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을 감추었음을 반성한다.
미리 말하건대, 대상은 아이돌이 아니며 인형이나 실사 영화도 아니다.
처음 들어온 분들을 위해 언급하자면 나는 멍텅구리이자 대가리 꽃밭이다.
이 인간의 멍청했던 나날에 대한 반성문이 테마다.
바비. Barbie. 쨍한 핑크에 금발벽안. 완벽함의 의인화.
초등학교를 입학하기 전부터 성인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 나는 이들을 사랑한다.
오디오 파일을 만들어 하루 내내 듣고, 이름과 스토리, 성우를 줄줄 외웠으며, OST를 흥얼거렸다. 나는 '바비 팬'이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이 사실을 가족이 아닌 이들에게 이 사랑을 말한 기억은 없다. 오히려 철저하게 감추었으면 감추었지. 이유는 간단하다.
어릴 때는 유치하니까, 지금은 페미니즘을 둘러싼 괴상함 때문에.
나 바비 좋아해
이 짧은 문장이 어찌나 꺼내기 어렵던지.
내가 사랑하는 바비는 2001년부터 2015년까지(보수적으로 보자면 2012년) 마텔 사에서 제작한 바비 애니메이션 영화다.
공주와 거지, 라푼젤, 12명의 춤추는 공주들, 숲 속 친구들, 인어공주 이야기, 페어리토피아, 프린세스 스쿨, 공주와 팝스타…. 최소한 스무 개쯤은 앉은 자리에서 타이틀을 줄줄 읊을 수 있다.
내가 아는 바비는 많은 경우 분홍이었고, 남쪽 바다 섬의 아일랜드 블루였으며, 영원한 크리스마스의 빨강이자 세계적인 팝스타의 보라, 울창하고 신비로운 숲의 초록이었다.
인간이었고, 때때로 요정, 또는 인어였던 바비.
오랫동안 간직했던 꿈이 눈앞에서 무너져 내렸고, 영원할 줄 알았던 우정에 금이 갔으며, 새로운 길을 멋지게 찾아 나아가는 바비. 이들은 환상적으로 노래를 부르며 춤을 췄다. 함박웃음을 지었고, 서글픔에 눈물을 흘리고, 검과 마법을 세차게 휘두르며 화를 냈다.
이렇듯 각각 새로운 이름을 가진 바비의 이야기는 하나같이 반짝였다.
엔딩 크레딧이 전부 올라가면 나타나는 명언들을 사랑했고, 성우의 기품 있고 우아한 목소리를 사랑했다. 스크린을 한가득 메운 총천연색 세상에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그래, 바비는 내 사랑이다. 나는 도무지 이를 부정할 수가 없다. 정말, 단 1초도 이들을 싫어한 적이 없다. 처음 바비와 호두까기 인형을 본 순간부터 그랬다.
우리 로셀라가 얼마나 멋지게 왕족 대량 암살 시도를 막아내는지 아는가?
멀리아가 반인어반인간으로 서핑의 여왕이 되어 해변과 인어 왕국을 제패하는 과정이 얼마나 흥미진진한데!
코린이 삼총사와 장검을 맞대며 ‘All for one, one for all’을 당당하게 외치는 과정이 얼마나 눈물겨운지.
엘리나가 날개 없는 요정에서 최고의 요정이 되기까지 삼단 변화를 하는 이 위대한 트릴로지를 보지 못한 자, 바비를 폄훼하지 말지어다!
…라고 외치는 대신, 이 멍청이는 제 사랑을 꼭꼭 숨겼다.
유치함. 그게 뭐라고. 내 컬렉션을 보지도 않은 자들이 미숙하다며, 수준이 낮다며 지껄이는 걸 왜 신경 쓰는가. 낮으면 뭐 어때. 내가 사랑한다는 게 중요하지.
내 인생이 언제나 고급지고 성숙한 걸로 이루어질 거 같냐. 그건 헛웃음도 나오지 않는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다. 나는 멍텅구리에 대가리 꽃밭인데.
2023년 전에는 그저 부끄러워했다.
