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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주 Oct 26. 2022

그녀는 정말 희대의 살인마였을까?

[그림] 헝가리의 엘리자베스 바토리

동유럽의 나라 헝가리에는 ‘피의 백작부인’이라는 아주 잔혹하고 무서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야기인즉슨, 바토리 에르제베트(Elizabeth Bathory의 헝가리식 이름, 1560-1614)라는 백작부인의 실제 이야기인데요, 그녀는 높고 거대한 성에 혼자 살고 있는 새하얀 피부와 풍성한 검은 머릿결의 아주 아름다운 백작부인입니다. 

그녀는 막대한 권력과 돈으로 젊음과 미모를 유지하기 위해 처녀의 피를 마시고 그 피로 목욕을 하며, 반대하는 이들은 가차 없이 고문하고 죽이기도 하는 마녀로 후대까지 전해내려 옵니다. 


 보통 이야기 속에 이런 여성들에게 우선은 ‘미친여자’라는 전제는 기본으로 둡니다. 그녀에 대한 이야기가 마을을 하나 건널 때마다 잔혹함은 더해지게 마련이죠. 이런 이야기들입니다. ‘마음에 안드는 하녀는 입을 바늘로 다 꿰매버린다’, ‘산사람의 목을 잘라 작대기에 매달아놓기도 한댄다’, ‘꽁꽁 묶어서 꿀을 발라 벌레와 새가 뜯어먹게 한다더라’, ‘처녀의 피를 마시기 위해 산 사람을 쇠창살이 가득한 철망에 가둬놓고 피를 흘리게했다’ 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바토리 백작부인의 성에 들른 누군가가 하인을 고문하는 광경을 보고서는 그녀를 신고해버립니다. 이미 그녀에 대한 어마 무시한 소문이 있었던지라 그렇게 끔찍한 장면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맞아 그랬지. 그 여자에 대한 소문이 맞았어!” 라고 후다닥 도망 나와 신고를 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후에 실제 그녀의 재판에서 ‘카더라’ 소문을 근거로 재판에 증인으로 나온 사람들의 증언은 떠돌던 소문을 서로 증명이나 하겠다는 의지로 가득찹니다. 


 어떤 이는 그녀가 피를 마시는 장면을 보았다 하기도 했고, 그녀가 욕조를 피로 가득 채워 목욕하는걸 보았다는 사람들도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녀가 죽인 사람이 600명 이나 된다는 증언도 등장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뜯어보면, 의아해집니다. 

중세가 금방 끝난 유럽은 그렇게 인구가 많지 않았습니다. 그것도 헝가리의 변방의 어느 마을인데 말입니다. 보통 한 사람의 피가 5리터쯤 된다고 하는데 욕조를 가득 채우려면 몇 십 명의 여성이 목욕 때마다 사망해야하는 셈이죠. 지금도 지역 읍면 단위 인구가 1,000명도 안 되는 곳이 많은데, 헝가리 변방 작은 마을에서 그것도 여자만 600명 넘게 죽인다면 그 마을뿐만 아니라 몇 개 마을이 송두리째 학살당하는 셈인데도 말입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러한 증언들이 힘을 얻어 재판에 인용되기까지 합니다. 바토리는 귀족이었기 때문에 당장 죽음을 당하지는 않았습니다.(당시 법률로는 귀족을 사형에 처할 수 없었기 때문이죠) 대신 바토리는 모든 것이 밀폐되고 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탑 꼭대기의 독방에 갇혀 죽게 됩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기에 딱 좋죠.

 2차 대전 때 소실되어 지금 그 그림을 직접 볼 수는 없지만, 헝가리의 유명한 인상주의 화가인 이스트반 초크는 ‘고문하는 바토리 백작부인’ (Countess Elizabeth Bathory enjoying the torture of some young women: in an inner courtyard of one of her castles)이라는 제목으로 그려냅니다.

<출처 : 위키미디어커먼스>

 그리고도 몇 차례 소설과 영화화되기도 했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작품속에서 바토리는 퇴폐적이고 욕망에 사로잡힌 주인공으로 묘사되었죠.

