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프랑스 혁명의 가장 추악함, 방데 학살
1793년부터 1796년까지 프랑스 방데(Vendée) 지역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납니다. 자코뱅이 주도하던 프랑스 혁명정부에 의해 반란이라고 명칭되어지고, 방데 지역의 사람들은 아이, 어른, 여성 할 것 없이 무차별적으로 학살당합니다.
인권의 역사에서 가장 성스럽고, 벅찬 사건이었던 프랑스 혁명 이후에 자행된 가장 추악한 민간인 학살이었습니다.
프랑스의 북서부에 위치한 방데 지역은 사실 프랑스 지역에서도 외진 곳이었고, 지금처럼 통신과 교통네트워크가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에 파리에서 혁명이 나든 왕이 죽든 하루하루 묵묵히 살아가던 이들의 마을이었을겁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기도를 드리고 빵을 굽고 농사를 지었겠죠. 마을의 교회는 농민들의 구심점이었고 성직자들은 농민과 함께 나누고 살던 공동체였습니다. 하루하루가 풍요롭지는 않아도 평화로운 날들이었을겁니다.
프랑스 혁명은 구체제를 타파하고 민중의 힘으로 일어난 체제라며 환호했지만, 유럽의 여러 왕조들은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해서 꼴사나운 혁명정부에 선전포고를 합니다.
혁명정부는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 세금을 더 부과하고 프랑스 모든 지역의 남성을 징집하기 시작합니다.
방데 지역에까지 혁명군의 폭압이 전해지자, 농민들은 이를 거부합니다. 혁명정부는 반혁명세력이라 규정한 교회와 성직자들의 농간일것이라 생각하고 방데지역의 교회를 파괴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방데의 공동체였습니다. 방데 사람들은 반란을 일으켰고 저항했습니다.
혁명군은 그들을 반혁명세력, 왕당세력으로 멋대로 규정하고 잔혹하게 학살하기 시작합니다.
민중의 힘으로 성공한 혁명이므로 정당하다는 명분을 덮어쓰고는 참혹하리만큼 방데지역 사람들을 학살해대기 시작합니다.
학살의 규모는 추정치만으로도 15-60만명을 헤아립니다. 아이는 말로 짓밟고 총검으로 살해했습니다. 임산부조차도 포도 압착기로 살해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차가운 얼음이 둥둥 떠 있는 강물에 수장을 시켰습니다. 그 당시 방데 인구가 80만명이었다고 하니, 인구의 절반가까이가 국가에 의해 조직적으로 학살당한 것입니다.
당시 프랑스군 장군이었던 프랑수아조제프베스테르만은 보고서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 이제 방데는 없습니다. 여자들과 그 자녀들이 우리 칼에 죽었습니다. 나는 그들을 사브네의 소택지와 숲에 묻었습니다. 내게 내려진 지시에 따라 나는 말발굽으로으로 어린이들을 짓이겼으며 부녀자들을 살해했는데, 적어도 이런 조치로 도적의 자식들은 더 이상 태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비난할 포로도 두지 않았습니다. 나는 모두 없애버렸습니다"
200년이 훨씬 지났지만, 프랑스 혁명에 대해서는 너무 잘 알고 있는 우리들도 방데학살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습니다.
프랑스정부의 공식적인 사과가 아직까지 없으니까요. 분명히 존재했던 역사였고, 참혹한 자국민 학살이었지만 프랑스 정부는 아직도 외면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혁명이 그만큼 찬란하고 빛나는 결과물이니 누를 끼치고 싶지 않은 프랑스인들 아니 전세계인들의 바램 때문이었을까요?
우리도 아팠던 역사들이 찬란한 국위에 누가 될까하여 기억도 말고 이야기도 꺼내지 말라 했었습니다.
다행히 우리는 프랑스보다는 나은편인것 같습니다.
오늘 4.3. 제주 추념식을 바라보며 반복되는 참혹한 역사, 반성하지 않는 권력, 명분을 내세운 학살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림 설명 : Les réfugiés,1881, Évariste Carpentier, 출처 : 위키미디어커먼스>
<참고 링크 : https://namu.wiki/w/%EB%B0%A9%EB%8D%B0%20%EC%A0%84%EC%9F%81?from=%EB%B0%A9%EB%8D%B0%20%EB%B0%98%EB%9E%80, https://ko.wikipedia.org/wiki/%EB%B0%A9%EB%8D%B0_%EC%A0%84%EC%9F%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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