지금도 만만찮으나, 일찌감치 세상에 통달한 듯한 '있어 보이는 삶'이 그 무엇보다 중요했더랬다. 정상성과 우월함이라는 얄팍한 껍데기가 무슨 갑옷이라도 되는 양 허세로 반질반질 윤을 냈더랬다.
주류에 어색한 호응을 보내며, 그게 왜 유행인지는 전혀 감도 잡지 못했으면서. 진실로 사랑하는 대상은 이리도 명확하게 존재하면서.
그래, 값비싼 외면이다. 저딴 데 소비했던 시간과 돈을 내 삶으로 옮겨올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자기 인정과는 백만 광년쯤 떨어진 시기였다.
그때의 보편적인 인식을 언급하자면, ‘바비 = 아기들이나 가지고 노는 인형’이었다. 적어도 내 주위에는 애니메이션 바비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거기다 요즘 아이들은 인형 놀이도 잘 안 한다고 들었다.
애초에 한국에서는 미미나 쥬쥬가 시장을 차지했지, 바비는 마이너 중의 마이너. 이제는 티니핑, 아이돌 스타이던가.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인형 바비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뭐랄까, 불쾌한 골짜기? 묘하게 인형 표정이 덥다. 토이 스토리를 감명 깊게 봐서일까, 이렇게 사람을 닮은 인형은 밤에 움직일까 봐 무섭기도 하고.
이 두려움은 처키에서 메간으로 내려온 동서양 시대 불문, 유구한 종류의 것이다.
그래도 바비 애니메이션 기반 한정판 인형들 광고를 보면 불쑥불쑥 물욕이 치솟긴 한다. 아버지의 경제 교육 덕… 아닌 덕에 결제창까지 가본 적은 없다만.
하여튼, ‘바비’하면 ‘인형’인데 그것조차 비주류. 지나가듯이 툭, '나 바비 좋아해.' 언급해 봤자 상대가 떫은 표정으로 ‘어어, 바비? …아, 그래?’ 하는 대답만 들을 수 있을 뿐.
근 몇 년 새 키덜트라는 말이 떠오르며 지브리, 디즈니, 레고 등 어린 시절의 취미를 소위 ‘힙하다’라고 표현하곤 하더라. '혹시 내 바비도?' 하며 잠시 희망을 가져 보았으나, 2023년 7월 ‘그 영화’가 등장한다.
마고 로비 주연, 그레타 거윅 감독의 ‘바비’
종류는 다르지만 나는 바비 팬이다. 당연히 봤다. 한 세 번 정도. 영화관에서, OTT에서.
결론적으로 멋진 영화다. 담고 있는 의미도, 간과하고 있던 세상의 모습들도 거칠게 눈앞에 들이미는 영화. 용감하다는 수식어는 굳이 붙이고 싶지 않다. 그런 단어는 어쩌면 모욕일지도 모르니까.
나 같은 대가리꽃밭도 메시지를 어렴풋이 눈치챘으니, 얼마나 친절한 영화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사랑했던 바비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나는 또 한 번, 비겁하게 바비에 대한 사랑을 감추었다.
내가 켄의 비루한 취급을 불현듯 깨달았듯, 다른 사람들은 현실 속에서 무언가를 깨달았겠지. 그게 그렇게 불편했나 보더라.
바비 애니메이션 영화에서 켄은 없어도 되는 존재다. 몇몇 경우,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있어 봤자… 납치당하고, 부모님 말에 휘둘리고, 걸림돌이 되고, 어딘가 모자라고 비중이 공기보다 못하다.
초기 작품에서라면 바비의 스토리 최종 보상 개념으로 필요라도 했지, 바비와 숲 속 친구들(2007년 작)의 안토니오 이후로는 소위 ‘결혼 엔딩’이 나지도 않는다.
멋진 왕자님이라 동경하기엔 서민인 경우가 더 많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인간을 보상으로 얻는다면, 보통 그 존재는 아름다우며 계급이 높은 데 말이다. 그 옛날 일리아드만 보아도 그렇다.
