 자기의 영혼이 뒤쫓아오지 못했을까 봐 자기의 영혼이 돌아올 때를 기다리는 것이라고 한다. 한참을 기다려 자기 영혼이 왔다 싶으면 그제야 다시 말을 타고 다시 달린다는 그 지혜를 한 해의 끝자락에서 한번 되새겨본다.


또 오늘따라 나폴레옹이 그 어느 날 옷을 입혀달라고 부관에게 부탁을 하면서 옷을 입혀주고 있는 부관에게 왜 이렇게 말했는지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여보게! 옷을 좀 천천히 입히게, 지금 나는 바쁘단 말일세." 오늘따라 부관에게 ‘내가 지금 너무 바쁘니 제발 옷이라도 좀 천천히 입히라’고 하는 그 위대한 장군의 심정을 동병상련의 입장에서 보게 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새라고 하는 ‘눈 깜짝할 새’의 등에 업혀서 ‘날아온’ 헌 해의 나날들로 가뜩이나 현기증이 날 심판인데 자네까지 호들갑을 떨고 또 나를 깝치면 ‘나보고 어떡하라는 말인가?’라는 희대의 영웅의 푸념이 남의 말로만 들리지 않음을 고백한다.


정말이지 2023년이라는 ‘놈’은 나로 하여금 여지없이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합니다."라는 문구는 전자제품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삶을 상징하는 문구임을 되새기게 한 나날들이었다. 30대, 40대, 그리고 50대 휘파람 불면서 여유적적하게 걸어갔었던 길 선상에서 택했던 선택의 ‘실수’들은 대충 잘도 넘어갔지 않았는가? 하지만 웬걸 68마일이라는 속도로 (110킬로미터) 달리는 길 선상에서는 대충 넘어가는 일이 하나도 없었고 모든 선택들은 무지막지하고 막무가내 식으로 나에게 선택의 결과에 대한 책임론을 에누리 없이 어김없이 강요했다. 내 평생에 항상 당연하게 그 자리에 있을 줄로만 착각했었던 것을 잃고서 이 나이에 걸맞지 않게 밤새토록 눈물로 침상을 띄우고 요를 적실만큼 ... 펑펑 울면서 눈물로 지새운 시간도 많았다. 또 올해는 슬쩍 넘어가나 했지만 원인 모를 질병이 나의 발목을 붙잡았고 또 때로는 내가 과연 살아서 내 발로 걸어서 집으로 돌아갈 수가 있을까 라는 그러한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속이 후련했던 그런 처절하게 외로웠던 나날들도 있었다.


지난 한 해 살아온 인생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내 모든 능력과 힘의 한계가 뼈저리게 느끼게 한 해도 지난해이었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도 있다고 했지만 유난히도 희극은 나에게 요원하기만 했었던 한 해이었다. 어느 날에는 내 인생에서는 ‘개천에 용은 다 죽었다’라는 말이 자리매김을 하고 있었고 화들짝 그때마다 가장 소스라치게 놀란 장본인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다. 그만큼 희망이 없다는 말이기도 하였던 나날들이었다. 정호승 시인의 “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라는 매정한 생각 또 도종환 시인의 “이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다” 고 했는데 오직 내 인생의 화단에서는 유난히 흔들림만이 있었지 활짝 핀 꽃은 눈을 닦고도 보이지 않았던 것처럼 느껴진 한 해이였다. 2023년이 정녕 이럴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반기지나 말 것을 이라는 푸념과 하소연만이 가득해 진 한해이었다.


그러다 문득 친구의 편지를 받았다. 친구가 이민 40년 지기 친구들과 함께 버킷트 리스트 차원에서 거의 8년 동안 차일피일 미루고 또 미러웠던 자동차 미국횡단 여행을 강행하였다. 8년 전에 계획을 세우고 마침내 중론을 모아서 버려진 스쿨버스를 구입해서 각자의 전문성을 최대한 발휘해서 우여곡절 끝에 누가 봐도 그럴듯한 장거리 여행용의 관광버스로 개조를 한 것이다. 꿈에도 그리던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그러나 꼭 죽기 전에 한번 가보고 싶었던 요세미티 국립공원으로 출발을 한 것이다. 더 이상 다를 수도 없었던 9명의 칠순을 앞둔 사람들이 ‘노익장’을 과시하면서 의기투합하고 일심동체가 되어서 나들이 ‘관광버스여행’을 시작을 한 것이다.


