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다면, 할머니는 할머니의 인생을 선택할까?
2022년 눈이 소복히 쌓인 어느 겨울날 아침, 나의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엄마의 엄마, 그러니까 외할머니가.
그 전날 저녁에 마지막으로 받은 전화는, 일산에 있는 호스피스에 계신 할머니를 만나러 가던 중인 엄마 아빠에게서 온 연락이었다.
'방금 이모한테 전화가 왔어. 상태가 많이 안 좋아지셨다고. 우리 지금 가는 중이야. 너도 시간 되는대로 와. 앞으로 시간이 많을 것 같지 않아, 할머니가.'
그때 나는 독립해서 혼자 살고 있었고, 저녁 산책을 하던 중이었다.
펑펑 내리는 눈을 보며 소월로를 따라 걷다가 받은 그 전화에, 나는 알겠다고 대답하고, 다음날 시간이 되는대로 들르기로 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길에 가만히 서있었다.
인간의 뇌는 멀티태스킹을 못 한다더니. 그 말이 맞나 보다.
그리고 아침에 눈이 뜨이자마자 받은 연락이, 할머니가 방금 돌아가셨다는 아빠의 카톡이었다.
상복이랄 게 없었던 나는 아빠의 양복이라도 가지러 본가에 들렀다 장례식장으로 가야 하나를 고민했고,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몸을 데우려 들린 집 앞 카페에 앉아 그 비현실적인 순간에 대해 생각했다.
30대 초반이었던 그 무렵, 내가 가깝다고 할 수 있는 사람 중 죽은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손에 꼽아봤자, 친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 정도.
꽤 오래 병상 신세를 지고 계시던 친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유학을 떠난 지 얼마 안 된 참이었기에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고, 그로부터 몇 년 후 외할아버지가 세상을 떴을 때도 나는 다른 곳에 있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눈으로 보지 않고, 내 피부로 느낀 적이 없는 장례식---곧 누군가의 죽음, 그리고 추모라는 건 내겐 그때까지 정확히 알 수 없는 무게와, 알 수 없는 색들로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렇게 들은 할머니의 부고 소식은 참 이상했다.
사람이 죽었는데, 그것도 나와 피가 이어진 사람이 죽었는데, 나는 입을 옷을 고민하고 있다니.
그냥, 뭔가 이상했다.
나는 카페에 앉아 아주 뜨거운 커피를 조금씩 마시며, 본가에 가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확인하고, 혹시 근처에 사는 사람 중 내게 상복을 빌려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를 고민했다.
그러다 도착한 아빠의 문자에는 사촌이 고용한 상조회사에서 상복을 빌릴 것이니 사이즈를 알려달라는 내용이었고, 나는 그대로 일산으로 가는 버스를 타려, 며칠 동안 필요할 짐을 챙겼다.
짐을 챙겨 집을 나서기 직전, 동네 친구에게서 문자가 왔다.
지방에 계시는 어머님이 고등어자반을 주셨는데, 오늘 시간이 있으면 들러 나누어주려고 한다고. 혹시 고등어자반, 좋아하냐고.
나는 신발을 신다 말고 잠시 현관에 멈추어 서서 그 문자를 들여다보다가, '고등어자반은 좋아한다. 고맙다. 근데 오늘은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다.' 라는 내용의 답을 했다. 그리고 생각해 보니 아직 주변 친구들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지금 할머니 장례식장에 가는 길이고, 며칠간 집을 비울 것 같다.' 라고 추가로 메시지를 보냈다. 사실 친구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었지만, 혹시라도 내가 없는 동안 집에 누가 가봐야 하는 일이 생기면 (그전 해에 보일러가 얼어 엄청나게 고생한 기억이 있었다) 누군가는 내가 집을 비운다는 걸 알아두어야 할 것 같아서였다.
그렇게 일산으로 가는 버스에 탄 한 시간 반 남짓한 시간 동안, 내 심장은 내내 콩콩콩, 뛰었다.
기분이 정말 이상했다.
나는 할머니를 좋아했지만, 근 몇 년간은 들리지 못했었다.
마지막으로 할머니를 뵀을 때, 할머니는 그로부터 몇 달 전인가 내가 생각 없이 들고 가서 '심심하면 해 보시라'고 내민 색칠 책과 색연필 세트를 가지고, 열심히 칠을 하고 계셨다.
