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멍청한 [장애인 동생]의 반성문_상

나 하나 편하자고 수긍했음을 반성한다.

by 멍텅구리

읽기 전 경고 : 필자는 멍텅구리이며 대가리 꽃밭이다.



드라마 [더 글로리]에는 이런 대사가 있다.


너 뭐 언제까지 어릴 거야? 내후년에도 어릴 거니?


악역의 대사이지만, 드라마의 다른 몇몇 부분이 그러했듯 대중적인 공감을 자아냈다.


그래, 우리는 3차원의 존재. 시간은 흐른다. 언제나. 단지 어리기에 가진 장점들은 반드시 사라진다. 지금 건강하다고 남은 모든 미래에 팔팔, 쌩쌩할 리가 있나.


역사와 과학의 시선에서, 인류는 약자와 잠재적 약자로 이루어져 있다. 모든 인간에게는 약자가 될 가능성이 존재하더라. 예시가 궁금하다면 도서관의 900번 코너를 방문해 보시길. 하고많다. 이왕이면 300번도 같이.


남의 성공이 내 실패가 아니듯, 약자를 위한 배려는 내 권리의 침해가 아니다. 오히려 내 권리의 확장이면 모를까. 텔로미어가 닳고 세포가 스스로 사멸하는 이상 인간은 필연적으로 약자가 되기 때문이다.


지금 아무리 사지 멀쩡하고 정신이 맑은들, 30년만 지나 보라지. 2030이 5060으로 변하는 시간. 정말 운이 좋아 오직 시간만 흘러도, 당신은 곧 거울 속 자신이 어색할 것이다.


휑한 이마 가장자리에 가득한 새치와 비만 왔다 하면 쑤시는 무릎. 기억은 깜박깜박 흐려지고, 목이며 온 피부에 주름이 새겨지겠지. 기립성 저혈압은 꿈도 못 꿀 거다. 그게 올만큼 재빨리 움직이질 못할 테니까.


청년은 노인으로 자라고, 사고나 발병의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하며, 인간은 로봇이 아니니 이는 자연의 이치다.


많은 지식이 그러하듯, 진실은 때로 서글프다. 그렇다고 회피하거나 외면하면 그저 얻어맞을 뿐이다. 복지라는 영역이 특히 그렇다.


요즘 들어 자신이 영원한 젊음의 증거라는 양 행동하는 사람이 있다. 전장연의 시위는 자신과 완전히 동떨어진 세계고 저게 무슨 민폐냐며 불평하는 사람이 있다.


세상은 불공평하며 주위 환경이 한순간에 변할 수도 있음을 모르는 걸까? 중증 장애인과 같은 수준의 보호를 받은 나보다 곱게 자랐던 걸까?


참 이상한 일이지. 나는 멍텅구리이나, 저런 사람들도 나 못지않게 정말로 엄청나게 멍청하다는 건 안다. 아주 잘.

나는 스스로를 온실 잡초라고 부르곤 한다. 꽤 유난스러운 보호를 받긴 했으나, 어디까지나 ‘하는 김에’와 같은 곁다리였기 때문이다.


오해 마시길, 부모님께는 감사하고 있다. 표현도 자주 하며, 멍텅구리이긴 해도 서류상 유능한 모범생이기에 꽤 자랑할 만한 딸로 자랐다.


세상의 풍파를 모를 수 있다는 건 큰 행운이다. 다만 어떤 사람에게는 그보다 큰 불행이 있기에 이런 행운이 주어지곤 한다. 바로 우리 언니처럼. 언니는 후천적 장애인이다.


무슨 연유로 이 ‘사고’가 일어났는지, 20년이 지난 지금도 자세히 알지 못한다. 그때 2살이었던 나만 모른다. 누구도 그 당시를 언급하지 않으니까.


종교도 없고, 무속도 안 믿고, 화장실 쓰레빠도 팡팡 벗는 우리 집에 존재하는 유일한 금기다. 당연히 이는 어떠한 눈가림도 되지 못한다.


그야, 그 결과가 당장 우리 곁에서 숨 쉬고 있는 걸. 투정을 부리고, 발을 질질 끌며 깔깔 웃다가도 매일 두 번씩 산더미 같은 약을 삼키고 있는 걸.


