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시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 _ 유희경 _ 문학과지성사

by 이은표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



어떤 인칭이 나타날 때 그 순간을 어둠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 어둠을 모래에 비유할 수 있다면 어떤 인칭은 눈빛부터 얼굴 손 무릎의 순서로 작은 것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를 내며 드러나 내 앞에 서는 것인데 나는 순서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사실은 제멋대로 손 발 무릎과 같이 헐벗은 것들을 먼저 보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인칭이 성별과 이름을 갖게 될 때에 나는 또 어둠이 어떻게 얼마나 밀려났는지를 계산해보며 그들이 내는 소리를 그 인칭의 무게로 생각한다 당신이 드러나고 있다 나는 당신을 듣는다 얼마나 가까이 다가왔는지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 _ 유희경 _ 문학과지성사 _ 2018











사람들은 저마다의 취향이 있고, 제멋대로 시집을 선택하는 기준을 가지고 있을 텐데요. 저는 그 고민의 과정을 반복하면서 아주 심플한 기준을 만들었습니다.



1. 시집의 이름이 마음에 드는가

2. 시집의 이름과 같은 제목의 시가 시집에 있는가

3. 그 시가 맘에 드는가



이 3가지의 조건에 부합하면 우선 구매합니다. 때로는 이름이 맘에 든 시집이 2번에 부합하지 않더라도, 시집의 이름과 연결되는 내용의 시가 있고, 그 시가 마음에 들면 구매합니다. 마지막으로 1,2,3번 모두 맞지 않아도 훑어봤을 때, 취향 혹은 언어의 양식이 마음에 들거나, 맘에 드는 시가 두세 편, 아니 사실 한편이라도 있으면 구입합니다.



하지만 우연히 손에 잡힌 시집에서 마음에 드는 시를 2, 3편은커녕 1편 발견한다는 것도 정말 드물고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이미 맘에 들었던 시인의 시집을 사게 되고, 까먹고 이미 샀던 시집을 또 사고, 교보나 영풍 같이 큰 서점이 아니라(거긴 인기 있는 시집은 다 재고가 없음) 대학서점이나 지역의 거점으로 있는 서점을 방문하면 손이 덜 타서 재고가 좀 남은 시집 코너를 꼭 훑어보게 됩니다.



오늘 꺼낸 시집은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이라는 이름입니다. 이 시집에는 동명의 시가 2편이나 있고(저희 집 책장에도 2권이 있습니다. 그만큼 제목이 섹시하거든요) 그것도 각 챕터의 각 맨 앞에 배치한, 뭐랄까? 터프한? 혹은 가식 없는? 그런 속 시원한 느낌이 드는 시집입니다.



지인이 말하길 시인들은 시의 배치에 대해서도 골몰한다고 하는데요(시인에게 들었다고 함). 자신 있는 시를 맨 앞쪽에 두는 사람, 중간에 두는 경우, 맨 뒤쪽에 두는 경우, 그리고 맨 뒤쪽 조금 앞에 두는 경우가 다 나름의 의미가 있더라고 합니다. 물론 그렇지 않을 수도 있고 나름의 서수법이 있겠죠. 앞서 언급한 기준으로 시집을 선택하는 저에게, 이 시집은 몸 쪽 꽉 찬 직구 같은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이런 경우엔 목차를 훑으면서 벌써 기분이 좋아지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거기에다, 나름 종교계에 살짝 발을 담갔던(상당히 비주류) 저의 관점에서 볼 때, '신'이라는 단어에 '잠시'라는 부사를?! 그것도 '우리에게'라는 한정적인 방식으로? 보통 신은 '영원성'과 '무소부재' 혹은 '무한성'으로 정의 내리는데, 시인은 의도적으로 정반대 편에 위치한 말들을 통해서 반박하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신을 설명할 때에, 이토록 과격한 표현의 조합을 만들어 내는 그 상상력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시인들은 대체로 언어의 구사와 단어들 그리고 문자에 대한 집착이 대단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 의미를 정리한 개인사전을 만든다든지, 옛 표현이라든지 순우리말이라든지, 맞춤법이라든지 취향에 따라서 자기 공부의 길을 틀겠죠. 그런 여러 길 중에, 뭐랄까, 언어를 해부하듯이 해체하고 낱낱의 의미들의 구성관계들에 대한 집요한 관심을 가지고... 아무튼 텍스트에 골똘한 사람이라면 발 디딜 수밖에 없는 그런 영역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과정에서 가끔 자신의 감각이나 해석하는 양식의 효용에 따라 이상한 전능감 같은 것이 가슴을 가득 채우기도 합니다. 인간의 사유와 그 도구 혹은 근간으로서의 언어체계 등에 대해 모두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은 생각에 도취되어 가면...... 저는 그런 사람들을 지독하게 글을 파먹다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저도 그 입구 어디쯤에 한 발 걸쳤던 거 같다고 생각하며 살았고요.



