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나짧은에세이라고나달고나할까 #1
쉽사리 남에게 길을 비켜달라 하는 것도 어렵고 말 거는 것도 어렵고 멋있게 인사를 받아치는 것도 어려울 때가 있다. 그렇게 흔히 말해 쿨하게 대처하지 못하면 남는 것은 하나, 쪽팔림 즉 수치심이다.
그리고는 그 쪽팔림 뒤에 후회가 붙어 결국은 자책에 길로 이어진다.
이 꼬리를 떼어내려면 앞 선 상황에서 쿨하게 행동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다시금 그 상황에 돌아간다해도 그렇게 쿨하게 대처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난 친구들이나 면식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파워 E이다. 하지만 처음 보거나 나보다 기가 세보이는 사람, 외국인들 앞에서는 깨갱 찐따가 되어버린다. 나의 찐따같은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 되려 눈을 좀 크게 뜨고 허르도 펴서 앉아본다. 얼굴에 미소도 없애고. 근데 왜인지 그 모습이 더 없어보인다.어떻게 이 마음에서 벗어날까, 벗어날까. 이 소심한 영혼에서 탈피 할 수 있을까. (아 이건 INFP의 자전적인 이야기일수도 있음.)
소심도 선천적 소심이와 후천적 소심이가 있다고 주장하는 1인으로서 난 선천적 소심이에 속한다. (최악이다. 후천적이면 안 소심했던 시절이라도 있을텐데 나는 그 마저도 없으니.) 남의 시선이 무섭고 소중하고 좋기도 한. 유미의 세포들을 보면 김유미의 기억 도서관이있다. 그걸 보고 든 생각은 아마 나의 기억 도서관에는 기밀도서가 엄청많을 것 같다는 거다. 소심이의 역사는 즉 흑역사이다. 말로만 기밀이지 그날, 그 순간의 기억을 깨울 수 있는 몇 마디 말로 금새 그 순간으로 갈수있다.
몇몇은 귀엽기도하다. 주문할때 잘못나왔는데 그냥 먹는다던지, 길을 비켜달라고 하기 무서워 뱃살을 최대한 집어넣어 지나갔다던지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다. 내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 모두와 늘 행복감에 쩔어사는 인간은 없을 것이다. 성악설에 힘을 보태자면 사람들은 누구나 내재된 악이 있다. 그 악은 복불복이다. 다른이에게 과도한 친절을 베풀지만 나에게만은 악의 모습을 드러낼 수도, 반대로 다른이들에게 악하게 행동하면서 나에게만 선의를 베풀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나에게 선의를 베푼다면 그 것은 행운이 되겠지만 많은 이들이 악을 베푼다. 어쩜 그 악은 교활한지 소심한 나를 잘 알아 조금의 여지라는 구멍을 남겨두고 영혼을 갉아먹는다. 그 당시에는 눈물이 머리 끝까지 차올랐지만 집에 돌아와보면 내가 잘못한건가, 내가 오해한 건가 이렇게 여지를 준다. 그래도 화가 나면 배게에 화풀이 하면서 그때 조금 더 논리적으로 말할걸 아님 하지말라고 할걸 후회한다. 달라지는 건 없는데 말이다. 그러고 난 후 결론의 방향들이 , 문제의 방향들이 나에게 향할 때가 많다. 나를 자책하고 어느새 그 문제의 주체는 희미해지고 소심하고 찌질했던 나만 더욱 선명해진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는게 편할 걸까? 아닌 것 같은데 왜 난 늘 빙빙 돌아 다시 돌아오는 걸까.
난 여전히 답은 모른다. 그냥 흘러간 일을 최대한 덜 엿보려고 노력할 뿐이다. 아직도 나의 영혼을 갉아먹었던 자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들이 한트럭, 아니 두 트럭이지만 성장했으리라 믿는다. 우리 모두 마음 속에 자신감이 숨어있을 테니까. 그 상황에서 이야기할껄 후회라도 한다는 건 앞으로 나가고 있는 날갯짓이라는 것 같다. 비록 하찮더라도.
아직도 나는 찌질하고 소심하다. 인스타 팔로워수를 신경 쓰고 나를 언팔한 이들을 찾고 감정상하고 열불도 낸다. 그래도 조금씩 그런 나를 사랑해보려한다. 모두, 누구나 찐따같은 면이있다. 그 면까지 귀여워하고 사랑한다면 비로소 나를 내가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