"요거, 요거, 다 내가 한 거라니께." 라며 자랑스레 내민 할머니의 손에 들린 페이지들은, 같이 있던 사촌들도 나도 깜짝 놀랄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림이라고는 코로나가 터지기 전까지 다니시던 노인 학교에서 일기용으로 그린 게 다였기에, 꽁지를 돌려 쓰는 크레파스가 아니라 연필식 색년필은 연필깎이로 깎아 써야 한다는 것과, 무작정 꾹꾹 눌러 색을 채워야 하는 게 아니라 섬세하게 기울여서 쓰면, 또 지우개로 조금씩 지워가며 색을 더하면 그라데이션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도 내가 책을 전해드리며 30분에 걸쳐 설명해 드린 날 처음 알게 되신 거였는데.
아흔이 넘어 처음으로 펼쳐본 화려한 식물과 동물이 복잡하게 그려진 색칠책을, 할머니는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따스함과 활기가 넘치는 색들로 가득 채워두신 거다.
"너무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디야. 고마워이."
작고 구부러진 어깨, 돌처럼 단단하게 닳은 오목손으로 (할머니는 본인을 닮아 내 손이 작다고 늘 좋아하셨다. 재주가 많은 손이라고.) 거실에 놓인 바닥용 책상에 앉아 찬송가를 흥얼거리며 색칠을 하는 할머니의 옆모습을 보면서, 나는 차마 사실 그 책은 원래 부모님 댁에 사시는 친할머니를 드리려고 산 거라고, 근데 아무런 관심이 없다고 하셔서 가져온 거라는 말씀을 드릴 수 없었다.
평생 노동과 육아, 뒷바라지에 가려져있던 재능은 그렇게 사소한 우연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할머니는 1930년대에 경상도의 어느 마을에서 그리 부유하지 않은 집안에서 태어나, 그 시대의 여자아이들이 으레 그랬듯 자의와는 상관없이 주선된 만남으로 딸에서 가난한 시골 목사의 아내, 그리고 네 남매의 어머니가 된 사람이다.
그러니까, 이'었'다.
나에게 있어서는 늘 궁시렁대면서도 킬킬거리는 웃음이 끊이지 않던, 생선찜과 나물 무침과 송편을 기가 막히게 만들던 미친 손맛의 요리사이자, 태어난 후 첫 목욕을 시켜준 사람이기도 하고, 어릴 적 배탈이 나면 무릎에 나를 눞이고 딱딱하고 따듯한 손으로 배를 어루만져주며 전래동화를 맛깔나게 읊어주던 멀티 엔터테이너이기도 했던 사람.
태어나서 한 번도 만날 수 없을거라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자, 언젠가 서울에 있는 우리 집에 놀러 왔다 다시 시골로 돌아가려 일어서는 할머니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가지 말라고 우는 여섯 살짜리 나에게, 재밌다는 표정으로 이런 말을 한 사람이기도 하다.
"언젠가는 내는 죽어서 니랑 못 볼근디. 내는 하늘나라에서 하느님이랑 같이 있을 턴디. 니는 내 따라올라면 한참은 더 있어야 허는디. 그땨는 우짤라고 그라냐?"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란 내 기억의 할머니 사투리는 아무튼 이런 식이었다. 구수하고, 고소하고, 짭짤했다. 명절 때마다 맛보던 할머니의 음식처럼.)
할머니의 그 말은 눈물 콧물 다 흘리며 울던 나를 벙찌게 했다. 누군가 나에게 피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죽음'이에 대한 이야기를 한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나이 또래의 아이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기에는 좀 쎄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지만, 어쨌든 그 후로도 할머니는 잊을 만하면 '내가 먼저 죽을 거고, 우리는 한참 동안 못 볼거다' 라는 이야기를 습관처럼 했었다. 마치, 무슨 연습을 시키는 사람처럼.
너무 정 붙이지 마. 나는 어차피 떠날 몸이야.
생각해 보면 좀 어이가 없다. 피식, 하고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근데, 할머니는 늘 그런 성격이었다.
내가 색칠책과 색연필을 들고 찾아갔던 그날, 나를 만나러 놀러 온 사촌 동생들 두 명을 같이 옆에 앉혀놓고 옛날 사진을 꺼내 보여주던 할머니는 이런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이긋이 내 결혼식 사진이여. 표정이 아주 어두워여."
