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감정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마음
감정에 휘둘리면 사람은 정신을 똑바로 못 차린다. 특히 부정적인 마음을 먹고 잡생각을 곱씹고 또 곱씹을수록 더 나쁜 상황에 빠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예전에는 그런 경험을 달마다, 해마다, 아니면 매일매일 했던 적도 있었다. 감정에 쉽게 치우치다 보니, 기분이 괜찮거나 좋을 때는 한없이 긍정적이어서 모든 것이 밝고 깨끗해 보이는 희한한 경험을 했다. 하지만 반대로는 극단적으로 깊은 터널에 한없이 들어갈 것 같은 사람처럼 우울한 마음, 나쁜 마음, 욱 하는 마음이 들 때 모든 것이 엉망진창인 최악의 경험을 했다. 사람의 감정이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평정심을 가져라.'라는 말은 들을 때는 쉬울 것 같아도 행할 때 제일 어렵다. 이는 나이를 먹을수록 더 깨닫게 된다. 한때 일의 진행이 잘되어가다 가도 위기에 흔들리는 마음을 바로 잡지 않아서 나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역대 에피소드가 몇 개 있었다. 그 경험을 자주 겪으니 결국에는 습관이 되어버린 것처럼 어디론가 피하거나 도망을 가게 되었다.
어쨌든 현재는 무엇을 바라지도, 무엇을 가지고 싶지도, 무엇을 해내도 싶지도 않다.
2025년 9월 20일 해파랑길 9코스를 걷기를 도전했다. 9월 1일부터 중순까지도 8월처럼 날씨가 엄청 덥거나, 비가 억수로 쏟아져 무슨 일이 벌어질까 봐 무서워서 못 갔었다. 특히 10월까지 덥다는 소문도 있어서 밖에 나가기가 더 무서웠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9월 중순부터 일교차가 점점 커지기 시작하더니 나의 건강은 오히려 더 나빠졌다. 30년 넘게 경험했으나 나의 약점 일교차 그걸 까먹고 있었다니.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추워서 기온차가 큰 탓에 건강 밸런스가 무너진 탓에 온몸이 아파 밤새 끙끙 앓았다. 늦게 9월 20일에 시작을 했다. 더 이상 미룰 수는 없었다.
'오늘은 비가 왔다 갔다 할 수 있다.'는 기상청 예보를 듣고 바로 출발을 했다. 해파랑길 9코스, 길이 19.2km, 소요시간 약 7시간, 난이도는 보통. 길이가 20km라는 것을 안 뒤로 조금은 겁이 났다. 특히 그날은 엄마께서 병원을 몇 번 갔다 온 뒤에 몸이 완전히 회복이 되지 않는 상태에서 걷기 시작했던 날이었다. 엄마가 너무 걱정이 되어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오늘도 그냥 가지 말까.'
사람의 마음은 갈대와 같다. 나의 이 변덕스러운 마음을 고치려면 다른 방법이 없이 '마음 수행'을 꼭 해야 한다. 나는 마음수행을 '걷기'로 정했다. 다행히도 울산에서 걷기는 나에게 다양한 괴로움뿐만 아니라 즐거움까지 덤으로 주고 있어서 매 순간 걸을 때마다 기대되고 설레게 해주는 존재였다. 이번 9코스는 꽤 장시간동안 걷게 된다. 거의 20km, 약 7시간을 걸어야 한다. 주요 지점과 볼 곳은 일산해변입구 -> 현대중공업 -> 주전봉수대 -> 주전해변 -> 정자항까지이다. 우리 모녀는 울산시외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일산 해수욕장' 근처에서 출발을 했다. 길을 걷는 그 장소에는 현대중공업 공장이 멋들어지게 줄지어져 있었다. 중공업 내부에 지키는 분들이 계셔서 자세히 안에 들여다볼 수는 없지만 겉모습만 보더라도 너무나 멋있어서 사진을 몇 개 찍었다. 개인적으로 내가 볼 때 울산은 자연과 산업화된 도시가 어우러진 최고의 지역인 것 같다. 4코스부터 9코스까지 걸어보면 바로 알 수 있다.
