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퇴직금을 내가 직접 운용한다.
퇴직연금은 내 자유와 시간을 바꿔서 벌어온 돈이다. DC형 퇴직연금의 가장 큰 특징은 그 돈을 회사나 금융사가 아니라, 내가 직접 관리하고 운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DC형에서는 퇴직금이 자동으로 굴러가지 않는다. 어디에 둘지, 어떻게 운용할지는 전적으로 본인의 선택에 달려 있다. 이 점이 부담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반대로 말하면 내 퇴직금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투자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다는 의미다.
여기에 DC형 퇴직연금만의 중요한 혜택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세금이다. DC형 퇴직연금 계좌 안에서 발생하는 매매차익이나 배당에 대해서는 일반적인 증권 계좌와 달리 즉시 세금을 내지 않는다. 바로 '과세이연(Tax Deferral)'이다. 퇴사 후 IRP 계좌로 옮겨 계속 투자를 하게 되면 55살 연금을 받을 때까지 세금을 내지 않고 투자를 계속 이어갈 수 있다.
국가가 제공하는 금융 혜택의 본질은 대부분 ‘지원금’이 아니라 세금을 걷지 않거나, 나중으로 미뤄주는 방식이다. DC형 퇴직연금 역시 같은 구조다. 이 차이는 처음에는 크게 느껴지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운용하는 금액이 커지고, 시간이 길어질수록 세금을 내지 않고 굴린다는 점은 복리 효과에 매우 큰 차이를 만든다.
DC형 퇴직연금은 수익률을 더 높여주는 마법 같은 계좌가 아니다. 대신, 같은 투자라도 덜 새어나가게 만들어 주는 계좌다. 이 점을 이해하는 순간, DC형 퇴직연금은 ‘귀찮은 제도’가 아니라 내가 활용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기 투자 도구로 보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DC형 퇴직연금은 직접 운용할 수 있고, 세금 측면에서도 분명한 장점이 있지만 대부분은 그렇게 활용되지 않고 있다. 2024년 3분기 기준, 퇴직연금 적립금은 약 431조 원에 달한다. 그중 약 82%, 금액으로는 350조 원이 넘는 자금이 원리금보장성 상품이나 예금에 머물러 있다.
이 돈들은 손실 위험은 거의 없지만, 사실상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는 상태다. 시간은 흐르지만 자산은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물가 상승률을 고려하면 사실상 실시간으로 그 가치가 깎이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문제는 사람들이 퇴직연금을 중요하지 않게 여겨서가 아니다. 대부분은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고, 괜히 건드렸다가 잘못될까 봐 아무것도 하지 않는 선택을 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선택하지 않는 것도 선택이다. 그리고 퇴직연금에서는 그 선택의 결과가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누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