"결혼식 날인데, 기분 좋지 않으셨어요?" 하고, 옆에 있던 (진짜 요즘 아이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20대 중반의) 사촌동생이 물었다.
"아어어어어~니. 내는 결혼허기 싫었단께. 느이 할아버지가 그맇기 못생겨 보이는겨. 그러어케 결혼하는 것이 서글프고 싫었다니께. 특히 손이 그릏게 못생긴겨. 어쩜 저렇게 못생겼을까, 생각했다니께. 즈르코롬 모옷!생긴 남자 말고, 어디서 아주 자알~생긴, 그 뭐시기여, 그래, 백마 탄 왕자님이 나타났으면 좋겄다, 하고 기도했잖여. 결혼하기 직전까지 기도를 헜는디, 안 나타나더라고. 느그 할아버지가 와서 아주 기분이 안 좋았으여."
그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는 어떤 반응을 해야할지 몰라 어색하게 웃었지만, 그 말을 듣고 할머니의 사진을 보니, 정말로 기분이 굉장히 언짢아보였다. 무표정에 고운 화장을 하고 베일을 쓴 흰 드레스 차림의 앳된 할머니는, 20대 후반이었던 내가 보기에도 너무 어려보였고, (손이 겁나 못생긴) 가난한 시골 목사의 아내로 평생을 억척스럽게 살아내기에는 꿀 꿈이 아직 많아 보였다.
그 푸릇했던 소녀가 아흔이 되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거침없이 들려준 이 이야기를 할머니의 침대 위에 앉아 들었던 나와 사촌동생들은, 지금도 가끔 만나면 '못생긴 할아버지와 결혼하기 싫었던 할머니의 이야기에 대해 늘 같이 추억하곤 한다. 표정도, 톤도 진지하기 짝이 없지만 어딘지 거부할 수 없는 웃음기가 섞인, 할머니표 블랙 코미디의 정석이 되어버린 순간이다.
(참고로 할아버지는 못생겼다고 할 수 있는 얼굴은 아니었다. 키도 크고, 정장을 입으면 나름 멀쑥한 허울대였다. 하지만 우리가 그런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할머니는 아주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할아버지의 못생기지 않음을 부정했다. 특히, '손이 못생겨서' 싫었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셨다. 할머니는 늘 유쾌하고, 사람을 가리지 않고 좋아하는 성격이었지만, 남편의 손에 대한 개취만은 확고했던 것 같다.)
92세의 나이까지 비교적 건강하게 지내시다 아주 큰 고생 없이 1년 정도의 조용한 병상 생활을 마치고 돌아가신 할머니의 장례식은, 온화하고 따듯한 분위기로 진행됐다.
분향실 근처 테이블 위에 놓인 카세트 플레이어에서는 잔잔한 찬송가가 흘러나왔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4일간 계속해서 조문을 하러 방문을 했다. (3일장이 일반적이지만 보통 발인을 하는 3일 차에, 관이 옮겨질 승화원의 당일 일정이 다 찼다고 해서 할머니의 장례식은 4일에 걸쳐서 진행됐다.)
남편뿐만이 아니라 아들 둘(그리고 그중 한 명의 아내까지)도 역시 목사로 둔 할머니였기에, 여러 교회의 목사님이나 장로님, 집사님이라는 분들이 왔다 가셨고, 아주 아주 옛날에 잠깐 본 기억이 어렴풋 나는 할머니의 동생분과 엄마의 사촌 언니들과 인사를 하기도 했다.
(적어도 입관 당일까지는) 목놓아 우는 사람도 없었고, 평화로운 공기 속에서 차분하게 진행된 장례식 내내 그 자리를 지킨 나와 사촌들은 초등학생인 사촌 조카와 색종이 접기 놀이를 하고, 그동안 쌓인 근황을 공유하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중 연락도 없이 찾아온 동네 친구들의 출현에 너무 놀라 심장이 멎을뻔하기도 했는데, 알고 보니 고등어자반을 나누어주려고 했던 그 친구가 물어봤던 장례식장 주소를 가지고, 다 같이 출근 후 차를 타고 조문을 온 것이었다. 굳이 다른 친구들에게는 전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아무 생각을 안 하고 있던 차에, 다들 검은 롱패딩을 입은, 꼭 김밥같은 모습으로 옹기종기 모여 부의금 봉투에 이름을 적는 모습을 본 순간,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기분이 정말 심장 한가운데부터 퍼져나가 온몸을 채웠던 기억이 난다. 눈물이 날 것 같았는데, 눈물은 나지 않고 그냥 손이 떨렸다.
