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으며 말하는 사람
삶이 너무 어렵다.
스타벅스에 딱딱한 의자에 앉아 무거운 뱃살의 무게를 견디며 그렇게 생각한다.
손에 든 초콜렛은 너무 맛있고, 옆에 놓인 사회학 책은 너무 흥미로운데 말이다.
몇일 전에는 내가 살며 세 번째로 진심으로 믿었던 사람에게 연락이 왔다.
너를 아주 많이 사랑한다고, 그리고 너무 보고 싶다고.
그래서 얼른 너를 보러가겠다고. 뻔한 사랑고백일 수 있었던 이 몇마디의 말이
오늘따라 너무나도 무겁게 내게 들린다. 그건 나의 삶이 그녀에 의해 담보지어졌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 내 모든 것을 줄 수 있다는 것은 단순히 문학적 표현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사랑하는 어떤 이에게 모든 것을 내다 바친 사람에게는 아무 후회가 없다.
그렇게 해피엔드로 끝을 맞이하였다면 아무런 탈이 없었을 터인데 우리는 어떤 한 마을의
공주와 왕자가 아니다. 그렇게 공주와 왕자는 서로에게 모든 것을 주고, 바치며 행복하게 살았습니다~가 아닌 것이다. 공주는 어쩌면 이후에, 왕자에게 배신을 당하고 (혹은 반대일수도) 그들이 죽을 위기를 거치면서 믿었던 사랑은 어떤 날을 기점으로 증오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현실은 그렇다.
삶은 믿음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랑은 너무나도 쉽게 증오가 된다.
그리하여, 우리가 느끼는 감정과 정서 같은 것들 심지어 사랑일지라도, 우리가 가진 돈과 재산에 의해 결정된다고 굳게 믿었던 칼 마르크스의 말도 하나 틀린 것이 없다.
너를 아주 많이 사랑한다는 말에는, 나는 너를 아주 많이 증오한다고 썻다.
나를 너무 보고 싶다는 말에는 , 나는 매일 매일 꿈에서 너를 많이 본다고 썻다.
그래서 얼른 너를 보러가겠다고 하는 말에는 , 나를 보러오지 않아도 좋으니 이 고통에서 헤어나오게만 해달라고 빌었다.
그녀는 그럼에도 아직 해맑다. 해맑으니 좋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가끔 어떤 웃음은 사람의 마음을 뒤집어 놓을 수 있다는 것도 알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