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국립 미술관인데 너무 만만하게 봤다.
바르셀로나에 도착한지 벌써 6일 차가 되었다. 이제는 시차도 완벽하게 적응을 했고, 동네 골목길도 익숙해졌으며, 지하철 노선은 손바닥 보듯 훤히 꿸 경지에 이르렀다.
오늘도 동네 카페를 하나 찾아 아침을 먹으며 하루를 시작했다. 골목골목 자리를 잡고 있는 작은 카페를 찾아 커피향을 맡으며 아침을 여는 것도 행복이었다.
바르셀로나 여행 첫날 들렀던 몬주익 언덕을 다시 올랐다. 걸어서 오른 것은 아니고 이번에는 아침 일찍 출발해 버스를 타고 도착했다. 분주하게 아침을 준비하는 바르셀로나 현지인들을 바라보며 전지적 시점으로 세상이 열심히 돌아가고 있음을 한껏 누렸다.
사그라다 파밀리아가 보이는 언덕을 조금 오르다 보면 에스파냐 광장 (Plaça d'Espanya)이 보이는 미술관 앞 광장이 나온다. 국립 카탈루냐 미술관은 1929년 바르셀로나 만국박람회 당시 사용했던 전시관을 1934년에 개조해서 미술관으로 개관한 것이라 그런지 건물이 고풍스럽다.
어찌하다 보니 또 오픈런을 하게 되어 광장에 앉아 문 열기를 기다리며 광합성을 하고 있었다. 그때 어떤 아저씨 하나가 나타나더니 자리를 깔고 기타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아저씨 연주 솜씨가 장난이 아니다. 은은한 듯 화려한 듯 기교를 마음껏 부리는 아저씨. 특히 연주곡이 우리가 아는 팝송이라 따사로운 바르셀로나의 아침 햇살 아래 참으로 여유 있는 시간을 보냈다. 미술관을 돌아보지 않더라도 벌써 여행 만족도 100%에 이를 정도였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냥 연주를 듣고 팁만 주고 미술관 건물을 배경으로 인증샷을 찍고 돌아가느냐.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그런 식으로 여행을 할 것 같으면 우리는 아예 계획에 집어넣지도 않는다. 그런데... 이 계획에서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었는데... 그래도 나름 국립이라는 이름이 들어가는 미술관을 너무 만만하게 본 것 같다. 입장을 해서 지도를 펴는 순간... 우아. 이거 한두 시간으로는 안 되겠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이 미술관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중세 로마네스크 전시실을 찾았다. 그중 가장 유명하다는 산 클레멘트 성당 벽화(Sant Climent de Taull)를 마주하게 되는데 카탈루냐 문화유산 복원 운동 일환으로 복원이 된 벽화로 색상이며 인물의 개성이 참으로 돋보였다. 800년이나 된 벽화라고 생각하기에 꽤 선명했다.
전시실에서 만난 굉장히 특별한 십자가 위의 예수님 (Majestat Batlló). 어찌 보면 살짝 동양적이고, 어찌 보면 이슬람 문화권의 영향을 받은 것 같기도 한 나뭇조각상이었다. 12세기 카탈루냐 예수님 조각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전시관 한쪽에는 바르셀로나의 수호성인 성녀 에우랄리아의 그림도 한 점 있었다. 보통 십자가와 달리 X 형태의 십자가에 매달린 것이 특이했고, 그녀에 대한 공부를 좀 해보니 어린 나이에도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모진 고문과 형벌을 견뎌냈다는 것에 숙연해졌다. 나라면 그런 고문과 형벌을 거쳐야 한다면 과연 믿음을 지키는 것이 가능할까? 하는 질문을 하게 만들었다.
로마네스크 전시실을 떠나 고딕 전시실로 향한다. 동관에서 서관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거기에 기사 갑옷이 하나 서있었는데, 가까이서 들여다봤더니... 이런 된장. 얼굴이 들어있네. 니 눈깔이 더 무습다! 식겁했네.
또 하나의 미술관 소장 명작이라는 의원들의 성모 (Virgin of the Councillors). 왕실에서 파견된 Lluís Dalmau라는 화가가 시청 예배당을 위해 그린 작품인데, 유화라는 형식과 기법, 그리고 그해 다섯 명의 의원이 실물 크기로 그려진 구상적 공간의 뛰어난 환영 효과 등으로 카탈루냐 작품 중 가장 획기적인 작품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고딕 전시실에는 성화가 많이 있었는데, 역시 아는 내용들이 있으니 괜히 어깨가 들썩들썩. 이 작품은 요한복음 2장에 나오는 장사꾼의 상을 엎으신 예수님을 그린 것이다. 평화와 사랑을 주장하던 예수님이 거룩한 회복을 위한 의로운 분노를 표현한 것이다. 보통 예수님은 하얀 옷을 입은 것으로 그려지는데 빨간 옷을 입은 모습이 특이했다.
다음 전시실인 르네상스와 바로크 미술로 넘어가 본다.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은 것 같은 느낌의 성 가족 (Sagrada Family)을 만나고...
