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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e Mar 10. 2024

아직 마을에 사람이 살고 있어요.

관광객을 위한 직장이 되어가고 있는 아름다운 섬, 홍도

여기저기 인터넷 뉴스를 검색하는데, 작은 기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전남 신안군 홍도분교 폐교 위기 탈출’. 지난해 남아있던 6학년 생 3명이 졸업을 앞두자, 신안군에서는 학부모에게 일자리와 숙소를 제공한다는 특단의 조치를 시행하여 6명의 학생을 유치하게 되었다는 기사였다. 3년 전, 홍도 1구 마을에 있는 아담한 학교 운동장을 뛰던 학생 같은 선생님과 선생님 같은 학생 서너 명의 모습이 소환되었다. 홍도 초등학교는 깃대봉으로 가는 등산로 초입에 있었다. 초등학교 옆 식당에 들렀을 때, 식당 아주머니 말이 학생이 모두 네 명이란다. “여기서 공부하면 아무래도 경쟁에서 밀리니까. 여기 사람들 거의 목포에 집이 있어요. 아이들을 목포 학교로 보내지요.”


아, 이제 섬은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라 관광객을 상대로 일하는 직장이 되어가고 있구나…


홍도에는 마을이 두 개 있다. 쾌속선이 드나드는 동남쪽의 1구 마을과 북서쪽의 2구 마을인데, 2구 마을로 가려면 배를 이용하거나 높이 368m의 깃대봉을 넘어서 가야 한다. 북서쪽에 위치한 2구 마을은 남동쪽에서 올라오는 태풍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곳이어서 애초에는 1구 마을보다 먼저 사람들이 살았고 인구도 많았단다. 그러나 큰 배가 드나들기 좋은 해안 조건을 가진 1구 마을이 관광의 중심지로 개발되면서 2구 마을은 상대적으로 낙후되기 시작했고 사람들이 떠나갔다. 이리하여 2구 마을은 섬 안의 오지가 되었다.  


이제 홍도는 흑산도 관광을 하면서 잠시 들려 유람선을 타고 섬을 둘러보는 부수적인 관광지가 되었다. 그래도 사람들이 사는 모습이 보고 싶어 우리는 깃대봉을 넘어 2구 마을을 찾기로 하였다. 2구 마을에는 멋진 일출과 일몰을 모두 감상할 수 있는 명품 등대가 있기에 2구 마을에서의 하룻밤은 생각만 해도 가슴 설레는 여정이었다. 특히, 저녁노을로 홍도라는 이름에 걸맞은 붉은 하늘빛을 온몸으로 받으면서 잘 조성된 데크를 따라 바닷길을 걸을 생각에 등짐을 지고 깃대봉을 오가는 것쯤은 너무나도 당연한 대가를 치르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오후 4시경 홍도에 도착했을 때 하늘은 온통 먹구름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다행히 걱정했던 태풍은 우리나라를 비껴갔으나 2구 마을 노을에 대한 기대에는 먹구름이 낀 느낌이었다. 계획대로 이박삼일의 짐을 등에 짊어지고 곧장 깃대봉을 향하였다. 올라가는 초입에는  곳곳에 전망대가 있었고, 전망대에서 보이는 경치만으로도 새벽부터 시작한 긴 여정의 피로가 어느 정도 가시는 듯했다.


데크 길이 끝나고 동백 숲으로 이루어진 본격적인 등산로가 시작되었다. 등산로는 곳곳에 계단이 잘 조성된 고요한 오솔길이었으나 아무래도 등짐이 부담스러웠다. 중간에 바다까지 뚫려있다는 숨골재를 만나고 숯가마터도 만났다. 한 시간가량 오르니 깃대봉이 나타났다. 깃대봉에서는 흑산도가 보인다는데 시야는 구름으로 꽉 막혀 있었다.


이제 2구 마을을 향하여 발걸음을 재촉했다. 길은 잘 만들어져 있었으나 마을 사람들만 오가는 곳이라 그런지 전망대 같은 것은 없었다. 조심조심 내리막길을 계속 내려오니 마을이 보이고 민박집 아주머니가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요즘 같은 시기에 등산로를 내려오는 사람이 우리 말고 또 있겠는가?