그중에는 새빨간 머리를 투블럭으로 밀고 올린 백인 친구도 한 명 있었는데, 우리가 같이 좌식 상에 앉아 콩자반과 멸치조림, 떡과 귤이 섞인 식사를 하는 것을 신기한 표정으로 흘끗 대는 사람도 적지 않게 있었던 기억이 난다.
"어떻게, 아니, 왜 왔어?" 라고 어떨떨하게 묻는 나를 보며, 새빨간 코와 볼을 하고, "무슨, 당연히 와야지." 라고 답하던 친구들을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속 깊은 곳에 뜨끈함이 솟아나는 건, 여기서만 말하는 비밀이다.
(근데 이 친구들도 사실, 돌아가신 게 몇 년간 못 본 외할머니가 아니라, 오랫동안 같이 살았던 친할머니라고 오해하고 헐레벌떡 달려왔다는 건 안 비밀.)
나중에 그 친구들 중 한 명이 말하길, 그렇게 차분하고 따듯한 장례식장에는 처음 가봤다고, 어떻게 술 마시는 사람이나 고스톱을 치는 사람, 언성을 높이며 싸우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냐고 물을 만큼 장례식의 분위기는 잔잔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짐짓 놀랐는데, 애초에 장례식에 많이 가본 것도 아닐뿐더러, 장례식에서 싸우는 인간상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해서였다. 그런데 장례식에 많이 참석해 본 또 다른 친구에 의하면, 실제로 유산 등의 문제로 멱살을 잡고 싸우는 사람들도 있다고. 영화나 드라마에서만 나오는 일은 아닌가 보다.)
마치 몇 년 전 매각한 시골의 자그마한 할머니댁에 다시금 모인 것처럼, 평균 나이 30세가 된 나와 사촌들은 정말이지 몇십 년 만에 지금이 몇 시인지 생각하지 않고, 그저 함께 시간을 보냈다. 심지어 어렸을 때부터 친해지고 싶었지만 너무나 쿨해보여 차마 말도 쉽게 못 걸었던 몇 살 위의 사촌과 깊은 대화를 나누기도 했고, 어릴 땐 나를 졸졸 따라다니며 늘 같이 놀고 싶어 하던 동생 중 한 명이 와이셔츠의 소매를 걷어붙이고 유가족 실에 앉아 부조금 장부를 보며 엑셀을 띄운 컴퓨터를 두드리는 걸 보면서, 와. 시간이 정말 많이 흘렀구나, 하는 실감에 젖기도 했다.
반대로 내가 졸졸 따라다니며 귀찮게 하던 또 다른 사촌은 몇 년 전 아내가 된 분과 같이 참석했고, 곧 아이를 가질 거라는 이야기를 했다. 이모는 요즘 시를 쓰는데, 작은 경연회에서 수상을 했다고 했다. 할머니의 결혼식 이야기를 가티 들었던 사촌동생 중 한 명의 남자친구를 보았고 (참 좋은 인상의 젊은이군, 생각했는데, 나중에 들으니 사촌동생이 다니는 교회의 전도사님이란다), 엄마의 사촌들에게서 엄마와 이모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어느 날 저녁에는 그 쿨한 사촌과 어릴 적 이야기를 하다가 눈물을 흘리던 도중, 상조 회사에서 나오신 분께서 갑자기 명함과 회사 팸플릿을 너무 열심히 들이미시는 바람에 촉촉하던 감성이 바사삭, 얼어붙는 순간도 있었지만, 그런 순간마저 코믹스럽게 기억에 남을 정도로 편안했다.
꼭 명절 같은 장례식이었다. 어릴 때부터 보던 반가운 얼굴이 가득하고, 이름 모를 먼 친척들과, 끊이지 않는 대화가 이어지는.
지금 생각해도, 사람을 좋아했던 할머니에게, 또 할머니를 좋아했던 사람들에게, 꽤 잘 어울리는 환송회였다.
유일하게 눈물이 났던 날은 마지막 날이었다.
