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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주 Apr 26. 2022

마석에서 만나는 대한민국

[그림] 루벤스, 한복을 입은 남자


“한민족”, “단일민족” 같은 단어가 낯설지 않습니다. 제가 어릴때는 학교에는 부모님이 다른 국적이거나 국적이었던 친구가 거의(혹은 아예)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대한민국은 단일민족이고, 그 단어에 대한 알 수 없는 자부심도 있었습니다. 한반도 역사에는 외국인이라고는 단 한명도 없었던거처럼 말이죠. 

 여기 17세기에 이탈리아에서 그려진 초상화가 하나 있습니다. 400년도 더 된 그림이니까 작가가 기록하지 않은 이상은 그 어떤 것도 정확하지 않겠지만 몇몇 연구가들이 추론하는 중에 하나를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임진왜란(1592)을 거치면서 일본에 수많은 조선인들이 포로로 잡혀가게 됩니다. 이후 이들 중 일부는 당시 일본을 오가던 유럽 상인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갈 수도 있었을 겁니다. 몇 몇 기록에 의하면 5명의 남성이 포루투칼 상인에 의하여 노예로 팔려갔다고 합니다. 그 중에 한 명이 이탈리아까지 가게 되고 그 뒤로 노예 신분에서 어찌저찌하여 풀려나게 되어 이름을 ‘안토니오 코레아’라고 바꾸고 이탈리아에서 가정을 이루고 살았다고하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사실이야 어찌되었든 중국 당나라의 고분이나 둔황 석굴에도 고구려, 백제, 신라 조상님들의 모습들이 그려져 있어 오랜 시절부터 우리 조상님들이 노동을 이유로 혹은 교류를 이유로 전 세계에 나가 계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어느 날부터인가 대한민국을 단일민족이라고 부르는게 어색할 정도로 다양한 국가의 사람들이 이곳에 있고, 지구 곳곳에 대한민국을 출신국가로 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이 현실이죠. 

Peter_Paul_Rubens_-_Man_in_Korean_Costume,_about_1617

대한민국에 마석(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이라는 동네가 있습니다. 1960년대 국가는 여느 농촌마을처럼 조용했던 마석이라는 동네에 대한민국정부는 한센인을 집단 이주시킵니다. 이들은 황무지 같은 산비탈을 개간하고 소규모 공장이나 가내 수공업으로 삶을 영위했습니다. 그러다 1990년대가 되자 산업기술연수생이라는 이름으로 마석에는 외국인 노동자가 유입되기 시작합니다. 이들은 어렵고, 힘들고, 더럽다고 여기는 일을 도맡아 하며, 또 다른 삶을 영위해갑니다.     

어느 여름 법학전문대학원 실무수습생들과 함께 마석을 찾앗습니다. 동네 입구는 빛나는 조명을 받고 있는 화려한 가구 전시장이 도로를 중심으로 늘어서 있는데, 가구전시장 길 초입에 작은 카페가 있고, 그 카페 옆길을 따라 오르막을 올라가면 성공회 교회가 우뚝 서 있고 이제부터 슬슬 반듯한 도로가 없어지면서 콘크리트로 무늬만 만들어 놓은 듯한 비포장길입니다.     

이 길에 진입하자 ‘SEKIYA(이새끼, 저새끼에서 따온)’라는 잡화점이 보이면서 그 잡화점을 시작으로 양옆에 작은 공장들이 다닥다닥 붙어있고 한여름에도 커다란 선풍기 하나에 의지해 나무를 다듬는 노동자들이 연신 땀을 흘리고 있는 모습이나 매캐한 가공약품 냄새가 진동하는 공장에서 마스크 하나 없이 일하는 노동자들, 가구 염색을 위한 도료를 분사하면서 온몸이 물들어 있는 노동자들의 환한미소들과 길을 따라가며 만나며 눈인사를 했습니다.          

눈으로 직접 확인한 그들의 생활 환경은 생각보다 열악했습니다. 노동자 대부분은 쪽방으로 이어진 공동주택에 거주하고 있는데 들어가는 계단은 성인 2~3명만 올라가도 무너질 것 같은 부실한 콘크리트 구조물이고 공동주택 옆으로는 깨진 유리와 녹슨 철근 덩어리, 쓰레기가 나뒹굴고 있어 행정력의 흔적은 찾아보기는 힘들었습니다.     