현대중공업 공장들을 지나면 작은 공원이 하나 나오는데 거기서부터는 산행길이 시작이 된다. 9코스에서는 총 2개의 산을 등산한다. 그때부터 나는 흔들리는 마음을 내려놓기 어느 정도 시작한 것 같다. 산행이 시작되는 순간에는 마음을 가다듬고 시작했을 때와, 반대로 가기 싫고 힘들 것이라는 마음을 가지고 시작했을 때, 그 완성도가 천지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물론 날씨, 습한 정도, 산길 상태도 중요하지만 말이다.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을 바로 알고 싶다면 산을 타보면 된다. '오늘 내가 어떤 마음을 가졌고 어떤 상태인지'를 바로 알 수 있다. 저번에 8코스 때 밥을 먹고 피곤함을 느껴 몸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것은 산행을 할 때 더 심해져서 결국 바닥에 주저앉아서 약을 먹을 수밖에 없는 상황까지 갔었다. 그만큼 산행 시에는 내가 오늘 무슨 상태인지를 바로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사전에 몸과 마음을 차분하고 가지런하게 정리된 상태에서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
코스의 첫 번째 산은 울산광역시기념물 제18호로 지정되어 있는 '남목마성'과 '봉대산'이 함께 있는 산이다. 처음에 산에 올랐을 때 정갈하게 쌓여있는 돌담과 함께 귀여운 말 캐릭터가 몇 개가 벤치옆에 놓여 있었는데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여기가 남목마성인가 싶었다. '마성'은 말이 도망가는 것을 막기 위해 목장 둘레를 돌로 막아 쌓은 담장이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쓸 말을 기르기 위해 주로 해안가나 섬 등을 중심으로 200여 개의 목장을 설치했다고 한다. 그중에 하나가 울산에 있는 남목마성이다. 돌담을 잘 쌓아둔 덕분에 산이 예쁘게 보이는 효과가 있었다. 엄마께서도 이런 산은 처음 보았다며 만족해 하셨다.
그렇게 엄마와 나는 봉대산과 봉수대를 복원해 놓은 봉대산 주전봉수대까지 수월하게 등산을 했다. 잠시 쉰 다음 산을 성큼성큼 내려오니 주전패밀리 캠핑장에서 사람들이 텐트를 치고 주말을 즐기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벌써 이게 끝인 건가?' 날씨가 전보다 선선해서 그런지 예전에 습하고 더운 날씨에 산행을 했던 때와는 완전히 다른 경험을 했다. 선선하고 모기도 없고 바람도 살랑살랑 불었을 때는 산행과 트레킹은 그야말로 최고의 선물을 받는 느낌이었다. 아, 정말이지 환경이 좋을 때 모든 것은 수월하고 쉽게 해결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식주가 완전히 갖추어져 있으면 마음은 편할 것이고, 이는 나를 그리고 우리를 더욱 잘살게 해 줄 것이다. 하지만 의식주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거나 적어도 하나라도 결핍이 있다면, 이는 평생 나를 괴롭게 만드는 요인일 될 것이다.
하지만 주변의 환경으로 인간의 마음이 요동치는 일은 다시 생각해 보면 끔찍하다. 요즘에는 주변환경에 대해 의존이나 기대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환경이 언젠가는 내 것이 아님을 알고 곧 사라질 수 있다고 가능성을 열어보는 것이 나의 삶에 유리할 수 있다. 굳이 환경이 좋지 않더라도 마음을 평온하게 할 수 있는 나만의 길을 찾고 행하는 것이 제일 지혜롭게 사는 방법일 수도 있으니까.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겉모습이 부자인 것이 아니라 마음이 부자인 것처럼 풍족함을 가지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인 걸까. 어릴 적 외가 친척집에 갔을 때가 생각이 난다. 그때 추억은 따뜻해서 잊을 수가 없는데, 집이 작다는 점이 나에게 얼마나 아늑함을 주는지에 대한 행복한 기억이었다. 실제로는 10평도 안 되는 아주 조그마한 집이었지만 아담하고, 아늑하고, 또 사촌 언니가 가지고 있는 물건들에 대한 아기자기함을 가지다 보니, 마냥 순수하게 그 외가 친척집에 갈 때마다 그리고 그 집을 방문해서 며칠밤을 지낼 때마다 즐겁고 행복했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다. 이제는 어른이 되었지만 약간의 작은 것에 순수하게 좋아했던, 그저 마음만은 풍만했던 그때 그 어린아이로 돌아가고 싶다.
실제로 걸어보니 9코스는 긴 코스이지만 무난했다. 마음을 놓고 걷기 시작하면 어느덧 금방 도착을 할 수 있었다. 울산 12경 중 하나인 '주전몽돌해변'은 약간 흐린 날씨에도 멋져 보였다. 나는 사진을 찍거나 동영상으로 흐린 날씨 속 바다와 산의 자연스러운 만남을 남기기 시작했다. 마음에서부터 여유를 가지니 불안감이 어느덧 눈 녹듯이 사라지고, 생각 정리가 천천히 되어갔다. 어느 정도 마음은 깔끔한 상태로 유지가 된 채로 걷기가 가능해졌다. 그냥 머리가 서서히 비어 가는 상태로 걸어간다는 것. 머리가 복잡한 요즘 사람들에게 걷기 하나만으로 마음에 평화가 올 수 있다면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돈도 별로 들지 않고 말이다.
