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그리는 이유

내가 오직 나로 존재하는 시간

by 민용

두달정도 그림을 제대로 그리지 않았다.

통영에 갔던 혼자여행에서만 작은 그림 욕구가 솟아나 그렸을 뿐, 2달이 넘는 기간동안 그림을 전폐(?)했다. 그 이유는 나도 모른다.

오늘 남편이 아주 오랜만에 아이들을 데려다 주게 되어 8시 반부터 나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긴긴 시간이 주어져서 일까, 성욕이 미친듯 솟아나 닥치고 섹스를 하듯이 주체할 수 없이 그림 욕구가 솟아나더니 그림가방을 거칠게 찾아 들고 물통을 엇갈리게 조립더니 물도 다 흘리며 받아내서는 스케치북에 마스킹 테이프를 붙이는둥 마는 둥 하고 연필로 위치만 대강 잡고 채색을 시작했다.

나에게 그림이란 아마도 드로잉이 아니라 페인팅임이 틀림없다.

한달여 전 쯤 찍어둔 집앞 분홍빛 노을을 작은 스마트폰 화면에 열고 농도도 맞지 않지만 거칠지만 순결한 마음으로 까만 풍경을 그려갔다.

이 그림의 핵심인 검은 나무 줄기와 가지들이 털처럼 지저분하게 표현되버린 부분은 아쉬웠지만 그림을 완성하고 난뒤의 내 마음은 어쩐지 충만해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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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 더 그리고 싶었다.

통영에서 보아둔 좋은 풍경이 있었다.

그림으로 그리면 딱 좋을 풍경을 구도에 맞게 찍어두었더랬다.

그 풍경도 그림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라이너는 두꺼우면 안된다. 시험삼아 10개도 넘개 사보고 색도 여러가지 사보았지만 난 고급진 인간이 아니어서인지 싼게 좋다.

천원 조금 넘는 가격으로 살 수 있는 윈저앤뉴튼의 0.3 검정 라이너로 연필로 점찍어둔 곳을 토대로 슥슥 나무 부터 그려나갔다. 계단은 망했지만 어느정도 구도는 맞았고 뒷풍경들은 역시 흐릿하게 표현하도록 대충 그려버렸다.

그리고 또 채색.

최근에 이렇게까지 집중한 적이 있었던가.

방학이라는 좋은 쉼의 기간동안 오히려 나는 더 산만하게 살아왔다.

운동을 하면서도 오디오북을 듣고 오디오북을 끄면 넷플릭스를 켜고 라면을 먹고 다 먹고 나면 방금 본 넷플릭스 프로그램을 유튜브에 찾아보고 그것도 시시해지면 오늘의 집을 켜서 가구들을 스캔했다.

다시 돌아보면 이것 하면서 저것 생각하는 너저분한 시간들을 보내왔다.

내가 이것을 하고 있다는 자각도 없이, 지금 하고있는 그것의 본질에 뛰어들어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는 몰입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구름도 없이 오묘하게 변하는 파아란 하늘을 어떻게 표현할지, 따듯한 겨울 햇빛으로 인해 여러 가지 색을 내는 나뭇잎의 아슴한 형체, 독특한 무늬로 기억되는 기념관의 외관에는 어떤 색을 섞고 어떤 정도의 농도로 어떤 순서로 채색할지 모든 나의 신경과 감각을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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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까지 1,2차로 나누어 채색한 후 사인으로 마무리하자 그림이 완성되었다.

인스타에 두 그림을 모두 업로드하고 나니 시간은 10시 반이 넘어있었다.

그림을 그리면서도 느꼈지만 충만하고 나인 느낌.

굳이 잘 그리지 않아도, 틀리게 그리고 어색하게 그리고 선이 삐뚤어지더라도, 나는 그림을 그려야만 한다.

누가 어떤 차를 샀고 누가 어디에 얼마동안 여행을 갔다왔고 누가 어디로 이사를 가는지, 어떤 가구와 어떤 침구와 어떤 그릇을 사야하는지 생각하는 것은 내가 나로 사는 시간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남들에게 어떻게 보여야 하는지 생각하는 시간일 따름이다.

그림은 내가 그냥 나로서 존재하는 시간이다.

나는 그림을 그려야한다.

그려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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