발인을 하는 날 아침, 우리는 분향소에 모여 예배를 드렸다.
가족만이 모여 성경을 들고 하는, 작고 소박한 예배였다.
그리고 장례 지도사님의 안내로 무리를 지어 들어간 입관실에는, 하얀 천 아래 누인 할머니의 시신이 있었다.
몸이 아니라, 시신.
몇 년간 중환자 병동에서 일을 했던 친가의 사촌동생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사람이 죽고 난 후의 몸은, 그야말로 빈 껍질 같다고.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좀 매정한 말 같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보니 그 말이 적확했다.
할머니가 떠나간 몸은, 마치 누가 벗어놓은 옷처럼, 그저 주름진 피부와 머리카락, 그리고 뼈로 이루어진 어떤 고체였다.
할머니가 살았던 몸.
할머니가 살아냈던 몸.
할머니가 태어났던 몸.
더 이상 할머니가 없는 몸.
그런데도 우리가 알고 있는, 또 볼 수 있는, '할머니란 존재였던' 그 무엇은 그 몸밖에 없었다.
그것도 좀 이상하게 느껴졌다.
장례 지도사님은 우리에게 할머니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라며, 시신 주위로 모이라고 했다.
만지고 싶은 사람은 만져도 되고, 그게 부담스러운 사람은 말만 해도 된다며.
하지만 우리 가족은 모두 할머니의 주위를 천천히 걸으며 천에 덮이지 않은 할머니의 몸을 만졌다.
엄마는 할머니의 발을, 삼촌은 할머니의 손을, 누군가는 할머니의 머리카락을.
나는 할머니의 귀를 만졌는데, 언제나 할머니의 귓볼이 사랑스럽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할머니의 귓볼 주름이 신기하고, 재밌고, 좋았다.
하지만 살아 움직일 때, 만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다 큰 갑자기 할머니에게 귓볼을 만져본다고 하며 손을 뻗으면 할머니에게는 상당히 싫었을 수도 있는 일이다.
그래서 할머니가 떠나고 없는 귓볼을 처음 만져본 그때, 늘 재밌고 이상한 이야기를 들려주던 할머니의 귀는 아주 차갑고, 살짝 딱딱하고, 부드러웠다. 눈에 보이는 그대로.
'이건 할머니가 아니야.' 라는 생각이 들었다.
놀라우리만치 선명하게.
진짜 할머니는 공기 중에 떠서, 진지한 우리의 어깨너머로 본인의 몸이었던 것을 보며, 켈켈켈, 웃고 있는 것 같았다.
'뭣허려 시방 이리 질질 짠다냐.'
꼭 바짓가랑이를 잡고 울던 어릴 적의 나에게 하던 말처럼, 그렇게 경쾌하게 말할 것 같았다.
솔직히, 할머니의 몸을 보는 것.
그 귓볼을 만지며, 할머니에게보다 나에게 더 중요할 작별인사를 하는 것.
그 자체에는 눈물이 나지 않았다.
그건 그다지 슬프지 않았다.
이건, 할머니가 아니었으니까.
이미 할머니는 만질 수도 없고, 대화를 나눌 수도 없는 곳에 있는 게 분명했고, 어디에 있든 할머니는 더 이상 암덩어리가 있는 몸도, 자꾸 침침해지는 눈 때문에 좋아하는 책 읽기를 마음껏 하지 못하는 몸도 없는 곳에서, 늘 경쾌할 게 확실했으니까.
하지만 오랫동안 할머니와 같이 살았던 사촌 동생이 할머니의 이마를 어루만지며 짓는 표정과, 60대에 들어선 엄마와 남매들이 어린아이처럼 '엄마...' 라는 말을 중얼거리며 작고 작은 할머니의 몸을 잡고 쓰다듬는 모습에는 말할 수 없을 만큼의 슬픔이 솟아났다.
엄마도, 외삼촌도, 이모도, 모두 한때는 밖에서 천진하게 자기 아빠와 색종이 접기를 하며 놀고 있는 조카와 마찬가지로, 어린아이들이었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갑자기 눈앞에서 보니 알 수 있었다. 이상하리만치, 선명하게 보였다. 자신보다 훨씬 어른인, 하나밖에 없는, 자신들의 엄마의 손을 잡고 우는 어린 시절의 엄마, 외삼촌, 이모가.
