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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주 Jan 30. 2024

선별되는 과거의 시간

[도시] 오사카, 일본

20여년 전 친구들과 여행삼아 나가사키를 방문했습니다. 역사와  인권에 기반한 것이 아닌 그저 즐겁게 2~3일 일본우동도 먹고, 신사도 가보고 현지 가정체험도 해보자 해서 떠난 여름 방학 여행이었습니다. 

 사흘간 우리가 먹고 자며 머물렀던 곳은 노부부가  운영하는 작은 게스트하우스였습니다. 동글동글 귀여운 얼굴에 사람좋은  미소를 가득 머금은 할아버지는 작은 것 하나라도 불편해하지 않도록 친절을 베풀어주셨습니다. 

 둘째날 아침을 함께하는 식사자리였습니다. 텔레비전에서는 특집 다큐멘터리가 방영되고 있었습니다. 일본어를 전혀 모르는 저도 그  내용이 '원폭'과 관련된 것임을 금새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 곳은 원폭이 투하됐던 도시 나가사키였고,  다음날은 8월 15일 이었습니다. 그들의 종전일을 앞두고 방송되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너무 슬픈 표정을 지으시며, 나가사키에 원폭이 떨어지던 날 본인은 고모댁에 놀러를 가 있어서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돌아온 나가사키는 비극 자체였다고 하셨습니다. 할아버지의 원폭에  대한 경험담이 이어졌습니다. 

'같은 반 친구들 중 반 이상이 사망했고, 살아남은 친구들도 계속 후유증에 시달리며 고통스럽게 살았다. 한  친구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부모님은 원폭 피해를 직접 받지는 않았지만, 365일 감기에  걸린 상태로 계셨다. 오래 사시지 못했다' '부모님 말이, 꽝 하고는 온통 암흑으로 변하더니 다시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밝아졌다. 방공호 밖을 나갔는데 너무 뜨거워서 발을 내디딜  수가 없었다 한다', '원폭 이후 몇년간 잠을 제대로 못자서 살이 엄청 빠졌다. 또 언제 내 머리로 폭탄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할아버지가 증언을 이어나가는 동안 우리는 숙연해졌습니다. 전범국가였든 가해국가였든 그 곳에 사는 평범한 사람이  겪어야 하는 고통치고는  너무 컸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할아버지의 증언과 TV속 다큐는 그 끔찍했던 원폭과 피해를 집중적으로 이야기를 함께 이어나가고 있었습니다. TV속 다큐멘터리가 마지막으로 나가사키의 원폭으로 멈춘 괘종시계를 비추고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를 날려보낼 때 할아버지는 우리 손을 잡고, 앞으로 이런 피해가 없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할아버지의 따뜻한 손과 비둘기가 채우는 화면 어느 곳에도 다만, 일본의 전쟁범죄나 피해자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엄숙하고도 경건한 순간에 머리에는 있는 그 생각을 입으로 꺼낼 방도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원폭이 일본을 파괴시킨 후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은 1945년 8월 15일. 

 세계인권역사를 새로 쓰게할 정도의 끔찍한 인류 최대의 비극이었던 전쟁인 세계 대전이 막을 내립니다. 앞서도 말했듯이 이 끔찍한 전쟁의 시계를 멈추게 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끔찍한 인간살상무기인 핵폭탄이었습니다. 일본의 나가사키와 히로시마는 모든 것이 사라져버리는 초유의 상황을 맞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너무 큰 피해가 있었던 전쟁이었고, 일본의 입장에서는 댓가가 컸던 종전과 평화의 시작이었을까요?

 일본 곳곳에는 '평화'를 이름으로 내건 박물관들이 산재하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오사카의 평화박물관입니다. 

 벚꽃이 만발한 오사카성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저지른 500여년 전의 전쟁범죄를 학습한 후에 바로 공원 아래쪽 모리노미야 역으로 향하면 아이러니하게 평화박물관을 찾을 수 있습니다. 거대한  오사카성과 그 공원의 규모에 비해 초라해보이기는 합니다만, 나름 국제평화센터라고 이름 붙혀진 곳입니다. 오사카 평화박물관, 오사카 국제평화센터 자체적으로는 피스 오사카(Peace Osaka)라고 되어 있습니다. 

