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오래 전에 쓴 글이다.
종수라는 아이가 있습니다. 종수는 10살 된 제 딸아이의 친구이고, 작년에 딸아이와 같은 반이었습니다.
제가 종수의 얼굴을 처음 본 건 작년 이맘 때 쯤 이었지만, 종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건 학기 초부터 거의 일 년 내내 동안이었습니다.
처음엔 ‘엄청 까불고, 떠들고, 여자 친구들 괴롭힌다’ 길래 흔한 개구쟁이 녀석이겠거니 생각했는데, 한두 달 지나면서 ‘수업시간에 도망가서 화장실에 숨어있는 걸 선생님이 찾아냈다’느니 ‘위 학년들과 막대기 들고 싸웠다’느니 ’형들이 종수에게 정수기의 뜨거운 물을 뿌렸다'느니 하는 좀 거친 소식을 들을 수 있었고, 나중에는 ‘뭔가를 훔쳤다’느니 ‘종수 아빠가 학교에 또 다녀가셨다’느니 하는 소식에 좀 문제 있는 아이구나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딸아이 생일은 12월 26일입니다. 초등학교 입학하면서부터 자기 생일 파티를 챙기더니 작년에도 역시 날짜를 며칠 앞당겨 겨울 방학식 하는 날 생일 파티를 해달라고 졸랐습니다. 친한 친구만 초대하면 초대 못 받은 친구들이 섭섭해 할 것 같아서, 반 친구 모두에게 초대장을 돌리기로 하고, 딸아이랑 같이 초대장을 만들었습니다. 초대장을 만들다 말고 딸아이가 말합니다.
“엄마, 종수도 초대할까?”
“그럼, 종수도 같은 반인데 당연히 초대해야지.”
“그런데 종수는 친구들이 모두 싫어해서 한 번도 생일파티에 초대받은 적이 없어.”
“그럼 너도 종수가 싫으니??”
“아니, 종수가 날 괴롭힌 적은 별로 없으니까...”
그렇게 해서 종수도 생일파티에 초대되었습니다.
방학식을 마치고 참새 떼 같이 재잘거리는 아이들이 알록달록 포장한 선물을 하나씩 들고 한꺼번에 집안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 가운데 유난히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종수를 볼 수 있었습니다. “네가 종수구나!” 하고 얼굴을 쓰다듬는데, 아이 같지 않게 까칠까칠한 볼이 손 끝에 와 닿았습니다.
점심때쯤 시작된 생일파티에서 집과 놀이터를 번갈아 몰려다니며 신나게 먹고 놀던 아이들은 4-5시가 되어서야 대부분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종수 하나만 여섯시가 넘어 이미 바깥은 어두워졌는데도 집에 갈 생각을 안 합니다.
“종수야, 부모님께서 걱정 하실 테니 그만 집에 가고 내일 다시 놀러와.” “괜찮아요, 누나한테 전화했는데 많이 놀다 오라고 했어요.”
결국 종수는 그날 저녁까지 먹었습니다.
집에 갈 때 쯤 잘 놀던 종수와 딸아이가 옥신각신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엄마! 난 괜찮은데 종수가 이 장난감 자꾸 빌려 주겠대”
무슨 일인가 했더니,
종수가 손에 작은 장난감을 들고 있어서 딸아이가 뭔가 싶어 그냥 한 번 봤는데, 종수는 그 장난감을 딸아이한테 빌려주겠다는 겁니다.
딸아이는 어떤 장난감인지 궁금해서 본거고, 안 빌려줘도 된다고 했는데도, 종수는 한사코 빌려주겠다고 했고, 그래도 딸아이가 계속 싫다고 하자, 기어코 딸아이 방으로 가서 책상 서랍 속에 그 장난감을 넣고는, 내일 꼭 찾으러 오겠다며 집으로 가버렸습니다.
그리고 종수는 정말 다음날 아침에 왔습니다. 오자 말자 100원 짜리 동전을 딸아이 손에 쥐어주면서
“너 가져”라고 하더군요.
점심 때 잠깐 외출을 하고 돌아와 보니 이 서랍 저 서랍에 넣어둔 물건들이 온 집에 널려있고, 심지어는 어떻게 찾아냈는지 베란다 창고 구석에 넣어두었던 물건까지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둘은 사이좋게 어깨를 맞붙이고 게임을 하느라 정신 없었구요.
