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이야기
대학 4학년 때이다. 그 당시에는 학생들도 이런저런 공모전에 그림을 내는 일이 흔히 있어서 주요 공모전을 앞둔 때면 출품할 그림을 그리느라 밤늦게까지 실기실이 북적이곤 했다.
그런 분위기에 편승해서 나도 처음으로 <대한민국 미술대전>에 그림을 출품했고, 입선을 했다. 가장 권위 있는 공모전이기도 했고, 첫 시도이기도 했고, 입상한 작품들이 한 달 동안 국립현대미술관에 전시되기도 했고... 아무튼 수상은 내 자신은 물론이고 부모님에게도 큰 선물이었다.
고등학교 때 친정아버지의 사업이 기우는 바람에 나는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그림을 가르치며 학비를 벌고 생활비도 보태야 해서 늘 빠듯했다.
그때 한의사인 아버지의 친구에게 입선한 그림을 팔게 됐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림 판매가 성사됐는지는 잘 모르지만, 아마도 사업의 부도로 의기소침하던 아버지에게 딸의 입선은 모처럼 어깨를 펼 수 있는 자랑거리였고, 소식을 들은 친구가 도와주는 마음으로 그 딸의 그림을 사준 것이 아닐까 짐작한다. 물론 아버지 입장에서도 학생 그림이라기보다는 상을 받은 그림이라서 부탁 같은 판매를 하는 것도 그리 꿀리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아무튼 그 그림은 전시가 끝나자마자 상장의 사본과 함께 보내져서 그 분이 운영하는 한의원의 로비에 걸렸고 나는 그림 값으로 한 학기 등록금 정도를 받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25년이 지난 후 어느 날 아버지한테 이상한 부탁을 전해 들었다. 그 한의사 친구가 그림을 바꿔달라고 했단다. 뜬금없는 소리에 상황이 파악되지 않아서 잠시 멍하니 있었다. 자세히 들어보니 오랫동안 걸어놓은 그림을 도로 가져가고 요즘 작업한 새 그림을 걸고 싶다는 거였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단칼에 안 된다고 거절했다.
며칠 있다가 그림을 가져가라는 연락을 다시 받았다.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아버지를 통해 그림 값을 보냈고, 얼마 후 내 그림이 돌아왔다.
나는 그림을 작업실 구석에 세워둔 채 눈길도 주지 않았고, 그 불쾌한 일이 떠오를 때마다 생각의 머리를 싹뚝 잘라냈다. 그리고 결국 아버지와 그 친구의 오랜 인연도 끝났다.
한참 시간이 흐른 어느 날 비로소 알아차렸다. “어? 내 그림이 돌아왔다!”
햇병아리 시절에 어찌어찌 완성해서 상 받았던 그림, 하지만 내 품에서 잠깐만 머물렀던 그림. 사진으로만 가지고 있던 그림 말이다.
중간에 쓴 황당한 스토리에 마음을 뺏기지 않고 보면, 결국 나는 아주 특별하고 오래된 친구를 다시 만난 것이다. 드라마는 해피 엔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