요즘은 장애인 등급이 바뀌었다던데, 언니는 2급이었다. 그러니까 중증.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사지는 물론 뇌에도 이상이 있다.


부모님은 언니에게 온갖 종류의 보호를 폭포수처럼 들이부었다. 나는 그 옆에 서 있다 이리저리 튀고, 졸졸 샌 양을 삼켰고. 불평할 생각은 없다. 대가리 꽃밭이자 멍청이인 나에게 아주 적절한 조치였다.


누군가에게 지나친 보호는 벗어나고픈 족쇄일 테지만, 멍텅구리에겐 안락한 매트리스일 뿐이다.


나는 책과 노래를 좋아하는 아이였고, 시끄럽거나 귀찮은 건 딱 질색에다 학원도 필요 없었다. 학원 갈 시간에 바비 영화를 하나 더 봐야지, 밖에 왜 나가?


이 얼떨결의 교육 방침 덕에 해낸 게 참 많다. 이건 다른 반성문에서 차차 풀 이야기.


요약하자면, 난 정말 행운아란 거다. 그런데 존경하는 부모님이지만, 나와 생각이 다른 지점이 하나 있다.


나는 언니가 싫다.


영국에는 24시간도 채 머물지 않았으면서 물을 ‘오우터’하고 발음하는 게 듣기 싫다. 혀를 잔뜩 꼬아가며 ‘윙가르디오 레비오우사’하면 스투페파이를 날리고 싶다.


저렇게 토종 한국인 영국 악센트로 말하면 헤르미온느(1학년)한테 엄청 꼽 먹을 거다, 분명. 어우, 보기 싫어.

물론 언니도 나를 싫어한다. 싸가지 없고 부모님께 대가리 굴린다고.


흥, 집에 둘만 있을 때 밥 챙겨준 사람이 누군데. 빨래 누가 개고, 밥 먹고 난 그릇 누가 설거지 하는데.

(내가 한다!)


모르는 건지 모르는 척하는 건지. 그러면 나는 더더욱 얄밉게 행동할 수밖에. 따까리에겐 따까리의 싸움 방식이 있다 이거야.


동생이 언니를 왜 싫어하냐고? 진심으로 묻는 건가?


일화도 참 많고 많다. 그중 황당했던 일 탑 5 중 하나를 풀자면, 단연 이거다.


주에 15 ~ 32권 정도 책을 읽곤 했던 초등학교 시절. 내 방에는 놓을 공간이 없었다. 그래서 빌린 책을 거실에 두었다가, 두세 권씩 방에 들고 갔다.


반납일이 되어 책을 챙길 때였다. 책가방(진짜 책만 담는 가방)에 하나씩 담는데 수가 안 맞는 게 아닌가.


또르륵. 등에 식은땀이 흐르던 순간이었다.


‘… 그러고 보니 왜 이렇게 빨리 다 읽었지?’


대체로 재밌는 책을 골라내는 내 손이지만, 그때 빌린 아이들은 유달리 천천히 종이가 넘어갔더랬다. 그럼에도 반납일이 되기 전에 모두 펼쳤다니. 이상하지 않은가?


…그러나 반납 당일은 의문을 가지기엔 너무 늦은 시기였다.


그래, 책‘들’은 언니 방에 있었다. 개중에는 시리즈물도 있었다. 나는 그 시리즈를 결국 완독 하지 못했다.


‘그깟 거 다시 빌려오면 되지, 뭐가 문제냐!’ 할 수도 있겠다. 여기서 도서관 조언을 하나 하자면, 대출 카드를 가족으로 묶지 마시길. 연체 먹은 책을 다른 가족 구성원의 카드로 다시 빌리는 꼼수가 먹히지 않는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그때는 그랬다.


그날은 하필 일요일이었고, 월요일은 도서관 휴관일이며, 평일은 학교에 가야 한다. 학교에서 읽을 새로운 책이 필요하다! 나는 내가 고른 책‘들’을 읽지도 못한 채 반납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다시 읽으려면 최소한 일주일은 기다려야 하고, 시리즈물의 경우 7권을 읽지 않은 채 바로 8권에 넘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책이 왜 여기 있어!


