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암 중, 아빠의 다섯 마디 진심.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는 조금은 강박적인 생각에 잡아먹혔다.
산다는 건 뭘까?
음. 그래.
잡아먹혔다는 표현이 적확한 것 같다.
마치 고래 뱃속으로 들어가 요나처럼.
한동안은 이 컴컴하고 거대한 의문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누구나 한번쯤은 던지는, 유치하기도 하고 가슴이 아리기도 한 질문이지만,
그때의 나에겐 피부 밑 어딘가로 깊이, 깊이, 깊이 잠겨서 눈을 깜빡이지 않고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만 같은 느낌의 집요한 감각이었다.
당시 나는 독립해서 살며 프리랜서로 여러가지 일을 하고 있었고,
꽤 멀리 떨어져 살며 정기적으로 통화를 주고받는 아빠와 한참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이기도 했다.
아빠는 코로나가 번지기 시작한 바로 그 시기에 피부암의 일종인 흑색종 진단을 받고 몇년째 항암 치료를 받고 있(었)는데, 당시 쓰던 약의 부작용이 너무 심해 치료를 중단할까 고민하던 시기에 열린게 할머니의 장례식이었다.
그 장례식 동안 엄마와 아빠, 나는 병원 근처의 사촌동생 집에서 같이 묵었고, 아빠는 몸이 너무 안 좋아 하루종인 사촌동생의 침대에 누워 오지 않는 잠을 청하려 끙끙대거나 (항암 환자들을 위한 진통제의 부작용 중 하나다), 가려운 피부를 벅벅 긁으면서 침대의 깨끗한 이불에 혹여 피가 묻을까 조심하며 시간을 보냈다.
나는 매일 밤 나머지 가족과 동생의 집으로 돌아와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아빠가 누워있는 방에 들어가서 불도 안 켠채 한 두시간씩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어둠속에서 서로의 목소리에 쉬를 귀울이며,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했더라?
외국에 살고 있어서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한 동생 부부 이야기를 했고, 그날 장례식에 찾아온 손님 이야기를 했고. 특별히 맛있었던 반찬 이야기와, 우리가 장례식장에 있는 동안 안부 전화를 했다는 아빠의 고등학교 동창 이야기. 뭐 이런 걸 했던 것 같다. (아빠는 그때 입맛이 전혀 없어서 우리가 챙겨오는 음식도 거의 못 먹을 때였는데, 나는 소용이 없을거라는 걸 알면서도 아빠의 입맛을 돋구려고 괜히 더 음식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그리고 또,
우리들은 장례식 이야기를 했다.
아빠가 원하는 장례식은 뭐야?
어떤 음악을 틀었으면 좋겠어?
할머니는 사모님이니까 어쩔 수 없지만, 나는 찬송가는 좀 별로인 것 같아. 아빠랑 안 어울려. 비틀즈 노래들은 어때? (아빠는 팝송을 좋아한다.* 덕분에 어릴적 아빠가 운전하는 차 안에서 우리는 매주 일요일, 교회로 갔다가 오는 길에 늘 서양 음악(?)을 듣곤 했고, 내 기억 속 교회=팝송이라는 신기한 연결고리가 생겼다.)
부고 소식은 누구한테까지 알렸으면 좋겠어?
수의는 어떤 걸 입고 싶어?
요즘에는 장례식에서 영상을 틀기도 하던데. 만약에 원하는 게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나 편집 잘하잖아.
누군가에게는 이상하거나 매정하게 들릴수도 있는 대화지만, 나와 아빠의 대화는 늘 이런식이었다.
어렵고 무거운 주제일수록 가볍게 다루고, 서로 맞받아치는.
심지어 할머니처럼 화장을 하는 게 좋을지, (아직은 건강한) 엄마가 원하는 본인의 장례방식처럼 수목장이 더 좋을지를 두고 토론을 하기도 했다. (나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동생 부부의 아기와 내가 같이 찾아가려면 확실한 지표가 있는 곳이 좋지 않겠냐고 했고, 아빠는 화장 후 본인의 재를 우주에 쏘면 어떻겠냐는 이야기를 했는데, 생뚱맞게 들릴지 모르지만 농담처럼 하는 그 말 속에 진지함이 있다는 걸 너무 잘 아는 나는 머릿속에서 계산기를 두드려보았다. 그러려면 장례 비용이...?)
