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시

오늘 나는 _ 심보선 _ <슬픔이 없는 십오 초> _ 문학과지성사

by 이은표











오늘 나는 _ 심보선



오늘 나는 흔들리는 깃털처럼 목적이 없다

오늘 나는 이미 사라진 것들 뒤에 숨어 있다


태양이 오전의 다감함을 잃고

노을의 적자색 위엄 속에서 눈을 부릅뜬다

달이 저녁의 지위를 머리에 눌러쓰면 어느

행인의 애절한 표정으로부터 밤이 곧 시작될 것이다


내가 무관심했던 새들의 검은 주검

이마에 하나 둘 그어지는 잿빛 선분들

이웃의 늦은 망치질 소리

그 밖의 이런저런 것들

규칙과 감정 모두에 절박한 나


지난 시절을 잊었고

죽은 친구들을 잊었고

작년에 어떤 번민에 젖었는지 잊었다


오늘 나는 달력 위에 미래라는 구멍을 낸다


다음 주의 욕망

다음 달의 무(無)


그리고 어떤 결정적인

구토의 연도


내 몫의 비극이 남아 있음을 안다

누구에게나 증오할 자격이 있음을 안다


오늘 나는 누군가의 애절한 얼굴을 노려보고 있었다

오늘 나는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됐다




_ 슬픔이 없는 십오 초 _ 문학과지성사 _ 2008













시집들에서 기워 쓰는 말들이 많아진 걸 느꼈다. 마치 누더기처럼. 아마도 심보선 때문이다. 그는 아는 말들을 번거롭게 엮는다. 손끝에 걸리는 까끌한 매무새가 우리의 시선을 끌고, 익숙한 면의 왼쪽을 보게 한다.



이미 '알고 있다'라고 생각한 말에서 낯선 모서리를 발견하면, 머릿속에 알람이 울린다. 그는 그렇게 우리의 생각을 훼방한다. 이해를 늦추고, 인식하는 시간의 차이를 만들어 부자연스럽게 만든다. 간격이 생긴다.



총이 나오면? 총을 쏘게 된다. 인간은 인식의 균열을 견딜 수 없다. 그래서 인식의 틈은? 채워야 한다. 밑을 알 수 없는 골짝에 현기증을 느끼고, 이내 환상으로 간극을 메운다고 정신분석학에서 봤던 기억이 난다. 혹은 그 반대



입 속에서 부드럽게 굴러가는 말들과 의미의 연쇄들, 그리고 운율을 통해서 않더라도, 그는 단어를 부싯돌처럼 튀겨서 의미를 증폭시킨다. 매끈한 단어가 부서지고 거친 단면들로 아무렇게나 쌓인 무더기처럼 보이지만, 그의 일은 구멍 나고 해진 말들을 일련의 행렬로 만들기.



사람은 낯익은 것들에게서 쉽게 정보를 얻지 못하게 된다고 한다. 안부를 건네는 사이, 집, 가구들, 그리고 오히려 가장 가까이에 있는 나 자신에 대해서는 더욱. 그래서 한걸음 물러섰을 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부재를 통해서도 느끼게 된다고 한다. 익숙한 것들이 낯선 배열로 나타났을 때에, 호흡은 도마 위에 올라간다. 탁탁 내려쳐서 깨트리고, 톱밥으로 옹이를 곱게 메운다. 거스러미를 찾아 손끝으로 섬세하게 느껴본다. 시인은 그런 것을 요구하는 것일까? 나는 잠시 고여서 침잠하다.



이해하려고 눈을 감고 중얼거리다가 정보와 생각의 웅덩이에서 허우적거렸다. 멍하니 글자들을 바라보다 어지러운 단어들이 사라지고. '오늘 나는'. 반복되는 제목, '오늘 나는'.



앞에 두 번, 끝에 다시 두 번 '오늘 나는'. 모래시계의 잘록한 목이 돼버린 중간의 '오늘 나는' 한번. 총 다섯 번의 '오늘 나는'. 중앙의 한 번을 모점으로 반향 하듯 구성된 말들을 훑으며 생각한다. 시인은 형식으로 이해하길 바랐구나. 혹은 그랬을까?