그리고 그 사이를 지키고 선, 모두 성인이 된 나의 사촌들의 모습에도 겹쳐 보이는 게 있었다.
어느 해 여름, 시골 할머니댁에 모여, 따가운 햇살 아래 등목을 하고 옥수수를 쪄먹고, 진짜 해바라기 씨를 뽑아 먹던, 10살도 채 안 되었던, 한낮 아이들이었던 우리들의 모습.
더 이상 염색을 하지 않아 백발이 가득한 곱슬머리를 틀어 올린 엄마가 울고, 머리가 활짝 벗겨진 외삼촌들이 울고, 시로 수상을 한 이모가 울고, 아무튼 모두가 우는 사이에, 나는 계속 그 여름을 생각했다.
아주 아주 더웠고, 이층 옥상을 넘어서는 해바라기가 집 앞에 커다랗게 피어있고, 누군가를 요리를 하고, 누군가는 펌프로 길어 올린 지하수를 등짝에 맞고 포효하는 그 밝은 여름날을.
그때, 정말 너무 슬펐다.
내가 죽은 것도 아닌데.
내가 다치거나 아픈 것도 아닌데.
사람이 갑자기 이렇게 슬플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정말이지 그 순간만큼은, 말도 안 되게 슬펐다.
인사가 끝나고, 더 이상 할머니가 아닌 할머니의 시신이 빳빳한 삼베에 겹겹이 싸이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체감했다.
인생은 정말로, 그러니까 진짜로, 유한하구나.
역시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그때까진 어디까지나 관념적이었던 삶의 끝.
그 마무리를 지켜보는 4일은, 내 몸에서 피직 피직 전기 신호를 주고받으며 이런 것 저런 것,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 또 희망과 기대, 꿈과 절망에 일희일비하며 바쁘게 소멸하던 세포들이 그 모든 행동을 멈추고 고요해진 것처럼, 온몸을 울리는 경험이었다.
그리고 나는 결심했다.
한 번뿐인 인생을, 나한테 이렇게 주어진 시간들을, 절대로, 결코,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사는데 쓰지 않겠다고.
백마 탄 왕자님을 바랬지만 손이 못생긴 할아버지와 결혼했고, 엄청난 예술적 감각이 있었지만 그 시대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여자라는 이유로, 부잣집이 아니라는 이유로, 한마디로 할머니가 선택하지 않은 여러 가지 이유들 때문에, 대학의 문턱을 밟기는커녕 붓 한 번 제대로 쥐어보지 못한 할머니의 삶은, 아주 아주 대놓고 불행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게 그런 생각을 하게 했다.
(사실 이 시기에 아빠의 건강도 상태가 많이 안 좋았는데, 그 이야기까지 하면 내가 더 이상 글을 못 쓸 것 같아 나중으로 미루기로 한다.)
늘 이야기와 책을 좋아하던 나는 할머니의 이야기들 역시 좋아했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애매하고, 주체할 수 없는 장난기가 넘치지만 날카롭고 진지한 할머니의 생각들을 좋아했다.
(언젠가 할머니가 현금을 세서 뭉치별로 나누는 걸 보고 재미있어 보여 나도 따라한 적이 있는데, 그런 날 보며 할머니는 '돈은 더러운 거니까, 너무 가까이하지 않는 게 좋다'며, '돈을 만지고 나서는 꼭 손을 씻어야 한다' 라고 했다. 그리고 돈을 다 센 내가 손을 잘 씻는지 직접 확인했다. 지금까지도 나는 할머니가 말한 돈이 지폐를 말하는 건지, 가치 교환에 쓰이는 수단으로써의 돈인지 모른다. 그리고 방학 숙제로 읽고 있던 유관순 열사에 관한 책을 보고, '지금부터 유관순이라는 소녀가 어떤 고문을 겪었는지 이야기해 주지' 라며 다소 끔찍하고 구체적인 고문에 관한 이야기를 해준 것도, 할머니다. 덕분에 나는 내가 태어난 날이기도 한 삼일절의 의미를 망각해 본 적이 없다.)
손에 무언갈 쥘 수 있자마자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던 것도, 끊임없이 생각을 조잘거리는 것도, 책을 좋아하는 것도, 피아노를 치거나 노래를 부르는 데에 관심이 있는 것도, 엄마는 항상 예술성이 있고, 입담이 좋으며, 책을 달고 살아온, 흥이 넘치는 할머니를 닮아서 그런 거라고 이야기했었다.