암튼 이런 부연을 너저분하게 늘어놓는 건 이 시인의 말들에서 그런 지독한 냄새가 아니, 그러니까 언어와 사유에 대한 끈적한 집착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킁킁거리다 보니 어디서 내가 좋아하는 냄새를 맡았달까....




'어떤 인칭이 나타나 때 그 순간을 어둠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 어둠을 모래에 비유할 수 있다면'




제가 시인의 사유를 오롯이 파악할 순 없겠지만, 어떤 대상에 대해서 우리가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가?'라고 질문한다면, 우리는 대상을 우리가 받아들인, 혹은 이해하는, 혹은 우리가 생각한 방식으로, 암튼 뭐가 되었든 그것을 있는 그대로 그 자체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감각이라는 것은 늘 오류투성이이고 인간의 인지라는 것은 편차의 스펙트럼이 넓어서, 내가 이해한 것과 네가 이해한 것이 차이가 나지만 우리는 이것을 똑같이 '의자'라고 부른 다는 것이죠. 내가 생각한 의자와 네가 생각한 의자는 같은 대상을, 같은 이름으로 부르더라도 서로 투사하는 의미가 다르고, 심지어 양측 모두 엄격한 관점에서는 실패일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애초에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니까 예?!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한 어떤 것은 항상 파악불가능한 이해 밖의 잔여를 남기고 있고, 그것은 통해서 재파악한다도 해도 인간의 이성은 언어는 대상에 무한히 다가가도 도달하게 될 수 없는 어떤 극한 같은 거죠.



그러니 시인은 위의 표현처럼 말한 것 아닐까요? 본문에 '어떤 인칭'이라고 표현한 것은 대상 혹은 존재의 모호성, 아무튼 뭔가 나타났는데, 심지어 시인은 '그것'이라든지 '너'라든지의 대명사조차 사용하지도 않고, 혹은 특정할 수 있는 명칭으로 구체성을 부여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대상에 대한 정보는 '순간'이라는 시간적인 표현으로 빗겨버립니다. 어둠이라는 것은 전형적인 파악 불가능성의 대상으로서, 또한 모래는 우리가 두 손으로 움켜잡을 수 없는 것에 대한 비유적 표현으로 볼 수 있을 테고요.




'어떤 인칭은 눈빛부터 얼굴 손 무릎의 순서로 작은 것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를 내며 드러나 내 앞에 서는 것인데'




그러니까 어떤 대상이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범위 안에 등장했을 때(시인이 '순간'이라고 표현한), 보통 그것을 알아차리는 순서가 있죠. 사람을 만나면 얼굴을 보고 누군지 이해하고 옷차림을 통해서, 자세를 보며, 그다음, 그리고 그다음, 하는 방식으로 나름의 순차로 서서히 파악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파악한 대상에 대해서 허구의 윤곽선을 그리고 그 내부에 우리가 취득한 정보와 판단들을 엮어서 채워나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 과정을 '무너져내리는 소리'라고 표현합니다. 무너져 내리는 것은 '와르르'하는 소리가 어울리지 않을까요? 어떤 대상을 인식하고 파악하는 과정에 대해서, 저는 엮고 채우는 '건축'의 과정이라고 생각하는데, 시인은 '붕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생각하면 우리가 무엇에 대해 안다(규정한다)는 것이야 말로 오히려 '있는 그대로의 것'을 훼손한다는 거죠. 우리는 인식하고 파악해서 머릿속에 규정한 대상이 '있는 그대로의 것'과 같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것은 나에게 포착된 일면이거나, 단면이거나, 단상일 뿐, '대상 그 자체'와는 결코 같을 수가 없다는 거죠. 그 간극이 있음은 결국 인식의 실패를 방증합니다. 위의 문장처럼, 가령 눈빛-얼굴-손-무릎의 방향성으로 인식하면 올바르게 파악한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할 수 있는데, 그건 대상을 마주하는 내 기준으로 편의적인 방식에 그친다는 것이겠죠.