 통유리로 되어  있는 건물이라 멀리서도 반짝이며 잘 보여 찾기 어렵지는 않습니다. 박물관 앞에 서면, 짙게 누워있는 모자상 동상을 먼저 만날 수 있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원폭피해를 입은 어머니와 아들이 희생된 모습을 나타낸 조형이었습니다. 내부로 들어가면 2차 대전 당시 일본의 생활상이 조금 나열되어 있고는 대부분의 무게  중심은 연합국의 공습과 원폭으로 인한 피해의 참상이었습니다. 

 한국인으로서 오사카성에서 이미 피해자임이 삭제된 전시를 투덜거리면서 보고 나와서 마주한 평화박물관도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평화박물관을 모두 관람하고 나서 느끼는 점은 미국이 정말 나쁜 짓을 했구나. 너무도 평화롭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일본에 어찌 저런 무자비한 만행을 저질렀단말인가! 하는 거였습니다.  

 

 1991년에 개장한 오사카 평화박물관의 처음은 비교적 일본의 중국침략과 조선에 대한 식민지배의 내용을 기록하는 곳이었습니다. 우익진영에서 '자학사관'이라고 비판할정도로 일본군의 만행을 기록하는 전시물과  난징대학살 같은 자료도 전시가 되어 있었습니다.  2013년 9월 잠시 폐관된 후 2015년 4월에 다시 개장을 하면서 전시의 내용은 많이 바뀌게 됩니다. 박물관은 일본군 침략사  전시물을 모두  없애고, 그 자리를 태평양전쟁 말기 연합군에 의한 오사카 공습과 관련한 내용들로 채워넣게 됩니다. 

 

 일개 개인이든, 한 국가든 역사를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 기록의 연속에서 아름답고 빛나는 것만이 있을 순 없습니다.  부끄럽고 철없던 순간들이 있기도 하고,  최고의 나날들도 분명 공존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다만 인간이기에 기억의 한계에 다다르면 어두웠던 기억부터 잊고자  할 것은 같습니다. 

 그러하기에 인간은  눈에 보이는 기록을 박물관이라는 형태로 만들어 놓기 시작합니다. 잊지말아야 할 것들에 대해 기억을 강화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오사카성에는 도요토미의 일생이 꽃놀이 하듯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의 출생부터 사망까지를 말입니다. 임진왜란은 도요토미의 꽃놀이 중  아주 흔적처럼 새겨져 있었을 뿐입니다.

 기록은 좋았던 시절을 두고두고 울궈먹으라고 있는게 아닙니다. 흑역사의 한 한장면도 고스란히 남겨 놓아  앞으로 경계할  수 있게  해야 하는 것이죠. 

 

 일본에는 수십개의 '평화'라는 이름을 가진 박물관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인류에게 당연히 너무나 비극적인 원폭투하로 인해 일본은 당연히 평화를 외치고 기록해야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다만 그 평화에는 피해자로서의 외침만 담겨져 있기 때문에 문제인 것이죠. 자신이 당한 고통만이 새겨져 있고, 자신이 저지른 가해에 대한 기록은 한줄도 없는 곳이 누구를 위한 누구의 평화박물관일까요? 

 물론 동일한 집단 내에서 피해자임을 집단적으로 기억할 때 집단   결속력은 더 단단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다만 전쟁이라는 행위에는 반드시 가해자와 피해자가 공존한기에 상대에 대한 기록도 함께여야만 합니다. 

 평화는 한 국가내에서만 완성되는 가치가 아닙니다. 이 땅을,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추구해야하는 궁극적인 목표여야 하니까요. 

 

 일본의 수많은 평화박물관   단 하나라도 가해의 기억을 기록하고, 그 기록위에서 반성을 시작할  때, 한국, 중국, 미국 등 국가들이 평화를  위해 온전히 연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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