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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당신이 생각하고 그린 대로 이루어진다

꿈, 새해

by Joung park

6·25 한국전쟁 때 일어난 일이다. 태평양을 건너와 생면부지의 낯선 사람들인 한국인을 구하기 위하여 이역만리 타향에서 미국 병사들은 황급히 날아왔다. 낯설고 물선 한국 땅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니라 손과 발이 얼어 제대로 움직일 수조차 없었던 그런 거친 바람과 차가운 날씨뿐이었다. 그런 참혹하고 암울한 전쟁터에서 최초의 여자 종군기자 히긴스가 죽음의 공포를 가장 많이 느끼고 있었던 한 흑인병사에게 녹음기를 들이대며 이렇게 물어봤다. “지금 당신에게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히긴스는 당연히 그 어린 미군 병사의 입으로부터 ‘먹을 것, 마실 물, 입을 옷, 아니면 지긋지긋한 전쟁의 휴전이다’ 같은 대답을 기대했던 것일 것이니다. 그런데 그 흑인 병사의 대답은 너무나 예상 밖이었고 또 전혀 예기치 못했었던 참으로 기상천외한 답이었다. 그 병사의 대답은 “기브 미 투모로 (Give me Tomorrow) 즉 내일을 주십시오”라는 절규이었다. 물론 그 병사의 대답은 곧바로 전 세계로 타전되어 아주 유명한 말이 되었고 그 병사의 응답 덕택에 히긴스는 1951년 여성 최초로 퓰리처상을 수상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러분!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사지’에서 그 젊은 흑인 병사가 느꼈던 처절함, 막막함, 암울함 그리고 황량함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나요? 더 나아가 그 미군 병사의 ‘내일’을 향한 처절하고 간절한 기다림의 마음을 이해할 수가 있나요? 오직 오매불망 ‘내일’만을 희망하였고 오직 ‘내일’만이 하루빨리 오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아시나요? 그 병사들이 그렇게도 오매불망 목을 길게 늘어뜨리고 기다렸던 내일이 지금 저와 여러분에게 ‘눈앞에’ 주어진 ‘현실’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춤이라도 둥실둥실 치면서 마지 해야 할 그런 엄청나고 어마무시한 ‘역사적 사건’이 지금 우리에게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그런데 365일이라는 거리를 우리 하나만을 마음에 두고 꼬박 달려온 2024년이라는 새로운 해를 내 면전에 두고서도 이상하리 만큼이나 시큰둥, 어정쩡, 또 얼떨결해 하는 이 마음은 도대체 무슨 까닭일까요? 마치 찾아온 ‘방문객’에게 왠지 지울 수 없는 큰 결례를 하고 있지는 않나 하는 마음은 어디에서 온 것인지요? 거두절미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이런 우리의 마음을 너무 적나라하게 정직하게 잘 표현한 시가 있기에 함께 나누고 싶어서 소개를 합니다. 이동순 시인의 ‘새롭지 않은 새해’라는 시의 일부입니다.


“새해가 왔는가

미처 맞이할 겨를도 없이 불쑥

들이닥친 길손처럼 새해는 와 버렸는가

어제 방구석에 쌓인 먼지도 그대로

내 서가의 해방기념시집의 찢어진 표지

그 위를 번져 가는 곰팡도 아직 못 쓸고 있는데

새해는 불현듯 와 버렸는가…

못다 쓴 원고뭉치는 그대로 밀려 있는데

미처 남쪽으로 떠나지 못한 새들도 있는데

불현듯 불현듯 새해는 왔는가…”