<< 관련 영화 : 이 밤피리(1956), 어둠의 딸들(1971), 드라큐라 백작부인(1971), 카운테스(2008) >>


 중세 유럽이야 마녀사냥이 판을 치던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인 시대였다 치더라도 현대에까지 와서도 여성을 대상화해서 마녀 혹은 성녀로 이분법 해서 보는 이들의 잣대로 규정짓는 시선은 32세기까지 이어졌다고 볼 수 있죠.


 이제부터 우리는 중세유럽의 ‘카더라 통신’을 기반으로 하는 음모론에서 벗어나서 이 사건을 다시 객관적이고 논리적으로 들여다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조금 바탕에 두고 들여다보면 더 좋겠죠. 당시 우리의 주인공 바토리가 살았던 시기는 1,600년대를 전후합니다. 

르네상스 14세기에서 16세기까지 일어난 고대 문화의 부활이라는 의미의 문화 운동. 신 중심의 중세문화에 대한 반발로 인간 중심의 사고관으로 만들어진 사조. 미술, 음악, 문학과 종교까지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칩니다.

르네상스가 유럽을 바꾸어놓고 종교혁명 역시 시기 1517년 마르틴 루터가 면죄부 판매와 연옥에 대한 교황권 주장 등을 비판하는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하면서 시작됩니다.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독일에서는 츠빙글리, 알프스 산맥을 기준으로 스위스지역에는 칼뱅이, 영국은 토머스 크랜머 등 전 유럽으로 확산되며 구교(전통 가톨릭)와 대립할 정도로 세력이 확대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 중세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한 문화들은 여러곳에서 잔재하고 중세의 악습이 이어지는 사건들은 여전히 발생합니다.  똑똑하고 돈이 많은, 그러나 혼자 사는 여성을 마녀로 몰아 죽이던 시대 역시 마무리되지는 못했던 같습니다.

  우선 바토리는 귀족의 신분으로 아름다운 여성이었습니다. 남편 역시 영주였으며 군인이었습니다. 다만 안타깝게도 일찍 사망해버립니다. 바토리는 남편이 사망한 후에 돈이 많고 권력을 가진 홀로 남은 아름다운 귀족 여성이 되었을 뿐입니다. 


 그러니 그녀의 재산과 권력을 탐하는 이들이 그녀를 모함하고 음해하는 건 어렵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바토리 가문(헝가리는 우리처럼 성을 앞에 두고 이름을 뒤에 두기 때문에 사실 바토리는 이름이 아니라 성인 것이죠)은 당시 굉장한 권력을 가지고 신교 중에서도 칼뱅파를 지지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루터파와 구교의 공격을 동시에 받았을 것이죠. 누군가가 그녀가 하인을 괴롭히는 혹은 고문하는 장면을 보고 신고를 했다고 하는데, 당시 유럽 귀족이 하인들을 고문하는 장면은 어느 성에서나 흔하게 있던 장면이었을 겁니다. 아름다운 귀족 여인이니 마음씨도 너무 비단 같이 고와 하인들을 아끼고 존중해 줄 거라는 생각은 동화에서나 가능한 내용이죠. 


 즉 소문만 무성하고 실체가 없는 이야기들이 엮이고 섞여서 한 여성을 미치광이이자 희대의 잔혹한 살인마귀로 만들어버린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이쯤 되면 들 수 있습니다. 


 슬프게도 우리의 편견은 바토리가 살던 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지지 않은 것이 문제 같습니다. 여성에게 던져지는 역할이 있죠. “아름다워야 한다.”, “여성은 남성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 “여성이 권력을 가지고 재산을 가지는 것(즉 잘나가는 것)은 불편하다.”는 500년 전의 이러한 시선은 “여성은 그 돈만 받고 일해도 된다.”, “여성이 나와서 버는 돈은 반찬값”, “남성 관리자의 말을 잘 들어야지.”, “여성은 감정적이고 지능이 부족해서 선거에 참여할 수 없다.” 라는 시선으로 이어졌고, 그 이어짐의 끝에 여성은 시위대를 조직하고 거리로 나와서 여성의 권리 보장을 위해 “빵과 장미를!” 이라고 외치게 됩니다.