물론 나름대로 고집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뤄워 할 나이 든 여러 사람들이 규합하여 한 목적을 향해 가는 길은 그렇게 생각만큼 만만치 않았기에 수십 번이나 ‘여기까지이구나’라는 생각도 수없이 들었다고 한다. 난데없이 중간중간에 찾아온 버스 고장은 고사하고서라도 조변석개하는 날씨도 모든 사람의 인내심을 끊임없이 자극했던 것이다. 막막하고 텅 멜빈 고속도로에서 버스 정비공 기술자를 찾아 낳선 땅을 헤멜 때는 정말이지 ‘왜 내가 이렇게 사서 고생을 할까?’라는 자멸감과 자괴감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도 입 다물고 각자의 위치에서 맡았던 임무를 전전긍긍하면서 마침내 꿈에도 그리던 목적지에 도착을 하였던 것이다. 하필이면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저녁 무렵 공원 입구에 이르렀을 때 이미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고, 공원 경비원은 눈보라가 심해지고 있다고 말하며 돌아가는 편이 낫겠다고 기죽이는 말만 골라서 하였다고 한다. 그래도 이심전심으로 통한 것인지 아니면 저 멀리서 악전고투한 온 동양인들의 열정을 봐서인지 알아서 하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면 그렇지 하늘도 정성을 알아주었거니 하면서 산길로 들어섰는데 핸들을 오랫동안 꽉 쥔 탓에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렸고 ‘끝까지 갈 수 있을까?’ 하고 거의 희망을 버리려 했을 때, 어디에선가 갑자기 사슴 한 마리가 숲에서 나와 하얀 눈밭을 가로질러 일행들의 앞을 유유적적 지나갔다고 한다. 마치 동양인들을 반기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내 친구가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단체 관광버스’ 여행을 이렇게 정리했었다. 참 인상적이었고 또 가슴에 와닿은 화룡점정이었다. 포기하고 싶었던 생각이 꿀떡 같았고 또 평상시에 전혀 예상치 못한 관계의 갈등과 충돌로 후회막심의 순간들도 많았지만 그래도 들어간 시간과 정성을 생각하면서 반신반의라는 심정으로 ‘그래도 좋았던 여행’이라고 매듭을 짓기로 마음을 먹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상하리만큼이나 모든 좋지 않았던 기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좋은 기억만이 자리매김을 하였다는 것이다.


친구의 말끔하고 정감 나는 마지막 마무리를 읽으면서 그렇다면 나는 과연 어떻게 지난한 해의 여정을 마무리를 해야 할 것인가?라는 도전을 받게 되었다. 나도 친구처럼 ‘내게 주어진 시간의 주인으로 행세를 할 수는 없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나는 헌 해를 마무리하면서 내일의 내 삶의 역사를 써 내려가는 것이다. 오늘 내가 어떻게 지난해를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나는 내년을 향한 새로운 징검다리를 놓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전광석처럼 들기 시작을 하였다.


나는 한 해를 돌아보면서 내년이라는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여행의 첫발을 내디딘다. 그래도 참 ‘괜찮았던’ 한 해이었다고 매듭을 짓기로 작정을 하였다. 그런데 그렇게 작정을 하고 나니 이상하리 만큼이나 내 주위에는 내가 가는 발걸음을 응원하는 사람들이 많았음에 화들짝 놀랍기만 하다. 전에는 전혀 보이지 않았던 고마운 은인들이 생각보다 훨씬 더 많았다. 그러고 보니 헌 해는 ‘나에게 술을 분수에 넘치게 많이도 사준’ 한해이었고 비록 뿌리째 마구 흔들렸던 헌 해이었지만 그 와중에 꽃이 피었던 한 해이었음을 고백하게 되었다. 최근에 내가 좋아하는 '유 퀴즈 온 더 블럭'에서는 수능 역사상 최초 만점자 오승은 씨가 출연했었다.


그녀가 나에게 준 삶의 잠언인데 오양은 공부 잘하는 비법에 대해 “공부가 재밌으면 제일 좋다. 공부를 적대시하지 않으면 좋을 거 같다. 문제 내는 사람들이 나를 괴롭히려고 낸 문제가 아니고 나를 틀리게 할 작정으로 꼬지 않았다는 걸 좀 알았주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적대감이 없는 게 중요하다. 공부가 재밌으면 제일 좋다”라는 나로 하여금 멍 때리는 답을 한 것이 참 인상적이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말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 모양이구나 싶었던 순간이었다.


헌 해의 아픔을 두고 절대로 남 탓하지 말라는 말로 또 새해의 이보 전진을 위한 헌 해의 일보 후퇴를 하는 것을 너무 상심하지 말라는 충언으로 들린다. 또 유난히도 아팠던 헌 해를 보면서 니체의 짧고 좋은 글귀 “나를 죽이지 못하는 (헌 해의)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해 줄 뿐이다”라는 말이 들리기 시작을 했다. 들으면 들을수록 참으로 멋진 말이지 않은가? 인간은 헌 해의 시련을 통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또1953년 최초로 세계의 최고봉 에베레스트(8,848m)에 올랐던 희대가 낳은 불세출의 산악인으로서 전무후무한 명성을 얻었던 에드먼드 힐러리 경의 “산아 너는 자라지 못하여도 나는 자랄 것이다.”라는 말도 헌 해가 새해를 살아갈 나에게 준 선물이다.


갑자기 유행가의 한 가사가 떠오른다. “나는 사막을 걷는다 해도 꽃길이라 생각할 겁니다. 우린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겁니다” 나를 보고 하는 노래는 아닐까 싶어 진다. 이만하면 참 좋았던 한해라고 말끔하고 깔끔하게 매듭을 짓고 새해를 살리라 작정을 해보니 세상이 조금은 달라져서 좋기만 한 새해가 나를 기다리고 있어서 참 좋다.


늦게 나마 올린다.

Happy New Yea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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