그런데 켄의 외모에 감탄하는 장면? 왜 기억에 없을까. 인간처럼 생겨서 놀라는 장면은 나온다(바비와 숲 속 친구들). 이후 작품에서는 켄이 등장하더라도 바비의 새로운 모험(바비와 삼총사, 페어리토피아 트릴로지)으로 끝나거나, 새로운 우정과 성취(바비 패션 이야기, 비밀의 성, 공주와 팝스타)를 얻을 뿐이다.
이 일련의 과정이 정말 자연스럽다.
왜? 바비의 가능성은 무한하니까.
이 메시지가 만들어진 환경은 논란의 여지가 많으나, 그들은 실수 또는 의도로 이러한 세계를 만들어 내었다.
사랑이 인류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해 왔음을 부정할 생각은 없으나, 인류사의 모든 중요함이 사랑으로 귀결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성취와 보상은 사랑을 빼더라도 다양하다. 바비의 이야기에서는 이를 잘 보여준다.
다만, 이는 전부 바비의 몫이다. 바비가 이 세계의 주인공이니까. 켄이야 뭐… 안토니오든, 도미닉이든 각자 알아서 하라지.
이들은 2001년 최초의 작품, '바비와 호두까기 인형'에서조차 수동적으로 그려진다. 그게 켄이다. 영화의 말을 빌리자면 He is just Ken.
어린 시절 동화를 떠올려 보면, 보상이 아닌 여성 캐릭터는 대체로 능동적이다. 겨울 여왕의 겔다가 그랬고, 오데뜨가 그러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바비는 어쩌면 아주 전통적인 캐릭터 일지도 모른다.
백설공주와 신데렐라가 중요하지 프린스 차밍은 이름도 돌려쓰는 처지이지 않은가.
바비 영화는 언제까지나 바비를 중심으로 만들어질 것이다. 켄은 있을 수도 있지만, 결코 주연이 되지 못한다. 바비의 세상은 바비의 것이 맞으니까. 바비가 영원한 주인공이니까.
그렇지만 현실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는 누군가의 소유인가? 이 세계의 주인공이 정해져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YES가 아니라면, 도대체 나는 왜 그리 겁먹은 멍텅구리가 되어 사랑을 숨겼던 걸까.
무슨 찔리는 거라도 있는가, 유독 한국에서는 '페미다!' 이러면서 프레임을 씌우고, 혐오하고, 비난하기 바쁘더라.
토론할 시간도 주지 않고 강요하는데, 모니터를 뚫고 잔뜩 튄 침 냄새 맡고 있자면… 그래, 계속 그 좁은 세계에서 살아라, 소리가 절로 나온다.
스스로 찾아보지 않고 남들의 언어만 입에 담는 주장이 얼마나 공허한지. 뭐 그리 낡고 곰팡내 나는 계급론을 끼고 살고 있는지. 내가 사랑하는 바비 옆에 붙여놓기엔 이 얼마나 추한가.
나는 내 인생의 중심이다. 모두가 그렇다. 하지만 우리를 둘러싼 세계는 그 안의 모든 구성원에게 무심하다. 내가 스스로 삶을 진창으로 뻔뻔하게 유기해도 눈 하나 깜짝 않더라.
그렇다. 내 진심을 털어놓아도, 내 사랑에 당당해져도… 세계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나는 바비의 멋짐을 진심으로 말할 수 있다. 뻔뻔한 멍텅구리는 이걸 혼자만의 주장으로 남겨두지 않았다. 대가리 꽃밭답게 잘 정리해, 오픈된 장소에 무작정 공개했다. 내 사랑을 감추지 않았다.
나와 같은 메르헨을 공유하는 이들을 만날 수 있었고, 그건 꽤 근사한 일이더라.
추억은 파고들수록 사랑스러웠다. 미처 몰랐던 이스터에그들에 웃음이 나왔고, 사랑이 커졌다. 짤을 만들고, 이력을 갈무리하는 건 즐거웠다.
바비는 단연코 최고다. 그리움과 망설임은 이제 없다. 우리는 언제나 함께다. 언제나, 여전히 그렇다.
그 과정을 거쳐온 지금.
나는 내 사랑을 감추었음을 반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