놀라서 물으니, 돌아온 답은 이러했다.


가져가든가.


아오, 진짜. 때릴 수도 없고. 언니는 때리면 진짜로 죽는단 말이다.


저 무신경한 인간이 말도 없이 책을 가져가 놓고, 읽고 나서 밖에 꺼내두지도 않은 데다 사과 한 마디 없었으니, 초등학생 멍텅구리가 얼마나 서러웠겠는가.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기억을 되새기니 가슴이 빠듯하게 조여올 지경이다. 심지어 책 제목들도 기억난다.


와, 아직까지 알고 있는 줄 몰랐는데. 뇌는 참 대단하다.


읽지 못한 채 반납한 책들을 다시 데려오긴 했으나, 자꾸 그 당시 상황이 생각나 푹 빠져들 수가 없더라.


꼭 한 번 역지사지를 해주고 싶어, 드물게 언니도 책을 고를 때를 기다렸다.


복수는 보기 좋게 실패했다. 언니는 빌려봤자 5권이라서, 하나만 가져가도 티가 엄청 나더라. 언니는 책 놓는 곳이 자신의 방 안에 있어서 몰래 빼갈 수도 없었고.


이 사건 이후, 거실의 제일 조그마한 책장을 내 방에 들고 왔다. 2평 조금 안 되던 방은 발 겨우 디디는 장소가 되었지만, 다시 이런 일이 생기지는 않았다. 집착하듯이 책 권수도 계속 확인했으니까.


그래, 나는 언니의 이런 면모와 욕이 잔뜩 섞인 랩이 싫다. 끝도 없이 중얼거리는 혼잣말이 싫다. 우리는 안 맞는 사람이다.


서로 말없이 자신의 물건을 건들면 왁왁 싸우고, 가아끔 의기투합했다가도 사소한 논쟁으로 팩 토라지고. 지금은 냉전 상태다. 많은 따까리들이 그러하듯, 나도 언니가 싫다.


이 세상의 모든 동생들이여, 참으로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노릇이지 않은가. 언니는 한 번이라도 동생을 원한 적이 있지만, 나는 손위 자매를 소망한 적이 없단 말이다! 태어나 보니 있더라!


… 여기까지, 독자분들이 보시기엔 어떤지 궁금하다. 이 일화들에 장애인이라는 개념이 느껴지는지 묻고 싶다.


가장 오래된 기억에서조차 이미 언니가 장애인인 나로서는 객관적으로 파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인터넷에 올라온 자매 일화를 보면 공감할 때가 많은걸. 평범하게 사이 나쁜 자매 아닌가.


나는 다른 사람들과 언니의 차이점을 모른다. 싫은 구석이 분명 있다만, 그건 다른 사람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언니는 적어도 담배를 안 핀다.


내가 모르는 게 대체 뭘까.


왜 내 또래와 그 부모가, 우리의 조부모님, 부모님, 선생님과 사회마저… 우리를 다르게 대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반에 선물을 돌릴 때 우리 반에서는 고맙다는 말이, 언니 반에서는 더럽다는 말이 나왔다. 뭐가 그렇게 다르길래.


그게 대체 뭐길래.


유치원 때는 내가 특별한 줄 알았다.


친해지고픈 아이에게 비밀이랍시고 웃으며 속삭이곤 했다. 어른들도 소곤소곤 말하는 일이라서, ‘우리 언니는 장애인이야.’하면 누구든 내게 주목하고 관심이 와서.


참 멍텅구리다운 짓거리지 않은가.


그게 우월감과 값싼 동정인 줄도 모르고. 멍청하긴.


철없이 서러워도 했더랬다.


내가 더 어린데 왜 언니를 챙겨야 하지. 다른 애들은 언니 오빠가 지켜준다는데, 왜 나는 내가 언니를 지켜야 하지. 학교에서 언니 이름을 말하면 왜 떨떠름한 ‘네가 그 oo이 동생이구나….’ 뒤에 이상한 시선이 따라붙지?


하 편에서 계속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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