‘미처 맞이할 겨를도 없이’ ‘불쑥 들이닥친 길손처럼’ ‘불현듯’이라는 단어들의 되풀이 속에서 시인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깊은 뜻이 가슴으로 와닿고 있지 않나요? 어찌 이토록 적나라 또 정직하게도 하늘에서 내려온 축복인 ‘새해’를 마치 ‘어부지리’로 손에 들었던 사람처럼 너무나 어색해 또 머쓱해하는 우리의 마음을 잘 고발할 수가 있을까? 이 시는 아직도 2023년의 미련을 못 버리고 살아가는 나에게 정말이지 올 한 해는 참 후회 없이 정말로 잘 살아야 할 터인데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까?라는 깊은 고민을 하게 죽비가 되고 있음을 고백한다.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1월이라는 단어에서 뭔가 실마리가 풀리는 느낌을 받는다. 1월을 영어로 ‘January’라고 합니다. 그리고 ‘January’는 그리스 신화의 야누스 신이라는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 야누스 신은 얼굴이 앞뒤로 두 개인데 뒤에 있는 얼굴로는 과거를! 앞의 얼굴로는 미래를 보아야 함을 상징하고 있다고 한다. 한마디로 첫 번째 달인 1월은 과거를 보면서 내일의 디딤돌이 되고 또 지난날의 묵은 것들은 툴툴 털고 미래를 보면서 새 출발의 다짐과 결심을 하는 양방형의 달을 나타낸다고 한다. 지난날은 우리가 다시 사는 것이 아니라 단지 내일의 내 삶의 반면교사로 받아들이라는 말이기도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새해를 누리고 살아갈 자격이 주어지는 것임을 말한다.


나이 지긋하신 분들은 다 아실만한 고전 중에 고전 ‘빠삐용’이라는 유명한 영화가 있다. 빠삐용 (스티브 맥퀸)의 실제 주인공은 ‘앙리 샤리에르’라는 사람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살인죄로 감옥에 있다가 수감 내내 자신의 억울함을 풀기 위하여 여러 번에 걸친 탈출을 시도해 보지만 다 실패하고 결국 더욱 가증스러운 환경에서 종신수가 되고 말았다. 영화의 최고 명장면은 빠삐용이 상어가 우글거리는 죽음의 섬에서 야자수 열매로 만든 작은 배를 타고 탈출하는 마지막 장면입니다. 영화의 흥미진진한 줄거리만큼이나 유난히 희대의 명언들이 많이도 만들어진 영화이기도 한데 특별히 빠삐용이 꿈속에서 유죄 판결을 받는 재판 내용이 압권적이다. 빠삐용이 재판관한테 항의한다. ‘나는 죄 없이 누명을 쓰고 끌려온 몸인데 나한테 무슨 죄가 있단 말이요?’ 재판관이 대답한다. ‘당신은 당신의 인생을 허비한 일로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진 겁니다’. 빠삐용이 비록 탈출에 성공했다 하나 이미 그때는 늙은 몸이 되었을 때이다. 처음에 받은 형량을 제대로 마치고 나와 새로운 삶을 개척했다면 젊은 나이에 더욱더 가치 있는 인생을 꾸려갔을 것이다라는 애환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빠삐용의 탈출을 보고 있던 감옥소의 둘도 없는 절친 더스틴 호프만의 대사가 가슴을 울린다. “자네가 이 섬을 탈출해도 자신의 감옥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자네는 여전히 감옥 속에 있는 거야.” 그런데 여러분 영화 빠삐용 이후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습니다. 샤리에르는 공소시효 때문에 프랑스로 돌아가지 못하고 남미를 전전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공소시효가 끝나는 1967년, 61세가 되어서야 자신에게 죄를 씌운 검사를 찾아가지만, 원수 갚는 일이 덧없음을 깨닫고 자서전이자 영화 원작인 ‘빠삐용’을 기록했다고 합니다. 샤리에르는 30년 증오를 용서로 풀며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께 기도했다. 내가 복수를 포기한 대가로 다시는 이런 비극이 생기지 않도록 해달라고. 나 자신에게 속삭였다. 너는 이겼다. 네가 가장 자유롭고 행복한 사람이다.”