이런 생각을 하고 보면, 인간의 감각이라는 것은 의외로, 대단히 '계열화'되어 있지는 않았잖아? 얼굴-손-무릎이라는 위에서 아래라는 수직적인 구도로 인식하는 것이 적절한 기준이겠지라고 생각해 볼 수는 있는데, 이것은 오히려 그럴 것이라는 상상일 뿐이라는 걸 고발합니다.




'나는 순서따위 신경 쓰지 않고 사실은 제멋대로 손 발 무릎과 같이 헐벗은 것들을 먼저 보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생각하자면, 우리는 오히려 나타난 대상을, 손-발-무릎 같은 제멋대로의 방식으로 조우하게 됩니다. '순서따위 신경 쓰지 않'고 산발적으로 무질서하게 접하게 됩니다. 오히려 인간은 그렇게 수용한 것들을 길고 짧은 시간 속에서 정립하는 것이겠죠? 이렇게 정립된 관념으로 '허구의 외관'을 만들어 씌웁니다. 그리고 다시 대상을 접하면, 그 생성된 관념을 통해서 대상을 수월하게 인식하게 됩니다. 그러니 '손-발-무릎'이라는 순서는 '헐벗은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대상과 조우하고 정립한 허구의 외관을 통해서 바라보게 되는데, 우리가 가진 의미나 판단이나 정의라든지 다양하게 말할 수 있는 '허구의 외관'을 걷어버리게 된다면 '어떤 인칭'은 나의 인식에서는 헐벗은 상태가 된다는 거죠. 헐벗다는 말은 그러니까 그 관념적인 베일에 덮히지 않은 상태에서 마주침을 말하는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일반적인 판단이라는 것은 가능한가? 우리는 상식적인 사고의 세계에서 살 수 있는가? 너와 나 사이에 공통의 이해가 존재하는가? 우리는 어떤 진리 공리 교리 윤리 도덕 상식 법 질서 등의 맞고 틀리고에 대해서 골몰하게 되는데, 우리는 과연 그것들과 그것들의 근거에 대해서 동의할 수 있을까?





'인칭이 성별과 이름을 갖게 될 때에 나는 또 어둠이 어떻게 얼마나 밀려났는지를 계산해보며 그들이 내는 소리를 그 인칭의 무게로 생각한다'




어둠이 어떻게 얼마나 밀려났는지라는 말은 참 감탄할 수밖에 없는 표현인지! 우리가 무엇에 대해서 'A는 B이다'라고 말하면서 관념을 형성한다고 하면, 사실 그 존재의 나머지 부분들, 그러니까 우리가 인지하지 못한 영역(어둠)이 우리의 인식(할 수 있는 것)바깥으로 밀려나버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 것만을 알고 이해하기 때문에, 우리 앞의 존재는 우리가 파악가능한 제한적인 시야에서만 존재하고, 그로 인해서 대상의 나머지 부분은 밀려난 어둠 속에, 우리의 인식 바깥에서 존재하게 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겠죠?



과연 우리는 친구를, 부모를, 아내를, 자식을 알고 있을까요, 아니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항상 내가 볼 수 있는 한으로 바라보고, 그것을 상대에게 투사하고, 기대하고, 실망 혹은 놀라워하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렇게 그만큼 밖에 볼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대상은/존재는 늘 우리가 파악불가능한 부분을 어딘가에 숨겨둔 것처럼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소리'는 무엇인가?! 인간이 가장 먼저 발달하는 기관이 청각이라고 한다던데, 그리고 죽음에 이르러 가장 늦게까지 작동하는 기관이 청각이라고 했던 거 같고. 아무튼 소리라는 것은 우리가 말이라거나 언어라거나 문자라거나 하는 어떤 구체성을 띄고 있는 파악 가능한 것의 바깥에 있는 신호를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혹은 그것까지 포함할 수도.



