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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주 Oct 25. 2023

사상의 투쟁에서 태어난 인권도시

[도시] 타이페이, 타이완, 성적자기결정권

대만 타이베이 여행 주제는 역사기행이었습니다. 20세기초 중국 역사를 영화로 만든다면 주연급이었던 장제스가 눈물을 삼키며 본토를 떠나와 만든 도시 타이베이는 건립 자체 부터 흥미롭습니다. 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이 등장하는 또 다른 영화 같은 이야기들 위에 만들어진 대만국립고궁박물관이 있는 도시이기도 합니다.

이들 부부는 중일전쟁 때부터 일본군에게 쫓길 때도, 일본 패망 후 국공내전의 상황에서도 끝까지 문화재를 끌어안고 다녔습니다.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할 여력은 없지만, 장제스 부부와 국민당이 탄 배가 대만으로 퇴각할 때 중국 본토에서도 멀어지는 배를 보면서 포를 한 발도 쏠 수 없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바로 그 배에 실려진 어마어마한 보물 때문이었다고도 합니다.

이 보물들이 이들의 영욕을 위해 뇌물로 쓰이기도 했고, 때론 국민당 망명정부의 생존을 위한 로비 물품으로도 쓰이기도 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이 이 보물을 빼돌렸기 때문에 수천 년 중국의 역사에서 빚어진 찬란한 문화재들이 마오쩌둥의 사회주의와 문화혁명의 소용돌이에서 무사할 수도 있었다고 하니 참 아이러니하기도 합니다.

수천 년 동안 만들어져 거대한 자금성에 숨겨져 있던 이 어마어마한 보물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나왔는지 지금 대만국립고궁박물관은 세계 4대 박물관의 명성을 얻게 되었죠. 유물을 다 보려면 몇십 년을 박물관을 들락거려야 한다는 말도 있을 정도입니다. 그렇습니다. 타이베이는 동아시아의 역동적인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스펙타클한 드라마의 주인공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마어마한 신스틸러 역할은 했던 도시인 겁니다.

사실은 사상을 이유로 분열된 역사의 기록을 품은 도시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국립고궁박물관을 나와 국민당의 마지막 수도였던 남경을 그리워하며 이름 붙인 난징푸싱역에 내려 시내로 들어옵니다. 죽은 장제스를 위한 근위대 교대식이 열리는 중정 기념관을 거쳐, 탄압과 국가 폭력의 역사인 대만의 2.28사건을 기념하는 기념공원을 지나 도시 어디에나 있는 젊은 청춘들이 가득한 거리, 시먼딩을 걸을 때 만해도 말입니다.

이틀 가까이 열심히 걸어다니고 나니, 그런 청춘의 번화함에 끼어 두리번거릴 기력이 없어 달달한 밀크티를 하나 사서 아무 점포 앞에나 주저 앉았습니다. 밀크티를 홀짝이며 주변을 살펴보니, 이 가게를 애용하는 사람들이 범상치는 않아 보입니다. 요란한 피어싱을 한 이들도 있고, 달달함이 뚝뚝 떨어지는 사귄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동성 커플도 보입니다.



대충 보았을 때 컬러풀한 간판 가게 앞에 붙은 영어에 ‘LG’라는 글자가 보이길래 전자제품을 파는 가게라고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이제 일어나 다른 곳으로 이동하려고 보니 가게에 붙어 있는 글자가 LG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LGBTQ+’라는 걸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보니 횡단보도는 예쁜 무지개색으로 장식되어 있지 않겠습니까? 수천 년 중국의 찬란한 역사유물을 간직한 타이베이에서 만나는 무지개라니!

2017년 헌법재판소가 동성혼을 금지한 법안을 위헌으로 판결했고, 2019년 동성혼 합법화가 이루어졌다고 하니 도시의 가장 번화한 곳에서 만나는 무지개가 이곳을 지나는 이들에게 어색할 이유는 없어 보였습니다. 검은 아스팔트에 그려진 알록달록 무지개 위로 색깔만큼이나 다양한 청춘들이 행복하게 스쳐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포용하는 무지개빛 길바닥을 지나 시먼홍로우 상가 안에 있는 성중립 화장실까지 법을 너머 생활에서의 어울림이었습니다.

시먼딩 무지개 도로

100여 년 전, 한 국가 안에서도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전쟁을 치르고 수많은 목숨이 희생된 채, 언젠가 부흥할 것임을 꿈꾸며 건설한 도시에서 이제는 다양함에 대한 당연함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 새로웠습니다. 역사를 밟으러 간 도시에서 미래를 마주한 순간이랄까요? 그 어떤 다름도 차별이 되거나 소외되지 않기 위한 또 하나의 타이베이 역사가 시작되는 무지개 도로가 그 어느 도시에서도 낯설지 않은 풍경이 되기를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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