썬더볼츠를 통해 바라보는 고독과 방
한때 연결은 인간의 가장 큰 소망이었다. 더는 혼자가 아니라고 느끼기 위해, 사람들은 마을을 만들고, 도시를 세우고, 이제는 디지털 공간까지 구축해 서로를 이어왔다. 우리는 스마트폰 속 수많은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정작 마음을 털어놓을 사람은 드물다는 사실에 종종 무력감을 느낀다.
이러한 시대에 슈퍼히어로 장르의 썬더볼츠가 공허라는 감정에 주목한다는 점은 흥미롭다. 전통적으로 슈퍼히어로는 사회가 품고 있는 불안과 결핍에 대한 응답으로 등장해왔다. 범죄, 불의, 불평등과 같은 문제 속에서 시민들은 구원자 같은 존재를 갈망했고, 그 열망이 바로 영웅이라는 상징으로 형상화되었다. 즉, 이들은 공동체의 이상을 구현하고 대리 실현하는 존재다.
하지만 썬더볼츠는 이러한 전통적인 슈퍼영웅의 이미지에서 분명히 벗어나 있다. 이 팀을 구성하는 인물들은 도덕적 이상을 대변하기보다, 상처와 결핍을 안고 살아가는 개인들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나선 이들이 아니다. 오히려 사회의 중심에서 밀려난 이들이며, 그들의 행동은 종종 선한 의지가 아닌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그들의 등장은, 더 이상 영웅조차도 완전무결할 수 없는 시대정신을 반영한다.
썬더볼츠가 흥미로운 이유는, 그 안의 인물들이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히어로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들은 세상을 구하겠다는 사명감이나 정의감으로 뭉친 게 아니다. 오히려 누군가에게 이용당하거나, 어쩔 수 없이 움직이는 꼭두각시에 가깝다. 더 흥미로운 건, 이들이 그런 상황을 스스로 알고도 그 역할을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힘이 있음에도, 누군가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자신을 인정하고 그 역할을 계속 맡는다는 건, 단순히 명령을 따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이유는, 이들이 속으로 바라는 게 따로 있기 때문이다.
각자 상처와 고립을 안고 살아가며, 진짜로 원하는 건 악을 무찌르거나 정의를 실현하는 게 아니다. 그들이 바라는 건 존재의 정당성, 다시 말해, 이들은 자신이 여기 있어도 괜찮다는 인정을 원한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그냥 누군가가 자기를 받아주는 걸 바라고 있는 것이다.
영화 속 옐레나는 이 구조에 갇힌 대표적인 인물이다. 암살자 훈련소에서 키워졌고, 가족이라는 것조차 연극처럼 주어진 설정이었다. 그러니 스스로 나는 누구인가를 고민해볼 기회조차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늘 누군가의 시선 안에서, 제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증명하려고 한다. 영화 속에서 옐레나가 발렌티나에게 ‘공개된 활동’이나 ‘대중적인 임무’를 언급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정체성을 고민하기보단, 주어진 역할을 해내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려 하고, 그렇게 해서 자신 안의 공허를 채우려 한다.
반면, 빌런인 밥은 이 구조의 또 다른 끝에 있는 사람이다. 영화 속 묘사대로라면 그는 애초에 어떤 역할조차 부여받지 못한 사회적 하위자다. 마약 중독자였고, 아무도 그에게 기대하지 않았다. 그래서 영화 초반 탈출 장면에서도 자진해서 남으려고 한다. “내가 남는 게 나을 거야”라며 스스로를 덜 중요한 존재로 만든다. 하지만 초능력을 각성한 후, 밥은 달라진다. 자기 안에 특별함이 있다는 걸 깨달으면서부터, 그는 잊혀진 존재에서 벗어나, 세상에 자신을 각인시키고 싶어한다.
밥이 진짜로 원하는 것도 결국 인정이다. 다만, 그걸 폭력이나 위협, 우월감의 과시를 통해 얻으려 한다.