 100년 전 미국에서 열악한 노동환경으로 사망한 여성노동자들의 죽음을 기리기 위한 시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100여 년 전의 외침은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고 기념하는 3.8. 세계여성의 날 1908년 미국의 여성 노동자들이 정치적 평등권과 여성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대규모 시위를 시작한 날을 기념한 날이죠. 대한민국에서는 사회주의 색채가 강했기 때문에 1985년에서야 공식적인 기념이 시작되었구요. 그 후 2018년에 와서야 법정기념일이 됩니다.


 ‘여성은 ~해야한다.’라는 시선을 이제는 거두어 들일 때가 되지 않았을까요? 바토리 백작부인에게 수많은 편견을 가지고 이야기를 만들어 그녀를 살해한 것처럼 지금도 여성에 대한 잘못된 편견으로 어디선가 다른 여성이 살해당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함께 보면 좋아요.


[여성에 대한 모든 형태의 차별 철폐에 관한 협약]

CONVENTION ON THE ELIMINATION OF ALL FORMS OF DISCRIMINATION AGAINST WOMEN

 1979년 12월 18일 UN총회에서 이 협약은 채택되고, 1981년 9월 3일부터 발효됩니다. 대한민국은 1984년 12월 18일에 국회에서 비준 동의된 국제협약입니다. 

 이 협약의 당사국은 세계인권선언 및 인권에 관한 국제규약 및 협약, 선언, 권고 등에 남녀의 권리 평등에 유의할 것이며, 이러한 수많은 제도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에 대한 광범위한 차별이 계속 존재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사회와 가정에서 여성의 역할 변화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여성에 대한 차별 철폐에 관한 선언에 명시된 모든 원칙을 이행하며, 이러한 목적으로 모든 형태의 차별을 철폐하는데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을 합의한 내용입니다. 

출처 : 국제인권협약집, 2008, 국가인권위원회


[세계 여성의 날]

 첫 번째 세계 여성의 날은 1857년 뉴욕에서의 여성노동자의 시위를 기념하기 위해서 만들어졌습니다. 그 후로도 여성노동자들의 권리 향상을 위하여 임금인상 및 노동조건 개선 뿐만 아니라 정치적 평등권 쟁취와 노동권 보장등을 요구하며 꾸준히 시위는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1908년 미국에서는 1만 5천명이나 되는 여성노동자들이 시위에 나섰고, 이 날을 기념하여 세계 여성의 날이 제정됩니다. 유엔에서는 1975년부터 공식적으로 이 날을 기념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여성인권은 미국이나 유럽이라고 해서 별반 좋은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혁명의 나라 프랑스나 여왕이 통치하던 영국도 1930년을 전후해서야 여성에게 참정권이 주어졌습니다. 여성을 미숙하고, 어리석은 존재로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여성의 날이 기념되기 시작한 배경에는 여성의 노동권, 사회권, 참정권에 대한 투쟁이 담겨져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일제강점기였던 1920년대부터 여성의 날을 기념하기 시작했습니다. 나혜석, 김활란, 그리고 정칠성 등의 여성운동가들이 주도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여성운동은 해방이후 오히려 더 탄압을 받게 됩니다. 사회운동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집권시절에는 ‘세계여성의 날’이 사회주의 성격을 가진다고 인식해서 작게 명맥만 이어오게 되다가 1985년에 가서야 공식적으로 제1회 한국여성대회가 열리게 됐고, 현재까지 매년 3월 8일을 전후하여 많은 행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시대적 상황이 여성에게 차별적이었기 때문에 여성의 날을 기념하기도 어려웠을 텐데 사회분위기가 또 권리투쟁적인 여성운동을 기념하는 날에 대해 또 부정적이었기 때문에 한동안 조용히 치러질 수밖에 없어 더욱 이 3.8여성의 날이 우리에게 조금은 낯선 이유일 수 있습니다. 

출처 : 국제노동기구 ILO 누리집(www.ilo.org), KBS라디오 ‘아침의 광장’ 2019년 3월 방송 중


<사진 : Wisconsin and Oregon, delegation from Women's Clubs in National Suffrage Procession March 3, 1913.jpg (출처:위키미디어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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