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는 어떻게 표출되어야 하는가?

똑바로 살아라를 통해 본 분노와 저항

by 한대웅

열기에 모두가 녹아버릴 것만 같은 날씨가 계속되는 흑인 동네에서 주인공인 무키는 마을 사람들의 추억을 공유하는 장소이자 이탈리아인들이 운영하는 살의 피자집에서 배달원 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어느 날 급진주의자인 버긴아웃은 살의 피자가게에 붙여져 있는 명예의 전당 속 이탈리아계 유명인사만 있을 뿐 흑인 인물이 없다는 점에 충격을 받아 가계에 보이콧을 선언하며, 혼자만의 시위를 준비한다. 단순한 웃음거리로 치부될 수 있는 상황은 끓을 것만 같은 날씨에 영향을 받아서인지 분노로 변하기 시작하였고, 그러한 분노는 전염되며,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이어진다, 그러한 과정 속 주인공인 무키는 상황을 지켜보며, 심적인 흔들림을 경험하게 된다.

소수자의 그릇된 연대


영화 속 등장인물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단어는 소수자성이다. 영화 속 주요 단체인 흑인, 아시안, 이탈리아이민자로 대표 되어지는 3그룹은 사회에 변두리에 살아가는 소수자성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기에 영화 속 분노의 대상은 억압받는 사회적 혹은 인종적 소수자들이 주류계급에 속해 있는 자들에게 당한 부조리를 대상으로 한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그들은 소수자끼리 다시 한번 범주화를 하며 서로를 분리하며, 또한 그들의 분노를 다른 소수자들에게 표출하며 전가한다는 점이다. 이에 관해 교육학자인 파울로 프레이리는 자신의 저서인 피억압자의 교육학을 통해 이러한 억압된 소수자들에 관해 설명한다. 그의 저서에 따르면 억압자 즉 소수자들은 자신들을 억압해 온 사회체계 및 억압자에게 자신도 모르게 동조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자신들의 삶을 그들의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자신과 같은 소수자를 위하긴 보다 자신의 경쟁자 혹은 비난 대상으로 여긴다는 점이다. 이는 곧 억압적인 사회 속 기회의 장이 좁기에 이 경쟁 속 구조적 문제를 탓하기 보다는, 다른 소수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영화의 결말부 백인 경찰에 의해 억울한 희생자가 발생하자 흑인들은 연대를 하며 분노를 표출하지만 이 분노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들의 동반자 이기도 했으면서 같은 소수자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살의 피자가게로 향해진다. 살의 피자가게에서 분노를 표출한 그들은 이제 아시안까지 위협하며 그들의 권력을 과시한다. 이에 대해 다시 한번 프레이리는 피억압자들의 내면화된 억압이라 정의하면서 억압받는 사람들이 자신을 억압할려는 자들을 모방하며, 자신과 비슷한 상황에 놓인 자들을 공격하는 형태로서 억압되는 상황의 유지를 이끌어내는 메커니즘을 일으킨다고 설명한다. 결국 영화 속 흑인들은 누구보다 억압된 상황에서 피해를 봤으면서, 아이러니 하게도 억압적 상황이 대물림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들의 다른 단체에게 하는 억압적 행위는 흔히 자유적 발걸음이라 평가받는 방법인 연대를 통해 시작됬다는 점이다.

집단적 몰개성에 대한 경고

개인적인 신념과 동기들이 뒤섞인 등장인물들은 영화의 종국에 갈수록 분노라는 감정에 휩싸여 분노라는 감정에 집단적으로 연대를 하지만, 그들은 무책임하게도 주변에 있는 것을 부수며 각각의 개성 넘치던 사람들은 분노표출이라는 하나의 목표 속 집단적 몰개성을 일으킨다. 우리는 흔히 집단이 개인보다 현명한 판단을 할 것이라 믿지만 그렇지만은 않다. 1961년 케네디 대통령이 참모회의의 결정에 따라 쿠바의 피그만을 침공하였으나 처참히 패배를 당하며, 무력침공에 대해 국제적 비난을 들었던 것을 예시로 들 수 있다.

한 문제에 대해 결정을 할 때 개인적인 결정과 집단적인 결정의 차이는 무엇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더욱 극단적인 결정이 집단적 결정에서 나타난다는 점이다. 집단적 결정은 집단의 성격에 따라 극단화 되어진다. 구성원이 전반적으로 보수적이라면 더욱 보수적이게 변하며, 모험적이면 더욱 극단적으로 변한다. 영화 속 흑인들의 연대 과정 속 살의 피자가게에 대한 손괴는 이러한 극단적인 결정을 예시로 들 수 있다. 집단토의와 같은 의사소통 수단은 집단의 극단적 결정을 부추기게 되는데 이러한 현상을 집단극화라 정의한다. 집단극화의 발생 원인은 다양하지만 사회적 정체감을 결정적 요건으로 본다. 사회적에서 정체감을 가진 인물들은 집단에 속하면서, 내집단으로 인식하게 되며 집단에 동일시하게 된다. 그러한 과정 속 내집단의 정보만 맞다고 믿으면서 그들의 결정은 극대화 된다. 흑인이냐 아니냐를 기준으로 폭력의 대상을 정당화 하면서 분노를 표출하는 그들의 모습은 이러한 집단극화에 대한 설명을 잘 보여준다.

올바른 분노는 어떻게 표출되어야 하는가


올바른 분노는 어떻게 표출되어야 하는가?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처음엔 분노를 통한 연대를 통해 시위를 일으키지만 종국에는 감정에 주체하지 못해 집단에 동화되어 주위의 모든 것을 부수면서 억압으로 인한 분노 표출을 한다. 정당한 보복이라며 합리화하며 주위를 부수며 사람들을 다치게 하는 것이 옳은 것 일까? 마틴루서킹은 폭력은 우리를 눈 멀게 하며, 사랑과 연대를 불가능하게 만든다고 말하였다. 이러한 억압적 상황 속 우리가 해야하는 저항은 단순히 억압을 하는 억압자에 대한 분노로 끝내서는 안된다. 우리가 진정으로 고려해야할 점은 억압적 상황의 탈피라는 명목하여 몰개성해지며 극단적으로 벌어져가는 집단과 스스로에 대한 저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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