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여행은 생존이다.
그저 여유를 즐기는 잉여의 시간이 아니라, 내가 살아 있음을 느끼고 증명하는 방식이다.
나는 여행을 사랑한다. 평범한 일상이라는 것에는 익숙함이 있지만 동시에 지루함이 공존한다. 그런 지루함에서 벗어나 삶의 에너지를 북돋기 위해서는 여행이 꼭 필요하다. 일상을 벗어나 미지의 세계에서 생존을 위한 모든 노력과 도전은 내가 살아있음을 자신에게 증명하는 시간이자, 나에게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는 소중한 과정이다. 하지만 삶의 가치에 행복 한 스푼을 더해주는 여행임에도 불구하고 여행에 나서기 전까지는 극도의 강박증에 시달려야 하는 이중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스트레스를 가장 많이 주는 직장에서 벗어나기 위해 떠나는 여행인데 두고 온 업무를 걱정하기도 하고. 집에 두고 가는 두 냥이가 잘 있을까 걱정을 하기도 하고 (둘 다 길고양 출신이라 먹을 것만 있다면 생존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머릿속에서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그 외에 수많은 원인 모를 불안감에 휩싸여 며칠을 보내야만 한다. 여행에 대한 불안감과 낯선 세계에 대한 설렘이 공존하는 내면의 시간. 마징가 제트의 최악의 빌런 아수라 백작처럼 상반된 감정들로 마음이 복잡하다.
보통 나의 여행의 시작은 사진 한 장에서 시작된다. 이탈리아의 친퀘테레의 사진에 반해 이탈리아 여행을 준비했고, 에펠탑의 낭만에 취해 프랑스 여행을 다녀왔다. 아직은 프사에 꽃을 쓰는 나이는 되지 않았지만 튤립과 풍차의 조화에 빠져 네덜란드도 다녀왔다. 이번 여행의 종착지는 스페인. 유일하게 사진으로 시작된 여행이 아닌 100% 짱구언니의 주장에 의해 결정이 된 여행이었다. 처음에는 마드리드로 들어가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를 돌아보고 바르셀로나에 머물다 미국으로 돌아오는 일정을 잡았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스페인이 그리 작은 나라가 아니어서. 북서부, 남서부 그리고 동부로 다 돌아보려면 이동을 하는데 하루씩을 오롯이 투자를 해야만 했다. 그렇다고 욕심을 부려서 수박 겉 핥기 식의 여행은 하기 싫고. 일정을 대폭 줄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가우디의 도시, 바르셀로나에서 전체 여행을 보내기로 결정을 내렸다. 커다란 대륙에 산 세월이 좀 되다 보니 다른 나라의 크기를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어 한참이 시행착오를 거쳐서야 여행 계획의 틀을 잡을 수 있었다.
계획을 세워놓고 여행을 기다리는 시간은 길고 지루하기만 하다. 하지만 휴가계가 승인이 되는 그 순간부터 여행은 현실이 된다. 제일 먼저 비행기를 예약하고 나면 일단 첫걸음을 뗀 셈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숙소 찾기와 렌터카 예약까지 마치고 나면 생존 가능의 기반들이 하나씩 만들어져 나간다. 이 모든 과정 중 숙소 찾기가 가장 힘든데 인간의 생존 조건인 의식주 중 하나가 바로 숙소이기 때문에 그렇다. 숙소도 그냥 아무 데나 결정을 할 수 없는 게 여행 중 가장 효율적인 동선을 짜기 위해서는 대강의 전체 여행 계획이 수립이 되어 있어야 가능하다. 숙소까지 결정을 하고 나면 일단 한 박자 쉬어갈 수 있는데 걱정이 끝이 난 것은 아니다. 숙소 근처의 치안이나 환경 등은 전혀 알 수 없기에 끊임없는 조사를 해야만 한다. 여행에 대한 기대와 혹시 실수라도 했으면 어쩌지라는 공포가 공존하는 순간이다.
여행 당일. 새벽 4시에 눈이 저절로 떠진다. 짱구언니의 투덜거림이 귓등으로 전해진다.
'또야? 잠 좀 자자.'
어차피 누워 있어 봐야 에너지만 소비할 뿐이다. 마음은 벌써 깨어났고, 몸은 마음이 이끄는 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다. 꼬링이가 인기척을 느끼고 침대 위로 올라와 애교를 부리기 시작한다. 물론 간식을 얻어먹기 위한 꼼수지만 나에게는 이 꽁냥꽁냥 시간이 소중하기만 하다. 꼬링이의 머리에 손을 얹고 우리 없는 열흘간 보호해 주시기를 기도한다. 우리가 멀리 가는 것을 감지했는지 오늘따라 꼬링이가 더욱 살갑게 다가온다.
출발 전 다시 여행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점검해 본다. 혹시 잊은 것은 없나? 지금껏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문제와 변수들을 생각하며 비행기를 타기까지의 일들을 그려본다. 항상 불행한 상상들이 끼어들지만 언제나 택시는 제시간에 나타났고 (지난번 출장에 나를 공항에 데려다주었던 아저씨가 나타났다. 근데 아저씨는 나를 기억하지 못했다.), 공항까지 아무 문제 없이 일사천리로 모든 일이 진행되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했던 변수가 생겼다. 보안 검색대에서 내 가방이 잡히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가방 안에 들어있는 뭉뚝한 칼이 장착된 와인 오프너가 문제였다. 버리고 가든지 아니면 무슨 서류를 작성해서 봉투에 담아 따로 부치고 바르셀로나에서 찾든지 하라는 것이다. 나하고 함께 거의 10년을 함께 여행을 한 녀석인데… 아쉽게도 이번 여행에 수명이 다한 와인 오프너를 공항에 고이 묻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이제 곧 비행기에 오른다. 필라델피아까지 다섯 시간의 비행과 바르셀로나까지 여덟 시간의 비행이 기다리고 있다. 일단 비행기를 타면 몇 시간 동안은 나의 내면의 전쟁과 휴전을 선언할 수 있다. 좁은 공간에 갇혀 다른 일은 할 수 없으니 아주 집중된 나만을 위한 영화를 보는 시간이나 책을 읽는 여유 또는 잠을 잘 수 있는 혜택을 누릴 수 있다. 물론 도착하는 시간이 다가올수록 다른 불안함과 걱정이 가지를 치겠지만. 가장 큰 걱정은 필라델피아에서 주어진 시간이 1시간 15분 정도 되는데 필라델피아 공항은 처음이고 터미널을 옮겨야 하는 부담이 있다. 뭐, 영어가 되니까 안되면 물어보면 된다고 나를 다독여도 이 필요 없는 상상력은 머릿속을 계속해서 복잡하게 만든다.
이런 불안함을 감수하고 꼭 여행을 가야 할까? 파워 J라는 성향 때문에 모든 계획하게 이루어지지 않거나 뭔가 의심이 있어 불안하면 견디지 못하면서? 인터넷이 좋아져서 버추얼 여행을 통해 정보를 얻는 것이 가능한 시대가 왔다고 하지만 직접 현지에 가서 습득할 수 있는 정보하고는 천지 차이가 나기에 약간의 도움은 줄지언정 마음의 완전한 평안은 허락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내가 여행에 중독된 이유는 단순하다. 살아 있음을 느끼기 위해서다. 나에게 주어진 틀에 박힌 삶이 아닌, 내가 선택한 시간을 온전히 살아내기 위해. 그래서 나는 또 짐을 싸고, 길 위에 선다. 생존을 위해, 그리고 나라는 존재로 살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