할머니는 살짝 짝짝이인 내 눈썹이 자기 눈썹과 닮아서 꼭 붓으로 그린 것 같다고 했고, 나는 그래서 짝짝이인 내 눈썹이 그다지 싫지 않다. 내가 늘 열심히 손질하던 머리를 빡빡 밀고 나타났을 때, '거 참 시원해보인디야. 아주 잘~생긴 남자 같다!' 라고 말해주었다. 자기 자식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내게도 습관적으로 '너는 언제 시집 갈거냐?' 라고 묻곤 했지만, '맘에 드는 남자가 없어요.' 라는 대답으로 조금 더 복잡한 내 현실을 은근슬쩍 가리면, '그래? 그럼 너는 결혼하지 말여. 어디 예쁘고 착한 여자 친구랑 둘이 사얼으라. 집안일이랑은 걔한테 맡기고. 잉? 친구끼리 알콩달콩, 부부처럼 살면 좋겠디야, 니는.' 이란 말로, 아직 친척 중 누구에게도 지향성과 정체성에 대한 커밍아웃을 하기 전이었던 나를 조용히 넉다운 시키기도 했다.
이렇게 나와 닮았다던,
이야기를 좋아하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좋아하던,
이런저런 근황들로 미루어보다 어쩌면 나처럼 ADHD를 가졌을지도 몰랐던 할머니의 삶은,
끝났다.
확실히.
돌이킬 수 없게.
그 이후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사실 할머니의 인생이 어땠는가는, 우리가 얼마나 할머니를 기억하느냐와 별개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는 우리의 할머니로서,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사모로서, 충실히 역할을 다 하신 분이다.
완벽하진 않았지만, 또 정말, 정말 돈이 없었지만, 어쨌든 성실하게, 탈선하지 않고, 손이 못생긴 남편 옆 자리를 꿋꿋이 지켜냈다.
그래서 우리는 할머니를 기억하고, 추모하고, 그리워하고, 계속해서 애정한다.
그런데, 할머니에게 있어서, 할머니의 인생은 어떤 거였을까?
하는 생각이 맴돌았다.
할머니는 살아서, 행복했을까?
다시 산다고 하면, 다시 태어난다고 하면,
할머니는 할머니가 산 인생을 택할까?
승화원에서 할머니의 화장이 끝나고, 화장이 끝난 유골을 안치하고 나서, 우리는 점심식사를 하러 각자의 차에 올라탔다.
할머니였던 머리카락과 뼈와 살이 모두 불타 재가 되고, 그 재를 모아 담아 유리 뒤에 보관한 뒤 (왜 성경에서 나오는 내용과 더 비슷하게, 흙에 묻지 않는지는 좀 궁금하다) 점심 메뉴를 고민한다니.
생각해 보면 뭔가 어색한 일련의 사건들이지만, 아직 눈이 녹지 않은 안장터에서 본 한겨울의 아침은 청명하고, 깨끗했다.
6.25 참전 용사들이 그려진 벽 앞에서 우리는 외삼촌이 드리는 기도를 들었고, 다들 역시 김밥 같은 롱패딩을 걸친 차림으로 저벅저벅 걸어 주차장으로 돌아가는 길에, 길고양이를 보고 흥분해 온몸으로 인사하는 사촌 조카의 모습을 핸드폰으로 담았다. 뽀로로처럼 안경을 쓰고 꺄악 꺄악, 손을 흔드는 게, 정작 저만치 선 길고양이는 긴장해서 얼어붙은 상태였지만 그 장면 자체는 정말 너무 귀여웠다.
주차장에 도착해서 차에 올라타기 전, 내가 따라다녔던 사촌, 1년 후 아기 아빠가 될 그 사촌은 나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 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이거, 할머니 유품 정리하다가 나온 거야. 너 이때 기억나?"
기억났다. 우리는 각자 7살과 9살이었고, 나는 그때 그 사촌이 나랑 안 놀아줘서 굉장히 기분이 안 좋았었다.
하지만 사진 속의 나는 웃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활짝.
"기억나지. 우와. 이런 사진이 있었네."