자세히는 몰라도 철학의 키워드 중에서 큰 줄기하나가 '존재'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들은 crying에 대해서 말하더군요. 이걸 비명이라고 할지 울음이라고 할지 애매하지만, 약간 본능적인 개념이라고 생각하고 생각했던 거 같아요. 우리가 고통에 처했을 때 말보다 원초적이고 직설적인 소통의 방식으로 어떤 존재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바로 '소리'라는 것이죠.



그러니 '그들이 내는 소리로 인칭의 무게를 생각한다'는 말은 우리가 기존의 생각들로 판단할 수 있는,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들려오는 소리의 크기로 판단한다는 거죠. 그 소리는 뭐다? 비명 아니면 울음. 혹은 원초적인, 본능적인, 그보다 더, 더, 더 내려가서 근원의 생물체가 내는 소리. 인간은 언제 그런 소리를 낼까요?



이쯤 되면 이제 그런 생각이 듭니다. 아니 왜 이렇게까지 지독하게 생각해야 할까? 우리의 사고라던지 혹은 판단 혹은 이성 같은 것들, 우리가 알고 있다거나, 전제라거나, 이성적이라거나, 당위적이라거나, 하는 어떤 기반들이 그렇게 잘못되었을까? 인간 일반이 암묵적으로 합의한 것일 텐데, 그런 것들에 대해서 마치 아무 의미 없는 양 부수고 깨트리는 일들은 무엇을 남겨주는가?



그런데 시인이 뭐 그런 것까지 신경 쓰나요? 지가 봤구만유. 똑똑히 이 두 눈으로 봤구만유. 하고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고명하신 사또 나리가 못 봤다고 하니까, 여기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고. 그리고 그 우리가 놓친 것들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한다고.




'당신이 드러나고 있다 나는 당신을 듣는다 얼마나 가까이 다가왔는지'




종국에는 '드러나고 있다'라는 말합니다. 이 말을 곰곰이 우물거리면 주체가 대상을 인지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표현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나요? 그것은 나-주체가 대상을 인식하고 파악하고 가늠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스스로 자기 자신을 우리의 감각범위 안으로 나타났다는 것을 말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고집스럽게 시인은 '당신을 듣는다'라고 말하는 것을 통해서 가시적인 것(명약관화한 인식의 수단)을 부정합니다. 그러니까 청각적인 대상이라는 것은 우리가 더듬거리는 방식을 통해서 접촉할 수 있는 것으로서 규정? 너머의 '있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걸....



그러면 이제 그럼 왜 '우리에게'이고 '잠시'이고 '신이었던' 것인가? 제목에 대해서 생각한다면, 만약 제목을 뒤집으면 '우리'가 아닌 '모두'가 될 것이고 '잠시'가 아닌 '영원'이 될 것이고 '신이었던'아 아니라 '계속해서 신'이라고 말해 볼 수 있겠죠. 제가 또 신학을 공부해서 아주 조금 아는 척할 수 있는데, 신에 대해서 말할 때, 빠지지 않는 게 전지, 전능, 무소부재, 영원성 등등의 속성입니다.



이 시의 제목을 뒤집으면 이게 바로 신에 대한 표현이 된다는 것을... 그 신이라는 것은 보편/단일신 신앙체계에서 보편자로서 신에 대한 사고를 이야기하는 거죠. 그럼 결국 우리가 '신'이라는 말로 규정하고 있던 것을 뒤집어서 그것에다가 시인은 신적인 것(신'이었던'것이니까, 놀랍게도 과거형)이라고 재-명명한다는 것이죠. 법적인 지위 바깥, 이성적 판단 바깥, 시각의 바깥 어둠. 우리에게 보이지 않고, 어쩌면 불가해한 소리로 들리는 대상.



길지 않은 글에서 수없이 굽이치며 도달한 종착점에서, 이제 '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우리를 끌고 갑니다. 의도적으로 우리의 가진 막연한 상식을 툭툭 꺾어버리며 시인이 걸음을 멈춘 곳에는, 아주 여리고 물렁한 살을 가진 인간. 당신과 나, 그리고 우리 안의 명멸하는 어두움(before 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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