앙리 샤리에르가 이 새해의 아침에 우리에게 외친다. 새해 첫 번째 달 1월에 자신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지난해의 슬픔, 미움과 증오의 사슬을 끊고 희망차게 앞을 보고 출발하길 바란다고 외치고 있다. 유행가의 ‘걱정 말아요, 그대’의 구구절절 애절한 가사 “그대는 너무 힘든 일이 많았죠 새로움을 잃어버렸죠 그대 슬픈 얘기들 모두 그대여 그대 탓으로 훌훌 털어 버리고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우리 다 함께 노래합시다 후회 없이 꿈을 꾸었다 말해요”가 가슴을 촉촉이 적신다.


박영희 시인의 ‘접기로 한다’가 나를 다독이면서 “뭘 그렇게 자꾸만 제자리걸음으로 꾸물거리고 있느냐?”라는 볼멘소리로 이제 앞만 보고 달리라고 내 등을 떠밀고 있다. “접기로 한다 요즘 아내가 하는 걸 보면 섭섭하기도 하고 괘씸하기도 하지만 접기로 한다 지폐도 반으로 접어야 호주머니에 넣기 편하고 다 쓴 편지도 접어야 봉투 속에 들어가 전해지듯 두 눈 딱 감기로 한다…” 오늘따라 박영희 시인에게 한없는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이 시를 읽고 지난해에 대한 섭섭함, 안타까움, 울분, 분노, 실망, 억울함, 그리고 부끄러운 마음을 이제 그만 툴툴 털어버리기로 작정을 한다. 하루빨리 접을수록 내 자신을 자유롭게 함도 깨달았다. 내 모든 아픔과 슬픔의 무게를 몽땅 ‘다사다난’이라는 네 자에 담아서 흘러 보내기로 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내 마음을 접고 비우니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던 그 무엇이 저절로 찾아와 내 빈 마음의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이제 깨달았다. 빈 것은 항상 또 무엇으로 곧바로 채워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지난해를 내보냈으니 이제 새해의 그 무엇으로 채워야 한다. 왜냐하면 내 마음의 빈 공간을 내가 먼저 ‘선제공격’을 하지 않으면 지난날의 몹쓸 것들 또 백해무익한 쓰레기들로 채워짐을 알게 되었다. 올해만은 내 인생의 주도권은 내가 꼭 움켜쥐고 싶다. 아직도 긴가민가 하다면 시골에 가 보면 어떨까 싶다. 요즘 시골에는 빈집들이 많이 있다. 이전에는 그래도 좋은 집, 번듯한 집이었는데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아서 버려진 집들이다. 마당에는 잡초만 무성하고, 집안은 거미줄과 각종 곤충들로 가득하다. 음산한 흉가의 모양이다. 우리의 마음의 집도 마찬가지이다. 자꾸 내 마음의 집을 청소하고 깨끗한 것으로 채워야지, 그렇지 않으면 버려진 집처럼 흉하고 지저분하게 된다. ‘안주’, ‘교만’, ‘질투’, ‘시기’, 그리고 ‘방심’하고 있으면 언제 쳐들어와서 내 삶을 온통 집어삼킬지 모른다. 그래서 절대로 매 마음을 빈집상태로 놔두어서는 안 된다. 무엇으로 채우는 것이 새해의 급선무이다. 그래서 첫 달 1월 ‘January’ ‘야누스’의 얼굴의 반쪽은 앞을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올해는 무엇을 바라보고 살아갈까?