그날도 종수는 저녁이 다 돼서야 억지로 집에 갔습니다.
그렇게 며칠을 종수는 출근 도장 찍듯 저희 집에 놀러 왔습니다.
하루는 오후에 애들 데리고 외출할 일이 있어서 종수에게 사정 얘기를 하고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런데 외출 준비를 마치고 현관문을 여는데 문 앞에 종수가 서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순간 많이 놀랐고, 솔직히 좀 섬뜩한 느낌도 받았고, 뭐랄까.....하여튼 짧은 시간이었지만 복잡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조금 냉정한 목소리로 종수에게 내일 다시 와서 놀라고 타일렀지만, 종수는 몇 걸음 걷더니 또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습니다.
“종수야, 집에 가라니까!...”하면 또 몇 걸음, “종수야!!....”하면 또 몇 걸음... 그렇게 종수와 저는 신경전을 벌이 듯 시간을 보냈습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딸아이가 냉큼 다가가 종수 손을 잡더니
“엄마, 내가 저 아래 수퍼까지 종수 데려다주고 올게” 합니다.
잠시 후 딸아이가 와서 말합니다.
“내가 수퍼까지 데려다 줬는데, 종수가 수퍼 앞에서 꼼짝도 안 해.
내가 이만큼 와서 뒤 돌아보니까 또 그대로 서 있더라, 어떡하지??”
그날 온종일 착잡한 마음으로 보냈습니다.
그리고는 저녁 먹으며 남편에게 종수 이야기를 하다가 저는 기어이 눈물을 쏟고야 말았습니다.
종수라는 애.......나쁜 아이 아니야......
아기 예수 같고, 아기 부처 같아........
하얀 종이 위에 그게 나쁜 줄도 모르고 나쁜 그림만 그리고 있는 건데...
그런 걸 알면서도 내가 문 앞에 서 있는 종수를 보는 짧은 순간 얼마나 많은 부정적인 감정이 오갔는지 알아??
한 번 머리 쓰다듬어 줬다고, 내 아이 안듯 한 번 꼭 안아줬다고, 들이밀듯 파고드는 그 어린 영혼 앞에서
난 왜 이렇게 몸을 사리는 거지? 왜 그 아이를 온전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거지?
나중에 우연히 담임선생님을 통해서 종수 이야길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아빠가 재혼을 하셨는데 새 어머니가 종수에게 너무도 무관심하고,그래서 하루 종일 밖으로만 돌아다니며 동네 나쁜 형들 쫄병 노릇한다고. 또 그들로부터 거칠게 싸우는 것과 대형 마트에 가서 물건을 훔치거나 마을 버스를 타고 가다 옆자리 아줌마의 지갑에 손을 대는 것도 배웠답니다.
그런 일들로 종수는 학교에서도 학부모들 사이에서도 이미 ‘나쁜 아이’, ‘문제아’ 라고 불리고 있었습니다.
방학 하고나서 한동안 쉬지 않고 놀러 오던 종수는 어느 날 부터인가 얼굴을 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겨울 내내 종수 생각을 하며 지냈습니다. 그 시간동안 저 자신도 종수에 대한 못난 생각을 어느 정도 정리했고, 딸아이에게도 개학하고 반이 바뀌더라도 종수랑 친하게 지내라고 말했습니다.
딸아이도 “엄마, 이제 다른 친구들이 종수 따돌려도 내가 종수랑 놀아 줄 거고, 종수 괴롭히는 애들 있으면 내가 다 때려 줄 거야!!”
우리 둘은 이렇게 다짐(?)했습니다.
개학식을 마치고 집에 온 딸아이는 가방을 내려놓으며 말합니다.
“엄마, 종수 전학 갔대”
곧 딸아이 생일이 다가옵니다. 지난 생일날 종수는 빨강 꽃모양의 머리 방울을 선물했습니다.
지금도 가끔 딸아이 머리에 예쁘게 달려있는 그 머리 방울을 볼 때마다 종수 생각을 하곤 합니다.
그 녀석, 어디에 있건 잘 자라면 좋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