선한 눈빛이 마음에 들었던 이 미술관의 또 다른 명작인 Domenikos Theotokopoulos의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Christ Carrying the Cross)도 조우하고,
아르메니아에 선교를 갔다가 가죽이 벗겨지는 형벌을 받고 순교한 바돌로매의 눈빛도 마주했다. 바돌로매는 아르메니아 선교 여행 때 더욱 알게 되어 친근함이 남아있는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다.
그리고 어멋! 이 찰떡같이 잘 어울리는 리본 단 아저씨는 뭐야. ㅋㅋㅋ
전시실도 많고 작품도 많아 대충 돌아보는데도 꽤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전시실이 끝이 나는 곳에 Oval Hall이라는 곳이 나온다. 엄청나게 큰 콘서트홀을 방불케 하는 곳이었다. 근사하게 생긴 파이프 오르간도 있는데 오늘 저 오르간의 연주를 들을 수 있는 가능성은 전무해 보였다. 그래서 일단 음료를 시키고, 홀의 중간쯤 놓여있는 테이블에 앉아 진주조개 잡이 (Les pêcheurs de perles)를 감상했다. 여행 중간에 마주하는 이런 여유 아주 마음에 든다.
이번 여행의 테마가 여유의 미학이라고 하지만 이제 전반전이 끝이 났다. 후반전을 위해 다시 몸을 일으켜 본다. 1층에는 현대 미술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전시실이 무려 44개나 되기 때문에 작전을 짜야만 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미술관이 다수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는 Maria Fortuny와 Ramon Casas 작품 위주로 보기로 했다.
가장 먼저 만난 작품은 호안 미로의 그림의 공개 전시회 (Public Exhibition of a Picture)라는 것이었다. 나는 미로는 초현실주의적인 작품만 그린 줄 알았더니 피카소와 같이 초기 작품은 좀 제대로 된 그림을 그렸던 모양이다.
마리아 포르투니는 아주 짧게 활동을 했지만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카탈루냐 화가로 알려져 있다. 다양한 주제의 그림을 그린 것으로 유명하며 1860년 모로코 전쟁에 종군했을 때, 그가 추구하던 색채와 빛을 발견했다. 그리고 낭만주의에서 시작해 인상파로 변화하는 작품들을 남겼다.
이름이 마리아여서 혹시 여류 화가일까? 생각해 도슨트에게 물어보니 카탈루냐에서는 마리아노를 줄여 마리아로 부른단다. 여자가 아니고 남자인 것으로. ㅎㅎ 지식의 바닥이 드러남.
다음은 마리아 포르투니하고 비슷한 듯 조금은 다른 라몬 카사스 (Ramon Casas)의 작품들을 모아봤다. 스페인의 대표적인 모더니즘 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 그래픽 디자이너로,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카탈루냐 예술 운동에 큰 영향을 미친 화가다. 고양이가 들어간 포스터를 많이 전시해 놓았는데 부유한 사업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897년 네 마리의 고양이 (Els Quatre Gats)라는 선술집을 여는데 이 가게가 피카소를 포함한 젊은 화가들이 모이는 중요한 장소로 사용되었다. 여기에 저녁을 먹으려 예약까지 해놓았는데... 여행 방해꾼 짱구언니가 메뉴를 보여달라고 하더니 피곤하다며 다른 곳에서 먹자고 하는 바람에... 예약 취소까지 했어야 하는 바르셀로나 여행의 유일한 오점으로 남아있는 곳이다.
엄청나게 큰 전투 장면이 그려진 전시실과 여행 방해꾼을 지나고...
조각이 이렇게 청순하면 실물은 어떨까 궁금하게 만드는 조각상을 통해...
중앙 홀을 잠깐 찍고... 또다시 다른 전시실로... 우아... 너무 만만하게 봤다. 봐야 할 작품도 엄청 많고 전시실도 너무 많다.
가우디의 인체 공학적인 의자도 만나고...
며칠 있으면 방문할 살바도어 달리의 작품도 몇 점 감상할 수 있었다.
조지아에서 태어나 바르셀로나에서 살다 죽은 올가 스카로프 (Olga Nicolaevna Sacharoff)의 작품도 하나 만나고...
피카소 미술관에서도 보지 못했던 피카소 작품다운 작품까지 돌아보았다. 감상할 수 있는 작품들이 너무 많아서 이 정도만 돌아봐도 선방을 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다음에 다시 바르셀로나를 찾을 일이 있다면 무료입장이 가능한 날 하루 오후를 잡아 온전히 투자를 해야 할 것 같다.
아주 풍성하고 다양한 작품들로 대뇌에 살을 무럭무럭 찌게 해준 고마운 미술관을 벗어났다. 원래는 계단식 분수와 밤이 되면 레이저 쇼를 하는 분수대가 유명한 곳인데 수리를 목적으로 물을 끊어 놓았다는 아쉬움이 있기는 했지만 만족한 나들이었다. 이제 숙소 쪽으로 돌아가 점심을 챙겨 먹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