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시

화강암1 _ 이성부 _ <야간산행> _ 창비

by 이은표











화강암 1



이 바위에서는 낯선 정신의 냄새가 난다

견고하면서도 또한 부드러운 외로움의 냄새다

떠도는 넋들이 여기 잠시 머물다 간 때문인가

그들의 남은 옷자락 퍼덕여 바람 일고

바람은 더 큰 바람 불러들여

나를 망설이게 하거나

벼랑 아래로 밀어 뜨리려 한다

나는 그러나 이런 때일수록

거부의 어깨를 껴안는 버릇이 있다

바위여, 우리나라의 높은 살갗인 바위여

나는 비로소 그대에게 매달려 나를 부숴뜨리고

그대 몸에 나를 비벼 나를 다시 눈뜨게 하는구나

가벼이 가벼이 귀기울이면

바위여, 그대 살결에 도는 더운 핏줄 소리

뜨거워진 우리 한 몸

상처를 지니고서야 내 그대에게 이르는 길 알았으니!




_ 야간산행 _ 창비 _ 1996











요즘 또 시 읽는 거 트렌드라던데 아닌가요? 지났나? 제가 뭘 몰라서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요즘 나오는 시들은 제 취향과는 조금 맞지 않는 듯합니다. 그래봐야 시 코너 가서 고작 신간 훑어보는 정도의 일천한 소양이지만.



아무튼 역사가 격동하는 시대를 맨살로 부대낀 사람들의 언어에는 응축된 시간이 첩첩 쌓인 묵직함이 있고,

관념적 언어이기에 뭉툭할 것 같지만 엷고 벼려져 있어서 서늘하게 신체가 꿰뚫리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오늘은 이성부 시인의 '화강암1'



사실 자연에 대해서 말하는 시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등산에 목메는 시인이라니. 심지어 시집 이름도 [야간산행] '바위타기'라는 제목의 시가 7편이나 되고 '화강암'이라는 제목의 시가 11편이나 되는 지독한 고집이 느껴지는 목차입니다. '00상사' 같은 제목의 꽁트에 맞는 향취를 가진 연식 있는(1996년) 시집인 거죠.



그러나 시의 도입부에서 반할 수밖에 없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 바위에서는 낯선 정신의 냄새가 난다 / 견고하면서도 또한 부드러운 외로움의 냄새다"로 시작하는 첫 구절, 무생물인 암석에 대해서 도저히 납득해 버릴 수밖에 없는 형이상학적인 표현이 어떻게 가능한 건가! 감탄하게 되었거든요.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화강암. 용암이 땅 속에서 서서히 굳어서 만들어진 암석. 요즘은 용암이라는 말을 잘 쓰지 않나? 낯선 단어로 느껴지네요. 아무튼 지표로 나온 현무암 같은 화산암도 있지요. 구멍이 숭숭 뚫려서 가벼워진 그래서 때론 경쾌한 느낌마저 드는 돌. 이 용암이 흘러서 바다와 만나고 파도와 부딪히는 흔들리는 경계를 보여주고 성기게 굳어버려 그 자체로 역동상의 표상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냥 제 생각입니다.



그에 반해 화강암이란 땅 속 깊은 곳에서 높은 온도로 융해된 암석이 지구의 자전 등에 의해서 타성적으로 흐르다 멈추고, 장구한 시간을 통해서 서서히 굳어가는 모습으로 그려집니다.(이것도 제 생각)



오랜 시간을 버틴 사물에 대해서 인간은 인격을 부여하곤 합니다. 그건 세계를 명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었겠죠. 세상이 구성된 원리들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은 그들이 보존하는 한의 역사에서 가늠된 몇 가지 단면들, 그러나 그것은 엄밀한 법칙으로 수렴되지 않기 때문에 다면적으로 관측되고, 결국 내분하고 갈등하는 유사-인간성으로 매만져지는 거죠.



과거 인류가 자연에 대한 단상들, 그리고 그 사이의 간극에 대해서는 허구적인 것들로 메꿔버리며 인격으로 치환할 수밖에 없었다면, 근래의 인간은 과학의 폭발적인 발전에 따라 이런 환상으로 구성된 껍질을 벗기게 됩니다. 다시 거품 싹 빠지고, 대상자체를 보게 되는 거죠.



과학적인 시각으로, 대상의 구성단위를 낱낱이 들여다보는 이 시각은 자칫 건조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충왕전(벌레싸움) 같은, 나무의 수액을 빨아먹는 곤충들의 싸움을 보면서도 손발을 부르르 떨면서 흥분하는 게 인간 아닌가요?



그러니까 대상 자체를 자세히 알게 되는 밀도 높은 과정/시간이 우리로 하여금 경탄을 자아내게 한다는 거죠. 객관적인 그러나 서로 다른 볼륨의 정보들을 토대로 저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볼 때에, 사람들의 입맛만큼이나 다양한 빛이 대상에 부딪쳐 산란하는 어지러움이, 오히려 깊고 아름다운 사유로 우리를 이끌곤 합니다.



큰바위얼굴이라든지, 울산바위 같은 '돌'에 설화적인 관점은 이제 한편에 두고, 다시 보는 화강암이라는 것. 고작 지표 몇 미터 위아래에서 생의 모든 시간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종의 감각 바깥, 이 대지의 흑암 같이 깊은 곳에서, 헤아릴 수 없이 유구한 시간이 굳어 만들어진 화강암이라는 것은, 고작 백 년이라는 한계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관점으로 해석할 수 없는 낯선 시간대를 살아가는 암석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이성부 시인이 '낯선 정신의 냄새가 난다'고 말하는 문장이 '견고, 부드러운, 외로운'이라는 수식어를 통해서 짜릿하게 이해가 되는 거죠. 인간에겐 너무 높은 온도이기에 체감할 수는 없지만 녹아 버린 암석이 '대류한다'는 부드러운 감각, 고립된 심연으로부터 오는 가상의 감각과 시간성, 서서히 결정화되어 높은 경도에 이르는 굳건함.



몇 자 더 붙이면, 시인은 또 무엇에 경탄하고, 인간에게 무엇을 바라는 가에 대한 생각까지도. 오욕칠정으로 얼룩진 사바세계에서는 맡아볼 수 없는 인간성, 오히려 저 멀리 소실점처럼 우리가 추구하지만 가까워지지 않는 오연한 인간성에 대한 기대를 저 암석의 특질들을 디딤돌 삼아서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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