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훈자까 May 12. 2024

한계만큼 점프하기

<매듭> 매거진 기고글

조던피터슨은 그의 책 『 12가지 인생의 법칙 』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전지전능하고 어디에나 존재하는 절대자를 상상해 보십시오. 그런 절대자에게 없는 게 있 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참 어이없고 답이 없는 질문처럼 느껴진다. 모든 걸 가진 신이 우리같은 하찮은 인간의 어떤 것을 부러워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종류의 질문에 생각을 더해가던 어느날, 우연히 내게 다가온  영화는 힌트를 주었다. 다니엘 콴 감독의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가장 중요한 소재는 “멀티버스” 개념이다. 미래의 어떤 세계에서는 버스점프(verse jump)라는 기술을 이용해 다양한 멀티버스들을 미리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여러 멀티 버스에서 ‘나’였던 혹은 ‘나’일 수 있었던 여러 존재들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메인 빌런인 ‘조부 투바키’는 그 중 에서도 가장 점프버스 능력이 뛰어난 존재였기에 그녀는 그녀의 가능성을 모두 멀티 버스에서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 ‘뛰어남’ 때문에 모순적으로 자가당착에 빠진다. 그녀에게는 더이상 ‘점프’ 해야할 곳도 해야 할 이유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무’ 로 비유되는 베이글로 빨려들어가기로 결심한다. 이 영화를 통해 얻은 질문에 대한 답은 바로 ‘한계’ 였다. 어떤 존재가 이미 모든 것이고 어디에도 있다면 (everything, everywhere) 굳이 가야할 곳도 없고 굳이 뭐가 되려고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이 ‘한계’ 라는 건 고마운 일일 수도 있다 는 생각이 든다.한계를 직시할 수 있는 인간이어야 자신이 어디까지 점프 해야 하는 지 계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점프를 위한 방해물이 없는지, 점프 후 다시 발 디딜 곳은 있는지를 계산하고 그 누군가는 더 높은 곳에 올라가기도, 다른 누구는 흔들리는 발판을 밟아 저 멀리 떨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린시절의 우리라고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린시절 점프는 나에게는 재미있는 놀이이기도 했다.어릴 때는 우리 집 소파가 왜 그렇게 커보였는지 모르겠다. 그 좁은 소파에서 형과 펄쩍펄쩍 뛰며 술래잡기 놀이를 했다. 신나게 뛰다 지쳐 앉으면 언제나 같이 아랫집 노여사가 초인종을 누른다. “훈민 엄마 애들 뛰게 놔두지 말라니까요. 아래에서 다 들려요 ” 밥을 하다 말고 뛰쳐나온 엄마는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돌아서서 우리 장난꾸러기들을 혼냈다. 또, 초등학교 때 영어학원을 가는 길에는 아저씨가 트램펄린 장사를 하고 계셨다. 단돈 1000원만 내면 1시간 동안 신나게 트램폴린을 탈 수 있었다.. 트램폴린에는 이상한 매력이 있다, 내가 힘을 준 만큼 위로 올라간다. 그리고 위로 올라갈 때에는 더 높은 곳에서 평소에는 느낄 수 없는 벅참과 낮은 곳에서는 볼 수 없던 것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 시간만큼 은 내가 오늘 숙제를 안했다는 사실을, 그래서 학원에 가면 호되게 혼날 것이라는 현실에서, 내일 또 학원에 가야 한다는 사실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혼나면서 우리는 ‘뛰는 행위’ 자체를 멈추지 못할만큼 사랑했다. 이사를 하면서 트램펄린이 딸린 동네를 떠나고 나서부터는 점프는 내게 재미있는 일이 아니었다. 점프는 다른 이들보다 더 높게 올라가기 위한 경쟁수단이 될 뿐이었다. 그저 다른 이들보다 더 높게 뛰기 위한 나의 처절한 노력이 끝나고 뒤를 돌아봤을 때 나에게 남아있는 건 대학 합격증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었다. 무성영화 처럼 색채없게 흘러간 시간들이였다. 깊은 허무감과 공허함을 생각하면, 가끔 뉴스에 들리는 수능 성적을 비관하여 자살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거릴 만하다.


 우린 왜 그 많은 하늘의 공간을 두고 점프할 자리를 다투고 있는걸까? 불행했던 어린 시절 나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은 좋은 대학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대학 입학 이후 행복할 수 있는 방법 따위는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수능이 끝나고 나서야 나는 입시교육이 알려주지 않은 ‘스스로를 챙기는 방법’과 ‘자신을 좋아하는 일을 찾아가는 방법’ 등을 배웠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입시 교육은 입시 경쟁에서 이기는 방법을 앵무새처럼 알려줄 뿐 우리가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나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 점프를 참 사랑하는 나였는데 난 이제 더 높이 올라가는 것에 진절머리가 났다.


   이 현실을 영화에 대입해보자. 교육은 우리가 각자의 삶을 살아가기도 전에 여러 제한된 멀티버스를 실제처럼 우리에게 강요한다. 공부를 잘하거나 못하는 이원화되는 세계를 그럴듯이 보여주고는 무조건 전자를 강요한다. 그 이상을 기대할 수 없는 세상에서 우리는 ‘조부투바키’가 그랬듯 허무함과 끝없는 ‘무’에 좌절한다.’ 


    나를 그런 베이글에서 빼내주었던 건 수능이 갈라놓았던 두 이원화된 세계의 파괴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고 주장했던 헤르만 헤세의 말처럼 그 세계를 깨뜨리고 나온 나는 웃음도 희망도 많은 아이였다. 이제 더이상, 종이에 찍혀나오는 성적 따위가 나의 미래를 단정지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자 세상에는 배워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여전히 점프는 이전과 같이 내가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한 수단이였지만 누구보다도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나에게 더 높은 곳을 경험하게 해주기 위함이었다.결정적으로 더 이상 나는 단일한 성공이라는 목표를 위해 발돋움 하지 않게 되었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능력있는 사람이 되고자 발돋움하기도 하지만, 가끔은 마치 어린 시절의 트램펄린에서 즐겁게 놀았던 나처럼 그저 ‘즐거움’을 위해 뛰기도 한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의 빌런 조부 투바키와 같은 신적인 존재들에게는 없는 ‘한계’에 다시금 고마워진다. 우린 앞으로 어떤 것도(에브리씽) 될 수 있고 어디에도(에브리웨어) 갈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오늘은 불룩 튀어나온 내 배도, 삐죽삐죽 제멋대로 인 내 머리도 사랑하기로 결심한다. 쉽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렌터카를 예약하는 그의 빠른 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