"그러게. 우리 그때, 엄청 재밌었는데. 그때 우리 등목도 하고, 옥수수랑 고구마도 쪄먹고. 어제, 그 생각이 많이 나더라."
"...그랬어? 나도."
"너도? 그랬구나."
"응. 나 이 사진, 찍어도 돼?"
"그럼."
그리고 장갑을 낀 사촌이 손바닥에 든 사진을 나는 역시 장갑을 낀 손으로 핸드폰을 잡고 찰칵, 담았다.
역시 비현실적이고, 어색한 면이 없지 않은 순간이라는 생각을 하며.
그리고 점심 식사 자리에 도착해, 다들 그 해 여름, 좋았던 추억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걸 들었다.
"너도 그때 생각했어? 나돈데."
"오빠도? 나도."
"앗, 너도? 나도."
"애들한텐 그 여름이, 참 소중한 기억으로 남았나 보다."
"그러게. 어머님댁이 시골이었어서, 그런 점은 좋았던 것 같아요."
그렇게 우리는 감자탕과 된장찌개를 먹고, 나와 쿨한 사촌은 막걸리를 한 잔씩 나눠마시고, 곧 다시 보자며, 웃는 얼굴로 헤어졌다.
그리고 한 달 후, 역시 일산에서 열린 고모부의 장례식장에서 다시 모두 다 모였다.
그때의 분위기는 그다지 밝진 않았다.
모두 한결 더 피곤한 안색이었고, 장례식장의 느낌 자체도 다소 어두웠다. 그런 분위기에 너무 동화되는 것이 싫어서 열심히 밥을 먹고, 열심히 대화를 이어가던 나는 큰 외숙모에게 의도하지 않은 커밍아웃을 해버리기도 했고, 아직 장례식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사촌 조카는 "여기는 내 장례식이다!!" 라고 외치며 돌아다녔다. 그건 웃겨서 다들 조금 웃었다.
그리고, 이 장례식에서는 약간의 신경전과 싸움이 있었다.
친구가 했던, 장례식에서 싸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사실이었다.
근데 완전 무식하게, 멱살을 잡고 싸운 건 아니고, 정말 흔하게 볼 수 있는 남매의 싸움이었다.
또 옆에서 보기에도 너무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는 했다.
유산에 대한 건 아니었지만, 또 돈과 관련이 없다고 하기도 뭐 한...?
아무튼, 두 달 사이에 장례식을 두 번 치른 가족들과, 나의 마음은,
확실히 지쳐 있었다.
물론, 다들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여기까지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놀기로 한 1년, 그 시작의 몇 달 전 있었던 일이다.
죽음 앞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러모로 고요해진다.
많은 '척'들을 내려놓는다.
그렇지만, 완전히 무장해제를 하는 것은 아니다.
사랑하는 가족의 장례식에서조차, 기본적으로 지켜야 하는 척들은 존재한다.
어떻게 지내? 라는 질문이나, 요즘 뭐 해? 라는 질문에는, 그럴듯한 대답을 들려주려고 하고,
따듯하든, 그렇지 않듯, 슬픔이 존재하는 공간에는 늘 그만큼 조금 더 밝고, 조금 더 희망찬 표정을 지으려는 얼굴들이 있다.
그게 나쁘다거나,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전혀.
결국 장례식은 살아있는 사람들이,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해 벌이는 일이니까.
그리고 그런 미소들과 말들, 가끔 포개지거나 마주 잡아본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많은 위로를 받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도, 그 질문은 나를 떠나지 않고, 두 차례의 장례식이 모두 끝난 후에도 가슴속을 맴돌았다.
할머니.
사랑하는 우리 할머니.
우리는 할머니랑 한 시간이 행복했는데.
할머니는 행복했을까?
할머니의 삶을 살아서 행복했을까?
아니, 할머니의 삶은 정말 할머니의 것이었다고.
할머니는 그렇게 생각할까?
그게 참 이상했다.
내 기억 속의 할머니는 늘 웃고 있는데.
그런데도 집에 돌아온 나는 할머니가 칠해놓은 색칠책의 페이지들을 찍어둔 사진들을 계속해서 넘겨보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질문은 왜인지 계속해서 내 속을
맴돌다가,
맴돌다가,
점점 크기를 키워나가다,
언제부턴가 내 속에 하나, 둘 씩 생겨나있던,
텅 빈 옹이 같은 공허 속으로 서서히 스며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