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파랑길 19코스, 바람이 가진 의미

영덕 블루로드와 바람

by youlive


춥다.


겨울의 추위는 나의 새벽 정신력을 끊임없이 시험한다. 새벽에 밖으로 나가보라. 어찌 춥지 않겠는가. 정신을 다잡고 패딩을 입고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집을 나서면, 생각보다 견딜 만하다고 느끼는 순간도 있다. 하지만 곧 거친 소리를 내며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겨울의 진짜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바람은 살을 에듯 스치고, 추위는 마음까지 오그라들게 만든다. 집으로 다시 들어가야 하나 망설이며, 괜히 나선 것을 후회하기도 한다. 내가 겨울을 그리워하면서도 동시에 오지 않기를 바라는 이유는, 귀와 마음을 동시에 파고드는 그 차가운 바람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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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깊어질수록 엄마의 건강이 더 걱정된다. 해파랑길 코스를 하나씩 늘려갈수록 절뚝이는 엄마의 걸음이 눈에 밟힌다. 평소에도 걷기를 좋아하시지만, 하루 25,000보 가까이 걷는 해파랑길은 발과 종아리, 무릎과 허벅지에 분명 무리가 간다. 최근에는 무릎인대가 조금 늘어나 주사를 맞아야 할 것 같다고 하셨다. 그러면서도 병원 가는 일은 자꾸 미루신다. 내가 콧물만 훌쩍여도 병원에 가야 한다며 등을 떠미는 분이, 정작 본인의 몸은 잘 돌보지 않으신다. 작년 4월부터 이어진 두통도 여전히 마음에 걸린다. 겨울이 되면 엄마의 몸도 조금 더 약해지는 것만 같다. 그런데도 엄마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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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파랑길이 중독이 된다니까. 어찌나 재밌는지."


해파랑길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 듯하다. 한 번 걷고 나면 다시는 못 오겠다고 다짐하며 돌아서버리는 사람, 그리고 똑같이 다시는 못 오겠다고 말하면서도 다음 날이면 또 가고 싶어지는 사람. 우리 모녀는 아마 후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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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파랑길은 바다와 어촌, 펜션과 카페가 끝없이 이어지는 길이다. 그 반복을 지루하게 느끼면 힘들고, 그 속에서 작은 변화와 소소한 행복을 발견하려 하면 즐거워진다. 스쳐 지나가는 바람 한 줄기에서조차 위안을 찾을 수 있다면, 이 길은 결코 단조롭지 않다.


해파랑길 19~20코스는 영덕 블루로드로도 불린다. 19코스는 블루로드 1~2코스, 20코스는 3코스에 해당한다. 19코스는 총 15.4km, 소요 시간 약 6시간, 난이도는 ‘쉬움’으로 표기되어 있다. 화진해변에서 출발해 장사해변과 남호해변을 지나 강구항과 강구버스터미널까지 이어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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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기상으로는 쉬움이지만, 그날은 그렇지 않았다. 18코스를 마치고 19코스를 시작하려던 순간부터 몸이 유난히 시렸다. 분명 날씨는 좋다고 했는데, 어느새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었다. 걷다 보니 바람이 등을 밀어내기도, 몸을 가로막기도 했다. 겨울의 바람은 여름과 다르다. 여름 바람은 더위를 식혀주지만, 겨울바람은 온화한 기운마저 시샘하듯 앗아간다. 꽃샘추위처럼, 방심한 틈을 노려 세차게 몰아친다.


그날 우리의 작은 바람은 단 하나였다. 점심에 뜨끈한 국물을 먹는 것. 한참을 걷다 마침 해물짬뽕 전문점을 발견했다. 얼큰한 국물을 한 숟갈 떠먹는 순간, 온몸이 풀리는 듯했다. 역시 사람은 먹어야 산다. 배가 채워지니 마음도 조금은 단단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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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고 다시 걷다 보니 장사해변과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공원이 나왔다. 6·25 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을 돕기 위해 이곳에서 장사상륙작전이 전개되었고, 북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데 성공한 장소라고 한다. 오랫동안 역사 속에 제대로 기록되지 못하다가, 1997년 좌초된 문산호가 발견되며 세상에 알려졌다고 한다. 그곳에서 엄마가 말했다.


"여기, 너 어릴 때 와봤던 곳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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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초등학생 시절, 가족 캠핑을 왔던 장소가 바로 이곳이었다는 것이다. 아빠 모임에서 지도를 보며 찾아왔던 해수욕장. 잊고 있던 기억이 불쑥 떠올랐다.


"그때는 솔직히 오기 싫었는데, 지금 와보니 기분이 새롭다.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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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장소도 시간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가 된다. 그때는 힘들었어도, 지금은 추억이 된다. 인간의 마음은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고, 갈대처럼 흔들린다. 나의 바람은 단 하나다. 지금 무릎이 아파 절뚝이며 걷는 엄마가 다시 건강해지는 것. 엄마가 바라듯 해파랑길 50코스를 완주하는 것. 세차게 불던 이 날의 바람도 훗날 웃으며 떠올릴 수 있기를 바라는 것.


구계항을 지나 걷던 중, 엄마의 무릎 통증은 더 심해졌다. 우리는 쉬었다가 걷고, 또 쉬었다가 걷기를 반복했다. 결국 엄마가 가보고 싶어 했던 삼사해상공원은 들르지 못한 채 강구버스터미널 쪽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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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은 블루로드만큼이나 영덕대게로 유명하다. 그러나 겨울임에도 거리는 한산했다. 줄지어 선 대게집들 사이로 손님은 많지 않았다. 코로나 이후, 많은 것이 예전 같지 않다. 모든 것은 바람처럼 스쳐 지나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숙소에 도착할 즈음 바람은 더욱 차가워졌다. 나 역시 최근 발목 통증이 재발해 걷기가 쉽지 않았다. 19코스를 마무리하고, 그저 따뜻한 방에서 푹 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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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도 힘들지 않은 코스는 없었다. 고통을 견디는 일은 일상과도 같다. 거기에 차가운 바람까지 더해지면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노력할수록 더 힘들어지는 순간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생각한다.


이 또한 하나의 추억이 되겠지.

그 바람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해파랑길을 계속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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