그나마 이 공동주택에 사는 이들도 형편이 나은 편이고 대부분은 공장 기숙사에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한여름 햇살이 뜨거운 오후 2시즈음 방문한 어느 공장 기숙사의 공동 부엌과 공동 샤워실 내부는 불빛하나 없는 암흑이었는데 전등이 고장이 아니라 원래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던거죠. 핸드폰 손전등을 켜자 수천 마리 바퀴벌레가 한 곳으로 물이 쏠리듯 빠르게 사라졌음에 놀라고, 바퀴벌레가 사라진 벽이 검은 것이 페인트로 칠한 것이 아닌 곰팡이라는 것에 또 놀랐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삶은 진행 중이었습니다. 가족들이 같이 이주해서 살고, 이곳에서 가정을 꾸려 살아가기도 합니다. 아이들은 태어나고 자라고 위험천만하고 아찔한 산비탈이나 공장 놀이터를 해맑게 뛰어노는 아이들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몇 십 년 전에 머물러 있는 외양과는 달리 삶은 진행형이었죠. 그리고 그들은 해가 지면 가로등 하나 없는 어두운 밤길을 걸어 언제 무너져도 신기하지 않을 숙소로 돌아가겠죠.     

이곳에서는 대한민국 복지를 경험할 수 없어보였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외국인 노동자의 사회적 지위는 시작부터 힘들었으니까요. 노동자, 그것도 3D 업종에 종사하는 이들, 선진국이라고 부르는 서구 백인이 아니었던 그들은 처음부터 하부계층으로 대한민국에서의 삶을 시작했고 글로벌시대가 됐지만, 그들은 대한민국 시민의 친구가 되기는 어려웠습니다. 단지 필요하면 오라고 하고, 필요가 없어지면 나가라고 하는 존재였으니까요.     

우리 주변에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배부르고 등따숩게 해주면, 행여나 이들이 한국에 영원히 머무르면서 한국인에게 해가 될까 두려워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복지의 자리가 머무르는 것을 경계하기도 하죠. 불과 몇십 년 전 독일, 사우디아라비아로 ‘달러벌이’를 나섰던 한국인 이주노동자들에게 그 나라들은 이곳 마석의 이주노동자보다는 더 배가 부르고 등을 따숩게 해줬던 것 같은데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 삼촌이자 고모였던 한국인 이주노동자들 대부분의 소원은 ‘얼른 빨리 돈을 벌어 고향으로 돌아가서 잘사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이들의 소원도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대부분 노동자들의 방에는 고향 사진과 두고 온 가족사진이 걸려 있었습니다. 이들 역시 차별과 혐오가 넘치는 대한민국에서 부자가 되어 영원히 살고 싶어 하지는 않는거죠. 이들의 고향행을 막는 것은 그러한 이기적인 바람이 아닌, 성희롱, 폭행, 저임금, 부당대우는 고용주와 마찰을 만들고, 사업장을 이탈하는 경우에 발목을 잡는 고용허가제와 체불임금, 빼앗긴 여권, 그리고 산업재해 사고로 인한 장애라고 합니다.     

비단 마석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닐 것 같습니다. 유학생을 미등록 이주노동자로 오인해 폭행하기도 하고, 고용주는 여성 노동자를 상습적으로 성폭행하기도 하는 뉴스가 심심찮게 보도됩니다.      

그들이 차별받지 않고 정당하게 근무하고 정당하게 수익을 분배받아 그들이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살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불쌍하고 가여운 존재일까? 우리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이주노동자의 삶을 살았고, 독일,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나라에서 한 때는 이방인이었지만 그 나라 사람보다 열등하거나 모자란 사람이기에 차별과 무시가 마땅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겁니다. 사는 곳이 어디든, 어디에서 왔든 사람답게 살 권리가 있는거죠. 특히, 안전, 위생, 보건, 교육 등 기본적인 삶을 위해 필요한 복지는 출신을 이유로 차별 시행되지 않아야 하는건 마땅한 일입니다.     

어찌 보면 대한민국은 마석과 닮아 있는 것 같습니다. 처음 만나는 화려하고 빛나는 대한민국 골목은 처리해야할 낡은 쓰레기들과 위험한 구조물이 구석구석 방치되어 있는 마석의 오늘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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