할머니의 장례를 치루며 '사전장례의향서'라는 것이 있다는 걸 새로 알게 돼서 나누었던 대화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 정도로 아빠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몇번이나 반복된 수술과 방사선, 독한 약물 치료에도 무럭무럭 전이된 암세포들은 맨눈으로도 훤히 보일 정도로 아빠의 몸 곳곳에 퍼져 있었고, 얼핏 보면 멍처럼 보이는 그 모습들은 피부 아래로 하루가 다르게 튀어나오며 쓸데없는 존재감을 과시했다.
우리는 장난처럼, 가볍게, 날씨에 대해 이야기하듯 언젠가 열릴 아빠의 장례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지만, 말로 하지 않는 것들과 말로 하기 어려운 것들은 우리 사이의 공기 속에, 아니 공기처럼 무겁고 짙게 깔려, 어둠속에 웅크린 채 우리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너는 네 삶을 살아."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몇 개월 전, 어느 저녁 나누었던 아빠와의 통화에서 우리는 토론을 하지도, 농담을 하지 않았다.
아빠는 진짜로 울었고, 나는 침대에 누워 닫힌 창문을 바라보며 처음으로 듣는 아빠의 몇 가지 고백들에 귀를 기울였다.
그 중에는 너무 슬퍼서 평생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은 것들도 있지만, 지금 여기서 나누고 싶은 것도 있다.
그때까지 (지금도 여전히) 누가 안부를 물어와도 늘 '괜찮다. 아직 죽지 않고 살아있으니까. 사는데까지 사는거지, 뭐.' 란 대답을 하던 아빠가,
집안의 장남으로서 모든 기대를 한 몸에 입고, 보란듯이 성공해 주변의 여러 사람을 아낌없이 돕던 아빠가,
그만큼 자존심도 자존감도 늘 지붕뚫고 하이킥이던 아빠가,
믿었던 사람에게 큰 사기를 당했을 때도 힘든 티 한 번 내지 않고 '그래도 먹고 살만한 돈은 있으니 괜찮다'던 아빠가,
언제나 부담스러울 정도로 씩씩하고 활기차던 바로 나의 아빠가,
매순간 숨쉬듯 쓰고 있던 모든 척을 내려 놓은 순간에,
처음으로 가장이자 사나이로서의 '괜찮은 척'을 어딘가에 내동댕이 친 채 인간으로서의 심정을 이야기하던 순간에, 그 모든 건 내 심장의 세포에 새겨졌다.
아빠가 아무런 가면도 쓰지 않고 나에게 한 이 다섯 마디.
"외로워."
와,
"너는 네 인생을 살아."
평생 아빠는 확실하고 상식적인 가치에 따라 살아온 사람이다.
오랜 시간에 걸쳐 세상과 사회가 빚어내고, 증명서류를 뽑아 인감까지 찍은 원칙과 도덕에 따라 말이다.
길거리에서 쓰레기를 보면 주워서 버린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면 도와준다.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님께는 효를 다한다.
내가 꾸린 가정에 충실한다.
술과 담배를 하지 않는다.
신이라는 존재가 믿기지 않아도, 교회는 일주일에 한 번씩 꼬박 꼬박 나간다.
(물론 십일조도 스킵하는 일 없이 헌금한다.)
이 모든 걸 당연하게 생각하고, 그에 따라 결심하고, 그에 따라 평생을 살아온, 찾아보면 없진 않지만 또 아주 흔하지도 않은 사람이다.
한 번도, '이렇게 사는게 맞나?' 라는 고민 따위는 커녕, 자신처럼 살지 않는 모든 사람들에게 혀를 차며 '왜 저렇게 사냐.' 라는 말을 참지 않던 사람.
그만큼 아빠는 본인의 삶과 가치관에 확신이 있었다.