일단 짐을 풀고 등대로 향했다. 저녁노을을 향한 일말의 희망을 품고 해발 89m의 또 다른 산봉우리 위에 있는 등대를 찾아갔다. 등대로 가는 길은 아랫길 윗길 두 가지인데 우리는 민박집 아주머니 말대로 산길인 윗길로 올라 아랫길로 내려오기로 했다. 등대는 뒤쪽으로는 절벽이 있는 높은 산이 있고 앞쪽은 보석 같은 바위가 떠 있는 바다가 보이는 풍수지리 좋은 터에 낙락장송으로 꾸며진 정원까지 갖추고 있었다. 등대에 불이 들어왔으나 노을은 없었다. 구름이 다 삼켜버렸다. 이번에는 운이 좀 모자랐나 보다.


등대에서 내려오는 길은 너무도 좋았다. 전체가 데크로 이어지며 바다를 보면서 내려올 수 있었다. 노을만 졌으면 내 몸도 마음도 모두 붉게 물들었을 텐데. 아쉬움을 떨치기 힘들었다.


민박집으로 돌아오니 아주머니가 물질로 직접 채취한 홍합을 넣어 부친 부침개, 톳나물, 그리고 직접 잡은 게로 담근 양념게장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런두런 사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초등학교를 마치기 전에 떠난 아이들, 목포에 사는 자녀들, 평생을 이곳에서 보내다 보니 떠나기 어려운 사정, 텃밭을 제외하면 벼 한 포기 자랄 땅이 없는 이곳. 그래도 이제는 군에서 쌀을 주고 어디를 가든지 도서민에게는 뱃값이 천 원이라 먹고사는 데는 지장이 없단다. 다음 날 아침밥을 먹으면서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오전에 비 예보가 있었다. 비가 오기 전에 깃대봉을 넘어야 했다. 서둘러 아침밥을 먹고 다시 등짐을 지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짐을 꾸리는 동안 이미 밭으로 간 아주머니가 멀리서 손을 흔들었다.


하룻밤을 푹 쉬고 나서인지 깃대봉을 오르는 발걸음은 한결 가벼웠다. 비가 조금씩 오기 시작했으나 나무가 우거진 숲 속 길까지는 침범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시 깃대봉을 올랐으나 비가 내리는 깃대봉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깃대봉이라는 표지석뿐이었다. 빗줄기는 점점 굵어지고 1구 마을로 내려가는 데크 길에는 비를 막아줄 나무조차 없었다.


여객선 터미널에서 젖은 몸을 닦고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나니 비가 그친 듯하였다. 오전 11시. 12시 30분 유람선을 타기 전까지 몽돌해변을 둘러볼 충분한 시간이 남아 있었다.


섬마을 언덕을 넘어 터미널 뒤로 가니 망망대해에 1km 가까이 되는 몽돌해변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오랜 세파를 견딘 동글동글한 작은 돌들이 돌발을 일구어 파도가 그사이를 지나가면 돌들이 부딪히며 사그락사그락 소리를 내고 있었다. 몽돌해변치고는 돌이 좀 컸다. 20여 년 전 선착장이 생기면서 바닷물 흐름이 바뀌어 작은 돌들이 파도에 쓸려가고 호박만 한 큰 돌만 남은 탓이다.


유람선에는 70여 명의 승객이 타고 있었다. 배가 움직이자, 해설사의 구수한 입담도 시작되었다. 바위와 바람과 파도가 함께 빚어낸 절경이 펼쳐졌다. 깎아지른 듯한 붉은빛 절벽에 크고 작은 소나무가 늠름히 서 있고 여름이면 사이사이 원추리꽃이 만개해 섬 전체가 색동옷 같다 하여 조선 시대에는 홍의도라 불렸다고 한다.  


절경 중 단연 으뜸은 독특한 형상을 한 기암괴석들이다. 칼바위, 남문바위, 석회굴, 거북바위, 부부탑 등 하나를 보고 감탄하고 나면 또 다른 절경이 펼쳐져 앞의 것을 잊어버리게 되는 두 시간의 여행이었다. 특히, 섬 북쪽을 지날 때는 2구 마을을 한눈에 바라보며 우리가 묵었던 민박집 위치를 가름해 보았고 등대에서 멀리 바라보았던 독립문바위를 여러 각도에서 살펴볼 수 있었다.


이제 홍도를 떠날 시간이 다가왔다. 꼭 한 번 와 봐야겠다고 다짐한 지 40여 년 만에 찾은 홍도. “우리라고 새로 번듯한 집을 지어 살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겄소. 그래 봐야 아이들이 들어와 살 것도 아이고 우리가 여기서 얼마나 살지도 모르고.” 이십여 가구도 안 남은 홍도 2구 마을 민박집 아주머니의 말이다. 10년 후의 홍도를 상상해 본다. 사람 사는 냄새가 빠진 단순한 관광지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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