앞의 두 번 '오늘 나는'은 부유하고 흩어져 상실되는 관념들을 , 뒤의 두 번 '오늘 나는'에서는 거칠게 쓸어 모은 감정 같은 부산물과 함께 충동을, 중간의 '오늘 나는'은 누빔점이 된다.



나는 시를 다시 읽으며 차갑게 끓어오름을 느낀다. 붉은 실로 인물과 장소와 시간을 연결해 범인을 색출하는 범죄스릴러의 형사처럼. 행적의 불완전한 연속성에서 드러나는 실마리를 찾는 기분. 시인이 구성했으리라고 생각한 양식을 통해 바라본다.



많은 이들이 그의 말을 현학적이라 한다. 하지만, 때로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분석하려고 하기 때문에 놓치는 경우가 있다. 나 또한 단어 하나, 한 구절에서 많은 것을 길어 올리고 싶은 욕망이 크다. 그러나 다 알 수 없는 것이고, 오히려 제각각의 시선에 따라 의미가 부여되어 산란하기 마련이기에.



때로 흐리멍덩한 눈빛으로 뭉개져 윤곽정도만 시선에 어른거릴 때, 실루엣이 인식의 초점 위에 걸쳐지면서 우연히 보이는 것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말하고 싶을까? 나는 글을 읽으며 작가나 화자가 항상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엔 글이 스스로 주장하지 않아도, 인식보다 앞서 깨닫게 만드는 현상이 되기도 한다. 그가 올려본 것엔 법과 질서와 금기, 그가 바라는 것은 피흘림, 폭력, 사랑. 시인의 단상에 나는 뒤돌아 소금기둥이 되어 버렸다.



어떤 상태에 대해서 말한다면, 구체적 형질을 띄고 있지 않은 어떤 것들, 가령 생각이라든지 환상이라든지 꿈이라든지. 노력해도 명료해지지 않은 것들이, 어쩌다 아구가 맞아 철컥하는 소리를 내며 의미를 얻기도 한다. 시인은 부러 인식을 지연시켜 엉킨 타래에서 한가닥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인간성 혹은 삶의 주제 같은 것들로 치환한다(개인적인 생각). 마치 헤겔의 밤에서처럼(이것도 개인적인 생각)



모든 것들이 담긴, 그러나 탈각된, 그래서 의미/규칙/형식/형태로의 작용을 바라는 상태. 우리가 가능성을 이와 같이 말할 수 있다면, 어쩌면 대부분의 삶은 기묘하게 일관성을 띄고 있지 않을까? 가능성이라는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분투. 인정받고 싶은, 사랑하고 받고 싶은, 성취하고 싶은, 남기고 싶은. 이런 것들은 어쩌면 '의미'의 획득이라는 동일한 방향성을 가진다.



증오도 사랑도 폭력도 심지어 구토까지도. 그것은 침잠한 것들이 범람하는 것이다. 그렇게 모래시계의 위 쪽에 있던 모래들은 잘록한 목을 통과하면서 시간이란 흐름으로 계수된다. 의미는 그래서, 멈춰있던 것들에게 시간성을 부여한다. 우리는 도도히 흐르는 것을 관망하며 목가적이라든가 청연이라든가 혹은 무한한 나머지 인간이 가늠할 수 없는 숭고한 대상 같은, 그래서 기준선 바깥의 것으로 밀어내려는 습성이 있다. 그러나 흐르는 물은 바닥을 훑는다. 흙을 흩고, 모래를 쓸고, 돌을 깎고, 길을 틀고, 지형을 바꾸고. 그것은 변화이고 맥동하는 것이다. '할 수 있는 것'과 '알고 있는 것'은 영원성에 머물지만, 아주 단순한 표현, '하는 것'은 혹은 '하는 것을 통해'서 수육한다(incarnation).



이제 복잡한 생각들을 뒤로하고, 다시 문장을 읽으며, '오늘'과 '사랑'에 대해 생각해 본다. 누구나 살고 있는 시간대를 지칭하는 표현과 누구나 하고 싶은 것의 표현을 병렬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