그래서 발렌티나가 그를 통제하려 하자, 그는 이렇게 되묻는다. “왜 신 같은 내가 너의 말을 따라야 하지?”
이 말 안에는 과거의 열등감, 통제받기 싫은 분노, 그리고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다 뒤섞여 있다. 이제 그는 자신을 더는 무시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들고 싶어진 거다. 결국 옐레나와 밥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지만, 같은 질문을 안고 있다. “나도 이 세계에 속할 수 있는 사람일까?” 옐레나는 팀 안에서 조심스럽게 자리를 지켜보려 하고, 밥은 그 자리가 없다는 사실에 분노해 시스템을 무너뜨리려 한다. 썬더볼츠는 그래서 히어로 영화라기보다는,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읽히는 게 더 맞을지 모른다.
밥은 자기만의 방을 만든다. 겉으론 물리적인 공간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건 감정적으로 세상과 단절된 채 만들어낸 일종의 방어막이다. 세상은 그에게 어떤 자리도 내주지 않았고, 그는 그 결핍 위에 조심스럽게 자기만의 공간을 쌓아올린다. 그곳은 처음엔 외부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피난처였을지 모르지만, 점점 안락한 감옥이 되어간다. 연결되고 싶지만 상처받고 싶지는 않은, 인정받고 싶지만 거절당할까 두려운 그 애매한 마음의 방이다.
밥은 외로움을 피하려 방 안으로 들어갔지만, 그 안에서는 누구와도 진짜 연결되지 않는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애쓰다 보니, 어느새 관계 자체를 끊어버리는 쪽을 선택한 셈이다. 연결되고 싶은 마음과 상처받을까 두려운 마음이 충돌하며, 그는 점점 더 깊숙이 숨어든다.
그 방은 고립의 상징이지만, 동시에 세상과 다시 관계를 맺을 준비가 아직 되지 않은 사람이 잠시 머무는 자리이기도 하다. 문제는, 그 잠시가 너무 길어졌고, 그 안락함이 습관처럼 굳어졌다는 데 있다. 고립은 선택처럼 보일 수 있지만, 어쩌면 다른 선택이 사라졌기 때문에 만들어진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오랫동안 닫혀 있던 그 방은, 어느 날 뜻밖의 계기로 열린다. 누군가 억지로 문을 연 것도 아니고, 밥 스스로 결심한 것도 아니었다. 그 시작은, 옐레나가 자기 안의 트라우마를 정면으로 마주한 순간이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외면해온 자신 가짜 가족, 만들어진 역할, 누구의 대체자로만 존재해왔던 과거를 처음으로 제대로 바라본다. 누구의 동생이 아니라 나로서 존재를 받아들이는 그 고통스러운 순간에, 옐레나는 밥의 방을 찾아간다기보다 발견하게 된다. 마치 감춰져 있던 길이 처음으로 보이기라도 한 것처럼. 밥은 숨어 있었고, 옐레나는 외면하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자들이었다. 그러니 옐레나가 자신을 드러낸 순간, 그 진심은 방 너머의 누군가에게 닿는다. 마치 두 개의 고립된 섬 사이에 처음으로 놓인 다리처럼, 연결은 그렇게 시작된다.
고독을 극복하는 방식은 완벽한 팀워크나 이상적인 관계가 아니라, 서툴러도 서로를 포기하지 않는 태도에서 시작될지도 모른다. 바로 부서진 자기 자신을 인정하는 용기, 그리고 그 부서진 채로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행위다. 누군가를 이해하려는 노력, 갈등 속에서도 끝까지 옆에 서 있으려는 자세, 그것이 진짜 소속감을 만든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에게도 필요한 건, 더 많은 연락처나 더 완벽한 자기계발이 아니라,
'내가 불완전한 모습 그대로 있어도 괜찮다고 말해줄 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누군가와 함께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나 자신부터 받아들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