그런 아빠가 조용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나에게 전달한 이 네 마디는, 무의식 중에 나와는 너무 다른 인간인 아빠의 전철을 어느정도 따라 밟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에 미치지 못하는, 그럴 수가 없는 삶의 언저리를 애매하게 떠돌던 나에게 절대적인 의미로 다가왔다.
그런데 장례식을 마치고 난 나는 산다는 게 뭔지, 그것조차 모르겠는거다.
그게 너무 답답하고 억울해서 나는 한참을 웅크린채로 지냈다.
아빠는 계속 아팠고,
나는 계속 의심했다.
사는게 뭘까.
산다는 게 뭘까.
살아있다는 건 알겠는데.
내 몸이 움직인다는 건.
아직 젊고, 비교적 건강하고, 뭔가 해야 될 일들이 있다는 느낌이 드는 건 확실한데.
근데,
이것들이 모두 가치 있는 걸까?
아니면 상대적인걸까?
죽지 않고 살아있으니 의미가 있는건가?
아프지 않고 건강하니까?
내가 아프지 않고 건강하면,
그러면 내가 사는 삶을 내 삶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아니면 그 기준이 따로 있나.
아니, 우선 산다는 게 도대체 뭐냐고.
건강하면 아플때까지 열심히 일하고 돈 벌고,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이다가
때가 되면 죽는 거.
그렇게 죽기 전에, 하지 못한 것들을 후회하는 거.
그치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괜찮은 삶을 사는 거.
그게 사는거야?
다들 그렇게 사는 것 같던데.
다들 그렇게 사려고 하는 것 같던데.
근데 그렇게 살지 말라는 말이잖아, 아빠는.
그건 어떻게 하는 건데?
가르쳐 준 적이 없어.
보여준 적도 없어.
할머니도 그렇게 살지 못했고,
아빠도 그렇게 못 산거잖아, 결국엔.
그리고 이제 할머니는 없어.
좀 있으면 아빠도 없을지 몰라.
나도 언젠간 없을텐데.
그때까지 정말 난 뭘 어떡하지?
어떻게 살면 되지?
씨발.
답이 없으면 어떡하지?
대강 이런 생각들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확실히는 모르겠다.
당연하지만.
다만 한 가지는 명확해졌다.
'그냥' 살 수는 없다는 것.
이렇게 안 괜찮은데,
그저 '괜찮은 척' 하면서 살 수는 없다는 것.
다른 사람에게는 보여주기 어렵더라도,
나 자신과만은 가면을 쓰지 않은 맨 얼굴에 익숙해지기로.
이후 몇 년간 항암제의 투여 중지 대신 투여 용량과 빈도를 낮추고, 때때로 필요한 감마나이프 방사선 수술을 받아가며 (운 없이 걸린 코로나와 폐렴 등으로 롤러코스터를 몇 번인가 더 타면서) 아빠가 조금씩 안정되어가는 동안,
나는 혼자 그런 약속을 했다.
산다는 게 뭔지 알아봐야겠다고.
그리고, 이왕 하는 김에,
내 삶을 산다는 건 또 뭔지.
알아봐야겠다고.
제대로,
아직 살아 숨쉬는,
할머니를 닮고
또 아빠를 많이 닮은,
내 이 몸으로,
말이다.
P.S.
사실 이 글은 저저번주에 이미 한 번 써서 올렸던 건데, 며칠 후 다시 읽어보니 너무 장황하고 어색해서 발행 취소를 해버렸다.
그리고 다시 쓰기로 했다.
나에게 있어서는 중요한 이야기이긴 한데, 아직 현재 진행중이라서 쓰기가 어렵다.
어떻게 써야할지 잘 모르겠다.
그래도 써야될 것 같다.
그래서 쓴다.
그러니 가끔은 빵구가 나거나 글이 올라갔다 내려가더라도,
눈치 못 챈 척 해주면 굉장히 고맙겠다.
(아니면 말고.)
잘 하지는 못하더라도 정직하게 하려고 노력중입니다.
네.
다음 글에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