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께 보내는 편지

512-42-338

by 꿈 공작소

아버지, 아버지께서 그렇게 황급하게 떠나신 지 참으로 오랜 시간이 지나갔지만, 이렇게 편지를 쓰는 것은 또 처음인 것 같습니다. 요즘은 연락을 취할 수 있는 방법도 많은데 아버지는 통신 기기 같은 것을 전혀 사용하지 않으시니 이렇게나마 편지로 소식을 전합니다. 떠나가신 곳에서는 편하게 잘 지내고 계시는지요? 그곳의 환경도, 아버지의 건강과 생활도 몹시 궁금합니다.


처음에는 떠나셨을 때 아버지의 빈자리가 엄청나게 크게 느껴져 삶을 이어나가기 힘들 것만 같았는데, 아버지의 존재가 곁에 없음에도 세월은 원래의 계획에 맞추어 흘러가고 있네요. 아버지에게 드릴 말씀은 아니지만 최근에는 저도 나이가 들어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몸으로 해야 하는 어떤 작업들은 살짝 버거워지기 시작했고요. 머지않은 미래에 아버지가 계신 곳에 찾아가서 대화를 나누며 회포를 풀 수 있는 시간을 상상할 때면 괜히 설레고 기분이 좋아집니다.


해마다 5월 12일이 돌아오면 하루를 힘없이 보내는 것 같습니다. 매일 하는 일도 집중을 할 수도 없고, 어쩐 일인지 무기력함과 공허함이 마음에 자리를 잡아 하루종일 헛헛하게 만드네요. 이런 현상은 비단 저 뿐만이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가 매년 5월 12일이면 겪는 것일 겁니다. 매년 찾아오는 우울이 파놓은 구덩이에 던져지는 하루. 잊고 싶지만 잊혀지지 않는 아버지가 떠나가신 그해 5월 12일의 불행은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또렷하게 기억되는 것이 신기할 따름입니다.


오래된 영사기를 돌려보듯 그날을 기억해 봅니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같이 소나기가 퍼붓던 5월의 저녁. 참으로 생경했던 아버지의 이른 퇴근과 마치 이별을 조금이라도 늦춰보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느낌의 엄니의 외출. 온 가족이 오랜만에 즐겨보는 함께하는 저녁식사와 가족회의. 어느 한 순간도 기억의 소멸의 방으로 밀어 넣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살고 있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기에. 그마저도 잃어버리고 나면 이 세상 누구도 기억해주지 않는 영원히 사라질 기억이기에...


아버지가 가신지 벌써 42년이 되었더군요. 참으로 긴 시간이 지났습니다. 아버지를 그렇게 보내고 제 삶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가장 큰 변화라고 하면 사람들을 대할 때 좀 더 진지하고 진실하게 대할 수 있게 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숙제를 하고 있던 제 머리를 쓰다듬으며 잠깐 다녀올게라는 말을 남기고 영영 떠나가신 분의 뒷모습은 마음속 깊은 곳에 칼처럼 박혀서,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모습도 마지막 모습이 될 수 있다는 불안감에 항상 진심을 다해 사람들을 대하며 살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변화는 아버지의 유언대로 온 맘과 정성을 다해 창조주를 찬양하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창조주의 큰 계획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왜 나는 아버지 없이 가족을 위해 빨리 어른이 되어야 하나하는 의문과 모두가 의지하던 가장을 일찍 데려간 창조주에 대한 반항만 가득했었습니다. 마치 탕자처럼 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후에, 아버지를 우리의 품에서 빼앗는 방법을 써서라도 우리 가족을 구원하기 위해 계획하신 창조주의 사랑을 비로소 알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유언처럼 당부하신 말씀대로 엄니는 권사님으로 또 저희 삼남매도 각자가 맡은 자리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며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노력하며 살고 있습니다.


2024년 5월 12일은 주일이었습니다. 아침에 예배준비를 하고 있던 중 문득 아버지 생각이 나더군요. 아버지는 우리에게 중학교 때 예수님을 영접하셨다고 하셨지만, 아버지가 교회에 예배를 드리러 가는 모습을 본 적도 없고, 기도를 하는 모습도 본 적이 없기에 혹시 사도 바울의 걱정처럼 아버지가 우리 구원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고 버려진 것은 아닐지 하는 걱정이 들었습니다. 확인할 방법이 없기에 답답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교회에 갔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예배 첫 찬양이 찬송가 338장이더군요. 아버지께서 가장 좋아하는 찬양이라 매주일 아침 겨울에 찬바람도 마다하지 않고 창문을 열어놓고 부르셨던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이라는 찬양. 제게는 그 찬양이 우연이 아닌 아버지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확답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천국에서 잘 살고 계시는 아버지의 소식을 자비하신 창조주께서 제게 전해주셨다고 믿습니다.


이제는 얼굴을 기억하려 해도 애를 써야 기억되는 아버지. 보고 싶습니다. 아직도 살아 계셨다면 테니스장의 볼보이가 아니라 아버지와 대등하게 경기를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이제는 아버지가 연로하셔서 힘이 들까요? 저도 머지않은 미래에 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갈 것입니다. 그때 만나서 그간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나누며 아버지의 존재를 다시금 느껴보고 싶습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아버지를 그리워 하는 큰 아들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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