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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창 Jan 21. 2024

추수감사절

나는 왜 이곳으로 왔을까?

   보스턴과 그 일대를 아우르는 뉴잉글랜드는 미합중국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콜럼버스가 첫 발을 디뎠던 신대륙은 한참 저 아래 동네이지만, 사람 사는 모습을 갖추고 나서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게 된 전쟁의 시초가 되었던 곳이 보스턴이다. 식민지에서 세금을 조금이라도 더 거두면서 내 손아귀 안에 두고 싶었던 영국에 맞서 찻잎을 항구에 쏟아부어가며 극렬히 맞섰던 그 저항의 몸짓이 오늘날의 미국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니, 그 항구 앞에 설 때마다 왜 군산이나 목포는 아니었나 하는 쓸데없는 생각도 해 본다. 그렇게 치열하게 맞서 싸워 독립을 쟁취했으면 다른 이름으로 바꿔 부를 만도 한데, 아직도 New 잉글랜드라고 한다.


   1773년의 보스턴 차 사건보다 훨씬 전인 1620년 이맘때, 메이플라워라는 작은 배를 타고 102명의 청교도들이 보스턴에서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Plymouth라는 곳에 도착했다. 원래는 더 따뜻한 남쪽으로 가려했으나, 추위를 견디고 겨울을 날 곳을 찾아 항해를 멈추게 되었다. 마침 그들이 배를 댄 바닷가 언덕에 인디언 원주민들의 버려진 마을이 있었다. 유럽에서 건너온 이민자들이 함께 배에 실어 온 천연두와 같은 전염병 때문에 수많은 원주민들이 목숨을 잃은 탓에 싸움 한 번 없이 청교도들은 겨울을 지낼 터전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처음 겪는 뉴잉글랜드의 혹독한 겨울 탓에, 버려진 인디언 마을의 부패한 시체들 곁에서 그 겨울을 살아내고 생존한 청교도들은 102명 중 53명뿐이었다고 한다. 봄이 오자 그들은 네덜란드와 영국에서 싣고 온 씨앗을 뿌리고 원주민들의 도움을 얻어 토착 식물들을 경작하는 것을 배워 그 해 늦가을에 원주민들과 함께 수확의 기쁨을 만끽하는 잔치를 벌였고 후세들은 이를 기념하여 추수감사절(Thanksgiving)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의 삶을 재현하고 보존하고 있는 Plimoth Patuxet Museums에서는 메이플라워호의 생존자들이 입었을 옷을 입고 그들이 신토불이 정신으로 가져왔던 씨앗을 뿌리면서 사백 년 전의 말씨로 마치 사백 년 전의 그날인 양 설명해 주는 안내원들을 만날 수 있다.

   이 민속 마을에서 멀리 내려다 보이는 바닷가로 내려가면 청교들이 타고 왔다는 메이플라워호의 실물 크기 모형에 올라 타 볼 수 있다. 102명의 승객들과 꽤 많은 수의 선원들이 타고 66일간의 항해를 거쳐 대서양을 건넜다고 믿기에는 너무나 작은 크기의 배다. 앞뒤로 겨우 30여 미터쯤 되는 작은 목선이다. 그보다 천오백 년 전에 지어진 로마의 콜로세움이나 이천 년 전에 지어진 아테네의 파르테논신전과 같은 거대한 건축물을 만들어 낸 문명과 기술을 다 어디로 가고, 당시로서는 매우 큰 배에 속했다는 이런 작은 배를 타고 건너왔을까. 갑판 위에 올라서자마자 만난, 가슴팍까지 내려오는 희고 긴 턱수염을 자랑하는 해설자 톰 할아버지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 배가 102명의 승객과 선원들이 타고 대서양을 건너기에 충분히 큰 배인가요?”

   “오, 아니지! 일단 이 배는 여객선이 아니고 상선이야. 요즘으로 치면 화물선이지. 그걸 빌려서 겨우 사람들이 지낼 만하게 최소한의 개조를 했던 거야.”

   “와, 그럼 그렇게 해서라도 바다를 건너야 할 만큼 절박했던 것이네요? 종교의 힘이란 참 무섭군요.”

   “응. 절박했지! 하지만, 종교 때문만은 아니었어.”

   “네? 종교의 자유를 찾아 떠난 청교도인들이 아니었나요?”

   “아, 물론 일부는 그랬지. 하지만, 이 배에 탔던 사람들의 대부분은 종교의 자유가 아니라 신분의 상승을 꿈꾸며 바다를 건넜어.”

   “우와, 이거 처음 듣는 이야기예요.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영국 교회에 반감을 가지고 종교 개혁을 부르짖던 청교도들은 사실 이미 네덜란드로 건너가서 레이든(Leiden)에 자리 잡고 살면서 종교의 자유를 충분히 누리고 있었지. 그런데 세월이 흐르자 그들의 자손들이 네덜란드인들의 삶에 동화되면서 청교도인들의 정체성을 잃어가기 시작했고, 영국의 제임스 1세와의 갈등도 심화되는 가운데 네덜란드와 스페인의 전쟁 사이에서 삶의 터전을 위협받기 시작한 청교도인들이 버지니아로 가는 배를 타기로 했어. 그들이 타고 네덜란드를 떠났던 스피드웰호는 이보다 훨씬 작은 배였는데 중간에 문제가 생겨서 영국에서 떠난 메이플라워호에 옮겨 타게 되었지. 102명 중에 청교도인은 불과 35명뿐이었어. 나머지는 영국의 하층민들이었는데, 평생 소작인으로 살다가 자식들이 또 소작인으로 사는 꼴을 더 이상 보기 싫어서 몇 년 열심히 일하면 땅을 준다는 문서에 서명을 하고 배를 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

   “그러니까 경제적 자유와 신분 상승을 원했던 아메리칸드림이었군요!”

   “그렇지. 사백 년 전의 아메리칸드림! 내 할아버지도 아일랜드에서 건너온 이민자였으니, 나도 메이플라워호의 후손들과 비슷하다 하겠지.”

   “저도 그래요. 아직 삼 개월밖에 안 되었지만요. 하하하. 그런데 이곳 학교에서는 메이플라워호와 청교도인들에 대해서 이렇게 자세히 가르치나요? 아니면 승자가 기록한 역사만 학교에서 배우나요?”

   “당연히 후자지. 그래서 여기서 내가 열심히 설명하고 있잖아! 하하하”


   미국 대륙의 건너편 태평양 연안에서 학교를 다니는 딸아이가 대서양 연안의 집으로 추수감사절 연휴를 지내러 왔다. 지난여름에 서울에서 보내고는 보스턴에서 다시 만나니 반갑기 그지없다. 자주 영상통화를 한다지만, 내 품에 안아 보는 것이 제일이다. 동생과 함께 한 나절을 준비해서 칠면조 구이를 비롯한 푸짐한 저녁상을 차려냈다. 자식 키운 보람이 있다며, 하루 종일 밥하지 않은 즐거움으로 연신 웃고 있는 아내를 바라보며 나의 추수감사절을 돌아본다. 비록 혹독한 추위나 인디언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했던 것은 아니나 지난 삼 개월의 정착기가 결코 간단하고 편안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씨를 뿌리고 거두는 노력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내 삶이 이 낯선 곳에 튼튼히 뿌리내릴 수 있도록 애쓰는 시간이었다. 사백 년 전의 그들은 종교나 경제의 자유를 찾아서 고향을 등지고 이곳에 왔단다. 나는 무엇을 찾아서 이 먼 곳에 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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