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말레이시아행 비행기에 몸을 싣다.

[중동에서 동남아 현장으로]

by Oldies but Goodies

1988년 9월 이라크에서 돌아온 나는 본사 해외토목사업본부에 배치를 받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라크에서 모셨던 소장님으로부터 부름을 받게 된다.


이라크 최남부의 바스라 항만공사에 나가서 같이 근무를 해보자는 말씀에 나는 얼떨결에 그렇게 하겠다고 말씀을 드렸고 즉시 바스라 항만공사 준비팀에 속해 사전 준비를 하게 되었다.


전편에서 말한 대로 이라크에 처음 나갈 때는 25세였지만 본사 복귀 후에는 30세가 되어 결혼에 대한 고려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이라크에 나가기 전 소개팅을 몇 번 하고 귀국 다음 해인 1989년 결혼을 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결혼을 해도 현장에는 가족과 함께 나갈 수 없었던 시절이라 이라크에 다시 부임해야 하는 상황에 나는 많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러던 중 1990년 8월 2일 예상치 못하게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는 걸프전이 발발하고 전쟁이 격화됨으로 인해 이라크 항만공사는 취소가 되어 나는 다시 해외토목사업본부로 복귀를 하였다.


그런데 들어는 보았는가?


신혼의 남편은 부인이 아기 낳는 것도 보지 못하고 해외 현장에 나갔다가 8개월 혹은 1년에 한 번 휴가를 들어오게 되었고 몇 년의 근무 기간 동안 아이는 커가면서 아버지를 자주 보지 못했기에 휴가 때마다 “저 아저씨 누구야?”라며 엄마 뒤에 숨어 낯을 가렸다는 그 전설 같은 슬픈 이야기 말이다.


당시에는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사의 땅에서 산업의 역군으로서 역할을 감내했던 그 시절의 아버지들과 그 어려운 상황을 이겨 내신 어머니들께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어쨌든 개인적으로 전쟁과 무슨 인연이 있는지 걸프전 발발 3개월 전, 이라크의 수도인 바그다드에서 시작하여 남부 바스라까지 (Basra) 연결하는 고속철도공사 사전 조사팀으로 2주일 간 (1990년 5월 11일 ~ 24일) 이라크 출장을 다녀오게 되었다. 아래 사진은 출장 당시 이라크의 입국 비자이다.



현장 답사를 마치고 본사 복귀 후 2개월 지난 시점에 걸프전이 시작되어 본사에서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는 내가 결혼을 한 상태라서 전쟁 발발 소식에 더욱 놀랐었다.


하마터면 이라크 땅에서 전쟁을 다시 겪으며 ‘출 이라크기’를 쓸 뻔했다.


앞서 말한 대로 걸프전은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시작되고 다국적군의 투입으로 1991년 2월 28일 다국적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막을 내린다.


어쨌든 해외토목사업본부 복귀 후, 나는 말레이시아, 이라크, 러시아 등 여러 국가에서 발주되는 공사의 입찰 준비를 하게 되었다. 그중 하나가 말레이시아 항만공사였다.


내가 속해 있던 팀은 밤낮으로 그 프로젝트에 집중한 결과, 미화 2억 3천만 불 (현재 환율기준: 3천2백억 원) 규모 해상공사의 최종 협상 대상으로 선정이 되어 발주처와 Nego Meeting을 위한 말레이시아 출장이 잦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함께 입찰 준비를 하였던 차장님이 나에게 “영업과 견적에 참여하여 공사 파악이 잘되어 있으니 공사 계약을 하고 나면 현장에 부임할 생각이 있느냐?”라고 물어보셨다.


나는 당연히 나가겠다고 하였다.


지금이야 자신의 의사를 충분히 나타낼 수 있지만, 당시에는 묵시적으로 회사에서 원할 경우 특별한 사유가 없다면 해외현장 부임을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 시 하는 분위기였다.

더욱이나 한번 중동 현장에 발을 들이면 동남아시아 현장에는 갈 수 없다는 속설이 불문율처럼 돌고 있을 때라서 중동보다는 환경이 좋은 동남아현장으로의 부름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시간이 흘러 공사는 계약에 이르게 되었고 지난번 이라크 항만공사처럼 본사 지하에 말레이시아 항만공사 준비팀이 결성되어 사전 준비를 하고 있던 어느 날 희소식이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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