영국 군대에 네팔 출신 거카 족속으로만 구성된 세계에서 가장 용맹한 군대 거카 사단이라는 특수부대가 있다. 그 거카 사단의 일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2차 세계대전 중 거카 사단이 버마 전투에 투입되었다. 그중 한 병사가 실종되었는데 4개월 만에 1천4백 마일을 걸어 부대를 찾아 돌아왔다고 한다. 그간 정글을 헤매며 수백 번 죽을 고비를 넘었는데 그는 누더기가 된 지도 한 장을 보이며 손에 움켜쥐고 그것을 바라보면서 ‘내일’을 향한 희망과 힘을 얻고 살아 돌아올 수 있는 기적의 씨로 만들었다 말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지도였을까? 런던 시내의 관광 안내도였다고 한다. 네팔의 이 시골 청년은 언젠가 한번 런던에 가서 마음껏 구경하는 것을 꿈으로 삼고 관광 안내도를 지니고 다녔던 것이다. 하물며 새해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새해를 마음껏 구경하는 지도를 그리자. 마치 월터 디즈니라는 한 가난한 젊은 만화가가 그린 쥐 그림이 훗날 미키 마우스의 시작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 젊은이는 이 쥐 그림을 바탕 삼아 훗날 플로리다 주의 한 버려진 땅 오렌지카운티에 세계적인 놀이동산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가진 것 없었지만 그는 바로 그 꿈 하나로 성공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가 그린 쥐 그림 한 장으로 그는 황무지 땅에다가 세계적인 놀이 동산을 세워 성공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떤 그림이든지 희망이 담긴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을 결국에는 그 그림을 완성하는 것을 볼 수가 있음을 기억하라는 말이다.


오늘 제목 “믿어라. 당신의 인생은 당신이 생각하고 그린 대로 이루어진다”라는 명언은 실존주의 철학자 데카르트의 어록에서 퍼온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내가 지금 내 머릿속에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그리느냐가 그 인생을 지배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이 그렇게 얼토당토 한 말이 아님을 알게 한 연구가 있다. 하버드 대학 MBA과정 재학생들을 대상으로 목표 설정 그러니까 학생들이 미래의 목표에 관하여 ‘생각하고 그리는 것’이 있는가에 관한 연구가 진행된 적이 있었는데 연구에 참가했던 재학생들 가운데 단지 3%만이 재학시절 뚜렷한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가졌다고 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10년 후 알아보니 목표와 계획이 뚜렷했던 3% 학생들의 연봉은 그렇지 못했던 나머지 97% 다른 참가자들 평균수입의 무려 10배에 달했다는 것이다. ‘목표와 계획’ 즉 ‘생각하고 그리는’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어떻게 새해를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무런 생각 없이 살아가는 사람보다 몇 배나 더 성공할 확률이 많다는 말이고 또 무엇을 그리느냐가 사람의 인생을 지배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아마도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도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들을 보여주시면서 너의 자손이 저 별처럼 많아질 것이다." 즉 ‘그리는’ 시청각 교육을 강조하시지 않았을까 싶다.


오늘 글을 매듭을 내면서 불현듯 어린 시절 했던 돌잔치가 생각이 난다. 요즘은 뜸해지고 있지만 그래도 가끔은 돌잔치에 초대를 받는다. 뭐니 뭐니 해도 돌잔치의 백미는 돌잡이이다. 기억을 되살려 보라. 첫 번째 생일에 상을 차려 놓고서 그 위에 쌀, 붓, 활, 돈, 실 등을 펼쳐놓고 아이가 집는 물건을 보고서 아이의 장래와 관련하여 미래를 점쳐보는 의식인데 요즘은 마이크나 청진기 등 여러 가지 물건을 추가하기도 함을 본다. 그러고 보니 우리 조상들의 놀랍고 기막힌 혜안과 지혜가 돋보이고 엿보인다. 이런 생각을 해본다. 혹시나 우리 조상들은 일치감치 아이들의 손에 쥔 그 무엇이 운명을 바꿀 수도 있음을 깨달았던 것은 아닐까? 아중 엉뚱하고 황당무계한 비약은 아니지 않을까 싶다.


오늘은 빠삐용으로 신년 덕담을 시작했으니 빠삐용으로 끝을 내면 좋을 것 같다. 새해는 우리 모두 “'빠삐용'처럼 살자”로 새해의 좌우명을 삼으면 어떨까 싶다. 좋지 않은 것들, 절망, 실망, 두려움, 걱정, 근심, 유혹, 시기, 질투에 '빠지지' 말고, 쓸데없고 하찮은 것들에 '삐지지' 말고, 웬만한 허물은 서로 덮어 주고 '용서' 하며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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