어느덧 내가 꼭 가보고 싶었던 식당에 금방 도착을 했다. 맛도 가격도 별로 따지지 않았다. 이게 맛있을까, 저게 맛있을까, 고민하지 않고 음식을 엄마와 나 각자 하나씩 골랐다. 그리고 맛있게 먹었다. 음식이 따뜻한 데다가 배에 부담이 가지 않을 정도로 포만감이 있어서 음식을 다 먹고 난 뒤에는 만족감이 들었다. 음식의 양이 적었지만, 그것 나름대로 좋았다. 걸을 때는 너무 푸짐하게 먹는 것은 위와 장에 부담이 갈 뿐 오히려 배아픔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원래 해파랑길을 가면 배가 자주 아픈 스타일인데 길고 긴 주전몽돌해변을 걸으면서 복통이 없고 오히려 속이 편안했다.
그렇게 걷고 나서 산을 한 번 더 올랐다가 내려가니 어느덧 종점인 '정자항'에 도착을 했다. 벌써 도착을 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정말 도착을 한 것인가?' 이번 9코스는 난이도가 쉬운 코스가 아닌 등산길이 2번이나 있어서 '보통'의 난이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난하게 갔다는 것은 선선하고 흐린 날씨가 많이 도왔지만 내가 마음을 놓았기 때문이라고 생각이 든다. 법륜 스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조급하게 생각하면, 마음을 좁히면, 온갖 것이 다 문제이다. 그런데 탁 놔버리면 아무런 문제가 안될 수 있다.'
그날 날씨는 비 예보가 있었다. 비가 좀 내렸지만 금방 그쳤고, 그 뒤로는 흐렸다가 오후쯤에는 햇빛이 나왔다. 9코스를 시작하기 전에는 온갖 걱정을 했다. 혹시라도 비가 너무 폭우처럼 내려서 우산이 날아가면 어쩌나. 빗길에 미끄러져서 넘어지면 어쩌나. 끝까지 완주를 하지 못하면 어쩌나. 산길에 넘어지면 어쩌나. 등등 끝이 없는 생각들과 걱정들과 고민들의 모습들을 계속 머릿속과 마음속에 끝도 없이 그림 그리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우울감과 부정적인 마음이 한순간에 갑자기 오기 시작했다. 순간 이대로 마음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바로 길을 걷기 위해서 버스에 몸을 실는다. 차라리 걷기에 집중을 하기 위해서다. 어쩌면 해파랑길을 가는 것은 머릿속에 있는 잡념들을 잊기 위해 시작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길을 끊임없이 걷는 순간 내 정신과 몸은 하나가 되는데 그 느낌이 너무나도 만족스럽기 때문이다. 일을 할 때는 정신과 몸이 하나 되어 있기보다는 따로따로 놀 때가 있어서 오히려 괴로움의 연속이었다. 몸은 열심히 일하지만 머릿속은 고통을 느껴 더 이상 일은 하기 싫다는 마음이 들어 밸런스가 맞지 않는 경험을 매일매일 경험해야 했다. 신체적으로도 피곤함이 끝도 없이 찾아왔다. 끔찍했다. 하지만 걸을 때만큼은 그렇지 않다. 신기하게도 걸으면서 내 성격은 무던해졌고 남의 시선에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다. 원래의 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얼마나 나의 모습이 그리웠던지. 나는 그래서 지금은 일을 그만두고, 복잡한 마음을 두고, 욕망 섞인 마음을 두고, 에너지를 일으켜야 하는 마음을 잠시 두고 그저 걸을 뿐이다.
집에 돌아오는 길은 버스로도 2~3시간이나 걸린다. 이때도 조급한 마음을 가지지 말고 마음을 내려놓고 창밖을 보거나 휴대폰으로 음악을 듣는다. 상상의 세계로 빨려 들어갔다가 잠에 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잠을 한숨 잔다. 1시간 뒤에 눈을 뜨고 다음에 갈 해파랑길 10코스를 검색해 본다. 10코스는 드디어 경주를 만나게 되고 경주 바다를 느낄 수 있다. 기대되지만 이때도 마음에 설렘을 너무 가지지 않으려고 한다. 너무 기대하거나 설레면 마음이 들뜨고 들뜬 마음은 실제로 경험했을 때는 오히려 기대했던 것보다 덜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마음을 깨끗하게 정리된 상태에서 버스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9코스에서 마음을 내려놓고 행동을 하고 길을 걸었던 결과는 만족 그 이상이었다. 집에 와서 오랜만에 마음이 고요한 상태에서 잠을 푹 잘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